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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씨름도) – 네이버 블로그
이렇게 옛 그림, 특히 풍속화를 찬찬히 감상하노라면 어느덧 그림이 안내하는 대로 그 시절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김홍도의 「씨름도」역시 찬찬히 그림을 보노라면 마치 조선시대의 어느 장터에서 열린 씨름판에 구경꾼으로 앉은 듯 손에 땀을 쥐며 승부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돌려 그 씨름판의 긴장감어린 승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어느새 그들과 하나가 됨을 느낀다. 구경꾼들의 머리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마치 정지된듯하던 화폭 속의 씨름경기는 금방 누가 넘어질 듯 승부의 향배를 점쳐볼 수 있다. 그리고, 씨름꾼 두 명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짚신과 고무신으로 보이는 고급 신발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발의 차이는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아님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씨름이라는 종목이 민중들의 경기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신분을 떠나서 힘 대 힘으로 겨루던 경기였음을 알 수 있다. 구경꾼 역시 상투를 튼 어른에서부터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아이들도 보인다. 갓을 벗고 편한 자세로 앉아 관람하는 모습, 엿을 파는 엿장사의 모습은 요즘의 스포츠 경기장의 풍경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렇듯 풍속화는 잠시 스치듯 바라보는 그림이 아니라 풍경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를 살피는 그림이다.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듯 그림을 보면 볼수록 매력이 솟아나는 장르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파격의 매력이기도 하다. 김홍도의 ‘「씨름도」에서도 우선 시선의 파격을 읽을 수 있다. 씨름 하는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모습은 3층짜리 아파트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그렸으되, 주인공인 씨름꾼들은 구경꾼이 올려다본 각도에서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다. 한 그림 속에 한 시점만을 고수한 서양 미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이다. 이러한 파격은 작가의 솔직함, 작가의 솔직한 시각에서 시작된다.
서민들의 삶을 즐겨 다루었던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는 것은 마치 옛 풍경을 잔잔하게 찍어놓은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함이 돋보인다. 서민들의 삶, 서민들의 모습을 중심에 두는 그의 시선은 그래서 풍경이 생략된 채 인물이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하나같이 흰 바지저고리에 둥글한 얼굴을 한 말 그대로 조선의 서민들의 모습이다. 여타의 화가들이 꽃과 나비와 자연을 그릴 때 김홍도는 그의 풍속화에서 조선 후기 서민 사회의 모습을 다루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았다.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들어와 박힌 듯, 주변 인물 하나에도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이 부여되고 있다. 이런 그의 세심함 때문에 단원의 그림을 감상할 때에는 각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씨름 구경에 정신이 없는 「씨름도」를 보며 유일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소년인 듯 보이는 엿통을 맨 엿장수의 무관심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고 말 것이다.
크게 장이 서고, 단오나 크게 행사가 벌어지면 그 자리에 빠지지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씨름이다. 지금은 프로 선수들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지만, 예전에는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모두 씨름에 출전을 했고, 그중의 누군가는 소를 상금으로 타고는 해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씨름의 풍경은 민중들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화폭에도 기록되었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는 보물 제 527호로 지정된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첩인 「단원풍속도첩」에 속한 잘 알려진 명품 중에 하나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별도의 배경 없이 화면 중앙에 한판 붙은 두 인물과 이를 구경하는 관중을 둥글게 배치하고 있으며, 그러한 조금은 한 발 떨어진 듯한 시선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였고 중앙의 씨름하는 두 인물의 용을 쓰는 표정을 간략한 필선으로 잘 나타내었고, 엿목판의 가위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씨름에 쏠려 있으며 다양한 표정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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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씨름도) : 네이버 블로그
김홍도의 씨름은 씨름하는 두 사람을 화면 가운데에 그려놓고 구경꾼들을 씨름꾼 주위에 원형구도로 배치함으로써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주제에시선을 집중시키는 탁월한 공간구성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름」 은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첩인 「도원풍속도첩」에 속한 잘 알려진 명품 중의 하나이다. 이 화첩에는 각계층의 생업장면 외에 놀이장면도 등장되고 있는데 이 「씨름」외에 「무악」등이 그 예이다. 비스듬히 내려보는 시점에서 별도의 배경없이 화면 중앙에 한판 붙은 두 인물과 이를 구경하는 관중을 둥글게 나타내었다.
엿판을 멘 젊은이와 달리 모든 이들이 시선은 씨름에 쏠려있다. 용을 쓰는 두 장사의 표정도 간략한 필선으로 잘 나타내었고, 관중들의 표정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어 평범치 아니한 김홍도의 기량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은 어떠하였을까? 사진이 없었던 당시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김홍도의 풍속화이다.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단원풍속화첩>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이나 사회상이 한국적 해학과 정취가 곁들여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담고자 하는 핵심을 집약하려는 듯 그의 풍속화는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꽉 짜인 원형 구도를 이루며 간략한 필선의 묘미
가 잘 나타나 있다. 주제는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 생활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에 어울리게 거친 듯하면서도 투박한 선을 쓰고 있다이 화첩 중의 하나인 〈씨름〉은 두 사람이 맞붙어 씨름을 하고, 구경꾼들이 빙 둘러서 구경을 하고 있는 광경이다. 용을 쓰며 들어 올리는 사람과, 한 발이 들려 곧 넘어지려는 사람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구경꾼도 두 패로 갈라져 있는지 각각의 표정이 재미있고 누구 편인지 금방 알 수 있을 듯하다. 곧 승부가 날 것 같은 흥미진진한 순간인데도 엿판을 맨 떠꺼머리 총각은 아랑곳 않고 장사에 열중이다. 이러한 구도는 조선 말기 유숙의 풍속화에 영향을 미쳐 〈대쾌도〉에서 비슷한 구도를 볼 수 있다.
자료출처 http://cinema.sangji.ac.kr/PAINT/paint/pnt00120.htm
두 사람이 힘을 겨룬다. 팽팽하게 맞잡은 양손에 긴장감이 흐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고유 겨루기인 씨름, 그러한 씨름의 역동성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이야기되는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의 한 장면이다. 씨름이라는 단어는 ‘시루다’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한다. ‘시루다’는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팔씨름, 입씨름 등의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간에 승부를 겨루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이다.
크게 장이 서고, 단오나 크게 행사가 벌어지면 그 자리에 빠지지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씨름이다. 지금은 프로 선수들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지만, 예전에는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모두 씨름에 출전을 했고, 그중의 누군가는 소를 상금으로 타고는 해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씨름의 풍경은 민중들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화폭에도 기록되었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는 보물 제 527호로 지정된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첩인 「단원풍속도첩」에 속한 잘 알려진 명품 중에 하나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별도의 배경 없이 화면 중앙에 한판 붙은 두 인물과 이를 구경하는 관중을 둥글게 배치하고 있으며, 그러한 조금은 한 발 떨어진 듯한 시선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였고 중앙의 씨름하는 두 인물의 용을 쓰는 표정을 간략한 필선으로 잘 나타내었고, 엿목판의 가위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씨름에 쏠려 있으며 다양한 표정을 묘사하고 있다.
서민들의 삶을 즐겨 다루었던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는 것은 마치 옛 풍경을 잔잔하게 찍어놓은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함이 돋보인다. 서민들의 삶, 서민들의 모습을 중심에 두는 그의 시선은 그래서 풍경이 생략된 채 인물이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하나같이 흰 바지저고리에 둥글한 얼굴을 한 말 그대로 조선의 서민들의 모습이다. 여타의 화가들이 꽃과 나비와 자연을 그릴 때 김홍도는 그의 풍속화에서 조선 후기 서민 사회의 모습을 다루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았다.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들어와 박힌 듯, 주변 인물 하나에도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이 부여되고 있다. 이런 그의 세심함 때문에 단원의 그림을 감상할 때에는 각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씨름 구경에 정신이 없는 「씨름도」를 보며 유일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소년인 듯 보이는 엿통을 맨 엿장수의 무관심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옛 그림, 특히 풍속화를 찬찬히 감상하노라면 어느덧 그림이 안내하는 대로 그 시절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김홍도의 「씨름도」역시 찬찬히 그림을 보노라면 마치 조선시대의 어느 장터에서 열린 씨름판에 구경꾼으로 앉은 듯 손에 땀을 쥐며 승부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돌려 그 씨름판의 긴장감어린 승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어느새 그들과 하나가 됨을 느낀다. 구경꾼들의 머리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마치 정지된듯하던 화폭 속의 씨름경기는 금방 누가 넘어질 듯 승부의 향배를 점쳐볼 수 있다. 그리고, 씨름꾼 두 명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짚신과 고무신으로 보이는 고급 신발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발의 차이는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아님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씨름이라는 종목이 민중들의 경기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신분을 떠나서 힘 대 힘으로 겨루던 경기였음을 알 수 있다. 구경꾼 역시 상투를 튼 어른에서부터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아이들도 보인다. 갓을 벗고 편한 자세로 앉아 관람하는 모습, 엿을 파는 엿장사의 모습은 요즘의 스포츠 경기장의 풍경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렇듯 풍속화는 잠시 스치듯 바라보는 그림이 아니라 풍경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를 살피는 그림이다.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듯 그림을 보면 볼수록 매력이 솟아나는 장르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파격의 매력이기도 하다. 김홍도의 ‘「씨름도」에서도 우선 시선의 파격을 읽을 수 있다. 씨름 하는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모습은 3층짜리 아파트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그렸으되, 주인공인 씨름꾼들은 구경꾼이 올려다본 각도에서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다. 한 그림 속에 한 시점만을 고수한 서양 미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이다. 이러한 파격은 작가의 솔직함, 작가의 솔직한 시각에서 시작된다.
풍속화는 원래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서민의 숨결과 현실감각이 살아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속화가 가장 발달했던 조선시대,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는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와 같은 시대의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첩(風俗畵帖)」에서 볼 수 있듯이 서당(書堂)·무동(舞童)·씨름·검무(劍舞)·선유(船遊)·무무(巫舞)·파적(破寂)·대장간 등 갖가지 제재(題材)를 익살과 기지, 그리고 풍정(風情) 넘치는 필치로 묘사해낸 걸작들이 많이 있다. 그림은 살아 있었고, 화가들은 그들의 삶을 그리기위해 거리로 나서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서양화의 도입 이래 인물을 주제로 하는 회화는 많이 그려졌으나, 크게 내세울 만한 풍속화적 작품은 찾기 어렵다. 그림이 사람들의 실재하는 삶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홍도의 「씨름도」를 통해 거리가 먼 그들만의 예술이 아닌, 삶이 묻어 있는 우리들의 예술을 만나기를 권해본다. 그렇게 그림에 빠져들다 보면 단지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이야기하는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의 「씨름도」에는 신분을 뛰어넘은 정정당당한 승부와 피곤한 세상살이의 아픔을 그 자리에서 털어내는 민중들의 해학이 묻어 있다.
http://www.cambridge.co.kr/culture/chamjin/chamjin03FW/chamjin03FW-14.asp
씨름, 《단원 풍속도첩》 | 국보·보물 검색 – 국립중앙박물관
<씨름>은 그의 풍속화 특징을 대표할 만한 명품에 속한다. 두 무리의 구경꾼들을 화면의 위아래에 둥글게 배치하여 가운데 공간을 연 다음,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는 두 사람의 씨름꾼을 그려 넣어 그림의 중심을 잡았다. 왼쪽에 서 있는 엿장수는 구경꾼들의 관심 밖에 있으면서도 이 원형 구도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벗어 놓은 신발은 오른쪽으로 터진 여백을 좁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처럼 빈틈없이 짜인 구성과 함께 간결한 붓질로 풍부하게 묘사한 인물들의 표정과 열띤 좌중의 분위기가 김홍도의 비범한 재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인물들이 입고 있는 무명옷의 질감에 맞추어 구사된 투박한 필치와 둥글넙적한 얼굴, 동글동글한 눈매도 그가 즐겨 다룬 풍속 인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씨름, 《단원 풍속도첩》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명칭. 보물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1970), 金弘道筆 風俗圖 畵帖, 《단원 풍속도첩》상박,《檀園風俗圖帖》 相撲, · 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 종이 · 작가. 김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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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_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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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보물 검색:국립중앙박물관
<씨름>은 그의 풍속화 특징을 대표할 만한 명품에 속한다. 두 무리의 구경꾼들을 화면의 위아래에 둥글게 배치하여 가운데 공간을 연 다음,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는 두 사람의 씨름꾼을 그려 넣어 그림의 중심을 잡았다. 왼쪽에 서 있는 엿장수는 구경꾼들의 관심 밖에 있으면서도 이 원형 구도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벗어 놓은 신발은 오른쪽으로 터진 여백을 좁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처럼 빈틈없이 짜인 구성과 함께 간결한 붓질로 풍부하게 묘사한 인물들의 표정과 열띤 좌중의 분위기가 김홍도의 비범한 재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인물들이 입고 있는 무명옷의 질감에 맞추어 구사된 투박한 필치와 둥글넙적한 얼굴, 동글동글한 눈매도 그가 즐겨 다룬 풍속 인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씨름, 《단원 풍속도첩》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와 배경 – Tayler’s Story – 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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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클립뱅크(Clipbank) – 김홍도 씨름도의 비밀(The secret of \”Ssireum\”(Korean Wrestling) drawn by Kim Hong-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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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풍속화와 배경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진준현(서울대박물관 학예관)
▣ 머리말 이 글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뛰어난 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풍속화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서술한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초기의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c.1400-1470년경), 후기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말기의 오원(五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천재였다. 그의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책가도(冊袈圖) 등 아주 다양하지만 이 글에서는 인물화 중의 한 분야인 풍속화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어떤 분야에서 천재적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그 이룬바 업적이 아주 넓고도 깊어야 한다. 김홍도는 이런 면에서 그 회화적 성취의 폭과 깊이를 아울러 갖춘 인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다른 화가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지만 그가 실제로 그린 작품에 비해서는 아마도 십분의 일도 채 못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통해서도 그의 예술상의 지고한 업적과 성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풍속화는 바로 김홍도의 회화적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일반인들에게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해 아는 데로 설명해 봐도 한다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반인들이 한 번 쉽게 읽고 나름대로 정리된 생각을 지닐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생각을 아이들을 위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에 남도록 서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 김홍도는 누구인가?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우선 김홍도가 어떤 사람이며, 언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그려진 배경과 시대 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작품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김홍도의 출신과 생애와, 사람 됨됨이와 친구 등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1)김홍도의 생애 김홍도는 1745년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조선사회는 대략 양반, 중인, 평민, 노비로 이루어진 신분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홍도의 집안은 중인(中人)이었다. 중인이나 의사, 통역사, 서리나 아전과 같은 하급벼슬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처럼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백성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었다. 김홍도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경기도 안산(安山) 부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김홍도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유명한 문인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세황은 시와 글씨(서예), 그림을 모두 잘하여 당시에 삼절(三絶: 세 가지 예술을 모두 잘 한다는 뜻)이라고 불렸으며, 예술계에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 사람이었다. 이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학자로부터 공부한 것이 이후 김홍도가 화가로서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김홍도는 10대 말경에는 이미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되었다. 도화서란 조선시대에 나라에 필요한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화원이란 거기에 소속된 전문 화가를 말한다. 당시에 화원이 되는 것은 아주 어려웠으며, 수없이 많은 지망생 중에 뛰어난 실력으로 그 중에서도 금새 두각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나이 많은 선배나 동료들을 모두 제치고 최고의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래서 영조 대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뽑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정조 대왕의 초상화도 그리게 되는 등 궁중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정조 대왕이 다스리던 시절에 김홍도는 궁중의 모든 중요한 그림 일에는 책임자로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점은 정조 대왕의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지 오래다. 삼십년 전에 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 일에 속한 일은 모두 그에게 책임을 맡겼다({홍재전서} 권칠.[謹和失夫子詩]夾註)
이처럼 임금까지 인정해주는 최고의 화가 김홍도는 나중에는 경상북도 안기(현재 안동시) 찰방과 충청북도 연풍 현감 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찰방이란 지방 각지의 역(驛)과 역마(驛馬)를 관리하던 벼슬로서 요즘의 지방 국도관리사무소장 정도 될 것이다. 이 찰방과 현감은 통속적으로 ‘사또님’으로 부를 수 있는 벼슬로, 화가가 이 정도의 벼슬을 하기는 아주 어려웠던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그만큼 김홍도는 정조 대왕까지 인정하는 대 화가였기 때문에 그 공로를 인정하여 이런 벼슬까지 시켜준 것이다. 김홍도가 찰방과 현감에 임명된 것은 각기 38세 때인 1783년과 47세 때인 1791년이었다. 김홍도는 정조대왕의 재위 시절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이나, 개인적으로 부탁 받은 그림 등 많은 명작을 그리다가 1805년 말, 그의 나이 61세 이후 어느 때 죽었다. 이때는 그를 아껴주던 정조 대왕도 돌아가시고, 조선 왕조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2) 모습과 인품 김홍도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당시에 문학가로 유명했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라는 분은 김홍도의 초상화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김홍도군의 초상화를 대하니 옥같은 모습, 난초 같은 향기가 들은 것 보다 훨씬 낫구나, 마치 한 온아한 화군자의 모습이로다.“ 또 김홍도의 선생님인 강세황도 김홍도에게 써 준 [단원기(檀園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밝으니 보는 사람은 (김홍도가) 뜻이 높고 속세를 초월하여 거리의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름을 알 것이다. 성품이 또 음악을 좋아하여 매번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로 한두 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김홍도의 집에는) 자리와 책상이 깨끗하게 놓이고 섬돌과 성채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거리와 가까우면서도 문득 속세를 벗어난 뜻이 있었다. 이밖에도 김홍도는 성품이 겸손하고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그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김홍도의 모습과 인품에 대한 평가는 이밖에도 많이 있지만, 위에 인용한 두 사람의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용휴는 유명한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조카로서 당시 문단의 지도자로 추앙 받는 사람이었고, 강세황은 당시 예술계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풍속화란 어떤 그림을 말하는가? (1) 풍속화의 개념 풍속화란 이름 그대로 ‘풍속(風俗)’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면 풍속이란 무엇인가? 풍속이란 국어사전에 의하면 ‘옛적부터 사회에 행하여 온 의식주, 그 밖의 모든 생활에 관한 습관’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습관을 풍속이라 하며, 이런 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풍속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속화란 그 소재의 범위가 광범위하며, 어쩌면 그림에서 풍속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추상화까지도 20세기의 미술사조나 철학적 경향을 반영하는 일종의 풍속적 면모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풍속화에서 그런 것까지 포함시킬 수는 없고, 그림에 있어서 최소한 몇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풍속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풍속화의 특징 내지 요건이란 첫째 사실성이다. 예를 들어 한국 농민의 생활상을 그리는데 에스키모 복장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풍속화가 아닐 것이다. 두 번째는 시대성이다. 시대성이란 예를 들어 20세기 한국의 풍속을 그리는데 고려시대의 모습으로 그렸다면 그것도 제대로 된 풍속화가 아닐 것이다. 이처럼 풍속화에는 최소한의 사실성과 시대성이라는 요건을 만족시켜야 하며, 또 그것이 풍속화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밖에 그림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술성이라는 요구가 있지만, 이것은 비단 풍속화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림에 요구되는 것이다.
(2)조선후기 풍속화의 발달과 그 배경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살아가는 풍속을 그린 그림을 풍속화라고 할때, 풍속화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시대 사람들의 갖가지 풍속을 복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사시대의 암각화(岩刻畵)에서 풍속적인 면을 발견해낸다.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바위벽에 새겨 그린 암각화에는 그 당시의 주술적 신앙과 생활상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히 풍속화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도 풍속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풍속화는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어떤 생활 습속을 형성하며 살아가던 오랜 옛날부터 인간에 의하여 꾸준히 창작되어 오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원 김홍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후기의 풍속화는 그 이전까지 그려지던 풍속화와는 성격이 다른 점이 주목된다. 즉 옛날부터 풍속화는 계속 그려졌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뭔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달라지는 점은 첫째, 풍속화가 양적으로 아주 풍부해지며, 둘째 소재와 형식도 아주 다양해지며, 셋째 예술적으로도 아주 뛰어난 성취를 이룩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의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처럼 풍속화가 특별한 발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후기 풍속화가 가장 발달하던 시대는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초년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대의 특징으로는 우선 영조, 정조와 같은 뛰어난 왕이 다스리던 시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가 아닌 조선시대와 같은 시절에는 국가의 흥망성쇠의 큰 열쇠가 왕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조선후기는 영조와 정조 같은 뛰어난 왕들이 다스리면서,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부흥시켰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조선 초기 이후 두 번째의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또 영조와 정조는 개인적으로 직접 그림을 그릴 정도로 회화에 취미가 깊었고, 따라서 그린에 대한 관심과 후원이 남달랐던 점도 하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영조, 정조, 순조 초년은 대개 18세기와 19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이때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던 때였다. 일반 백성들도 임진왜란이후 17세기에 이르는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문화란 이처럼 안정된 사회 분위기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위로는 국가와 왕실의 각종 행사가 그림으로 표현되고,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생활의 여유와 문화적 안목으로 말미암아 조선 후기의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주변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탐구하며 그림으로 그려 즐길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뿐이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시와 기행문,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도 사실적이며 풍속적인 묘사가 많았다. 당시 문인들이 산수 유람을 즐기면서 쓴 기행시문, 백성들의 생활상을 읊은 서사시,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 사설시조나 판소리 등도 크게 보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식 풍속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우끼요에(浮世繪)가 바로 그것이다. 우끼요에는 ‘뜬 세속의 그림’이라는 명칭대로 일본 서민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우리 풍속화와는 달리 주로 판화(版畵)로 제작되어 대량생산되었다. 또 기생의 자태나 남녀간 애정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여 우리 나라 풍속화에 비해 더욱 감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의 우끼요에도 에도(江戶) 시대 도시의 발달과 서민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성행한 데에서 우리 풍속화와 공통점이 있다.
(3)김홍도의 풍속화와 그 이전의 풍속화 위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서서 풍속화가 크게 번성했음과, 그 원인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한 사회전반의 번영에 있었음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특히 발달한 풍속화에 있어서는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단원 김홍도가 가장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김홍도의 선배 화가들 몇 사람에 대해 먼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선구적인 풍속화 창작이 있었기 때문에 김홍도의 풍속화가 활짝 꽃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홍도 이전의 풍속화를 그린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구자라고 불리는가?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구자 그룹에는 몇 사람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윤두서와 조영석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전라남도의 명문인 해남 윤씨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당파 싸움 때문에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평생 실학 연구와 함께 여가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지냈다. 그의 증조부는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국문학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이다. 윤두서의 그림 중 <자화상>은 박진감 넘치는 사실적인 화풍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을 연상시키는 뛰어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하는 말로는 그의 말(마)을 그릴 때에는 하루 종일 마구간 앞에서 관찰하여 눈감고도 그릴 수 있을 때라야 화필을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세심한 관찰에 의한 사실적인 태도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점이 그로 하여금 종래에는 그리지 않던 서민을 대상으로 한 풍속화를 그리게 하였을 것이다. 윤두서의 풍속화로는 <나물캐기(採艾圖)>와 <짚신삼기> 등이 있는데, 모두 일하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종래에는 인물화라면 신선이나 고사 (高士:고상한 선비)나 은일자(隱逸者)등 상상적인 존재를 즐겨 그렸는데, 윤두서는 노동의 현장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실학적인 태도와도 관련이 깊은 것이다. 그런데 윤두서의 작품들은 아직 배경의 산수나 나무의 표현 등에서 완전한 사실적인 느낌은 주지 못하고 있다.
윤두서보다 약간 후배 풍속화가로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 1688-1761)이 있다. 조영석도 선비화가로서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과 가까운 사이였다. 조영석은 윤두서 보다도 더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목기깎기>나 <소젖짜기> 같은 작품은 윤두서의 작품보다 더욱 실감이 난다. 조영석은 얼핏보면 필선이 서툰 듯 하나, 사실은 오랜 관찰의 결과를 가장 단순화시켜 표현하였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록 감칠맛이 있다. 위에서 윤두서와 조영석 두 사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했는데, 이제 김홍도의 풍속화는 이들에 비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해 보겠다. 물론 앞의 두 사람의 작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김홍도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지면상 요점만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김홍도의 풍속화는 윤두서나 조영석의 작품에 비해 우선 본격적 직업화가의 프로(pro)다운 그림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윤두서나 조영석은 선비화가로서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였다.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나 기술면에서 김홍도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둘째,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소재가 무척 다양하여졌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김홍도의 풍속화를 논할 때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세 번째,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이전에 비해 형태상 화첩, 병풍, 족자 등 다양하며 규모도 크다. 이에 비해 윤두서나 조영석의 풍속화는 대부분이 작은 화첩 형태이며 소폭이다. 네 번째, 김홍도의 풍속화는 좀 더 현실적이며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 윤두서나 조영석 등도 일하는 농부나 서민을 대상으로 그렸지만 여전히 대상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반해,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서민들의 각종 생활상이 친밀한 시각으로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상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하였지만,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이전 선배화가들의 풍속화에 비해 이런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도 열렬히 환영받았고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김홍도는 어떤 풍속화들을 그렸는가? 이 장에서는 김홍도의 풍속화의 종류와 대표적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그의 풍속화를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①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 ②양반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 ③국가나 궁중의 행사를 그린 기록화의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이 구분만 봐도 독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의외로 아주 폭이 넓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씨름>이나 <서당>같은 서민들을 위한 풍속화뿐만 아니라 양반 사대부의 풍속화나 국가적 규모의 풍속화도 아주 많이 그렸던 것이다.
(1)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 김홍도의 풍속화 중 가장 볼만한 것은 역시 서민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친근하면서도 재미나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김홍도의 이런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실감나고 재미있게 받아들여졌다. 또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였음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까지 모두 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의식주(衣食住)및 산업과 오락 등 각종 생활상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다음부터는 이런 김홍도의 서민풍속화를 주제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의(衣)생활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면화 따기, 실잣기, 베짜기(길쌈), 빨래하기, 바느질하기 등이 작품으로 전해져 온다. 이중 <실잣기>와 <베짜기>는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의 <풍속화첩>에 포함되어 있다. 이중 <실잣기>에는 당시 농촌의 서민 가정의 집안 모습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가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잣고 있고, 아버지는 자리틀 앞에서 자리를 짜고 있다. 그리고 아들은 그 뒤쪽에서 책을 펴놓고 있는데, 벌려진 입 모양으로 보아 큰 소리로 읽고 있는 듯 하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 우리 선조들도 부모된 이들은 생활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했지만, 장래의 희망은 아들놈 공부 열심히 하여 떳떳한 사회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정조 대왕 시절 비교적 안정된 농촌분위기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식(食)생활과 관련된 것으로는 봄 경작, 나물 캐기, 논갈이, 모내기와 새참, 점심, 타작, 주막, 고기 잡기, 해물장수, 술장수 할머니, 우물가 등의 소재가 그려졌다. 이 중 <모내기와 새참운반>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속도8폭병풍> 중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농부들이 허리를 구부린 채 모내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과, 그들에게 새참을 주려고 논둑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바지 가랑이를 걷어 부치고 논에 엎드린 채 모내기하는 모습은 요새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들에게 새참을 운반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요새는 이 그림처럼 아낙네는 머리에 이고 남자는 지게를 지고, 아이는 탁주 항아리를 안고 가는 대신 아마도 경운기나 소형트럭이 이용될 것이다. 새참을 운반한 아낙네는 농부들이 밥을 먹는 동안 돌아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따라온 검둥이는 자기차례를 기다리며 얌전히 앉아 있다. 오른쪽 위에 앉아 항아리 속을 쳐다보는 떠꺼머리 총각 녀석은 아마도 술잔이 자기 차례까지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하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가을에 풍년이 들면 어른, 총각, 머슴 아이 모두 모여 <타작>을 한다. 이때는 아직 탈곡기가 없는 때라 마당에 울퉁불퉁한 큰 나무 둥치를 고정시켜 놓고 일꾼들이 모두 볏단을 두들겨 낱알을 털어 낸다. 한쪽에서는 털어 낸 낱알을 빗자루로 쓸어모으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게로 새로운 볏단을 운반해 온다. 이렇게 바쁜 중에 한쪽에는 자리를 깔아 놓고 한 중년 사나이가 비스듬히 팔베게를 하고 누운 채 긴 담뱃대를 물고 있다. 그의 편안함과 여유는 이밖에도 벗어둔 신발과 한쪽에 놓여진 술병에서 더욱 강조된다. 눈을 감은 채 졸고 있는 그의 머리에는 갓이 비스듬히 벗겨져 간신히 머리에 붙어 있다. 그는 아마도 부유한 지주나 부농(富農). 혹은 대지주의 마름인 듯 하다. 주거(住居) 생활을 그린 것은 비교적 적은 편으로 국립박물관 소장 <풍속화첩>중에 <기와이기>가 있다. 또 앞서 <실잣기>에 보이던 자리 짜는 모습도 주거 생활과 관련이 되며, <주막집>이나 기타 풍속화의 배경으로 농가가 조그마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위에서는 서민생활의 모습들을 의식주로 나누어 살펴보았지만, 김홍도는 이런 세 가지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생활의 모습들도 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여러 가지 놀이의 모습을 표현한 것들도 상당수가 있다. 그런데 오락이나 취미, 놀이 따위는 역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들이 더 다양하게 즐긴 듯 하다. 서민들의 놀이로는 <씨름>, <춤추는 소년>, 목동들이 수양버들 나무 그늘에서 공기 돌로 벌이는 <고누놀이> 등 비교적 소박한 것들이다. 이에 비해 양반들의 오락으로는 <그림보기>, <매사냥>, 각종 <연회>등 좀 더 다양한 모습들이 보인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특히 여행하는 모습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에는 금강산 등 각지의 명승지 유람이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또 상업경제가 발달하고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이에 따라 객주와 여각, 즉 요새 말로 하면 각종 여관과 운송업이 발달했던 때였다. 따라서 김홍도의 풍속화에 여러 가지 목적으로 길을 떠나는 모습이 많은 것도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설 때 생기는 갖가지 흥미로운 정경들이 김홍도와 같은 예리한 눈을 가진 화가의 흥미를 자극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서민 생활에 대한 따스한 정감이 나타나 있고, 때로는 풍자와 유모어도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공감을 얻는 것은 작가의 이런 태도, 즉 서민과의 일체감,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은 김홍도 자신이 서민들 속에서 자라났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김홍도는 나중에 그림으로 출세하여 사또님까지 되었지만, 이런 인간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여행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중상봉(路中相逢)>과 <나루터>, 그리고 <도선(渡船)> 등이다. <노중상봉>은 소등에 부인과 아기를 태우고 먼길을 가는 서민과 나귀를 타고 가는 양반이 길에서 마주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부인은 장옷을 뒤집어쓰고 외간 남자의 시선을 피하려 하는데, 나귀 탄 양반은 짐짓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채 하면서 부인네를 훔쳐보고 있다. 또 <도선>에는 갓 쓴 양반, 나뭇단을 실은 소나 말, 아이 업은 아낙네 등 각종 사람들을 가득 싣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전국 여러 곳의 나루터에서 상당 기간 볼 수 있었으나, 요즘은 도로와 다리가 많이 만들어져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밖에도 김홍도의 풍속화 중에는 유명한 <서당>에서처럼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신행>에서는 결혼 풍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또 <담배썰기>, <활쏘기>,<대장간>,<점치기>등 당시 사람들의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사실적이고 친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2)양반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 김홍도가 양반 사대부들의 풍속을 그린 것으로는 평생도(平生圖), 기로회도(耆老會道), 계회도(契會圖), 아집도(雅集圖), 유연도(遊宴圖) 등이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도이다. 평생도란 일생도(一生圖)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어떤 개인의 일평생 중 중요한 사건들을 6폭 내지 12폭의 병풍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평생도는 김홍도에 의해 최초로 그려졌는데, 현재 전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모두 3점이 있다. 김홍도의 평생도 중 1781년, 37세 때 그린 <모당평생도8폭병풍>을 예로 들면서 평생도의 내용과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에서 모당(慕堂)이란 선조 때의 문신 홍이상(홍이상, 1549-1615)의 호(호)인데, 아마도 홍이상의 집안 후손이 선조의 일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홍도의 다른 평생도에 비해 화면 구성이 단순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되어 있어, 나중에 많은 무명의 화가들이 평생도를 그릴 때 이 작품을 모범답안처럼 모방하였다. 이 평생도에 그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폭<돌잔치>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맞이하는 경사스런 행사로서의 돌잔치가 그려졌다.
화면의 제일 큰 건물 안에 부모님, 할아버지, 유모, 손님 등이 모여 앉아 아기를 둘러싸고 있다.
아기 앞에는 돌상이 놓여져 있고, 마당에는 여러 하녀들과 아이들도 잔치를 축하하며 서 있다. 제2폭<혼인식>은 흰말을 탄 신랑 일행이 신부의 집으로 가는 행렬을 그렸다. 개천에는 오리가 헤엄치고 있고, 길가 집들의 대문이나 창문에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다.
제3폭<삼일유가(三日遊街=應榜式)는 과거에 급제한 주인공이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말을 탄 채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다. 주변 길가와 담벼락에는 구경꾼들이 보인다. 제4폭<한림겸 수찬시(翰林兼 修撰時)>는 조선시대 벼슬살이 중 초기에 가장 촉망받던 벼슬을 하고 있는 주인공의 늠름하고 전도양양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제5폭<송도유수 도임시(松都留守 到任時)>는 주인공이 송도(개성) 유수 임명을 받고 앞뒤에 맨 쌍교(雙轎)를 타고 고갯길을 넘어가는 모습이다. 많은 수행원들이 고갯길을 가득 메우고, 길 가던 행인들이 모여 앉아 구경을 한다 제6폭<병조판서시(兵曹判書時)>는 외직(外職)을 마치고 한양에 돌아와 병조판서의 큰 벼슬을 맡아 위세가 당당한 주인공이 밑에 바퀴가 달린 초헌(초軒)을 타고 가는 행렬이다.
제7폭 <좌의정시(左議政時)>는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주인공이 밤늦게까지 막중한 국사(國事)를 돌보다가 달밤에 퇴근하는 모습인 듯 하다. 앞뒤로 네 사람이 맨 평교자(平交子)를 타고 있는데, 횃불을 든 사람 여럿이 앞장서고 있다. 제8폭<회혼식(回婚式)>은 나라의 대소 벼슬을 모두 무사히 마쳤을 뿐만 아니라, 노부부 모두 수명장수(壽命長壽)까지 얻어 결혼 60주년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아들, 며느리, 손자 등 집안 식구들과 친척, 손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노부부가 회혼례를 올린다. 대청에서 마당까지 임시로 마루를 깔고 위에는 차일을 쳤다. 단상에는 노부부를 따라 남녀가 각기 나누어 서 있고 단 아래에는 하녀들이 서 있다. 사랑채 마루에는 장죽을 문 점잖은 손님들이 있고 하녀가 음식을 운반하고 있다.
이상<모당평생도>의 전체를 볼 때 제1폭 돌잔치, 제2폭 혼인식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겪게 되는 통과의례이지만, 제3폭 삼일유가에서부터 제7폭 좌의정시까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순조로운 관력(官歷)을 거쳐가는 지극히 선택받은 사람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또한 마지막 제8폭을 회혼식으로 마무리 한 것은 복록수(福祿壽)를 아울러 갖추고자 하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평생도 이외에도 김홍도가 양반 사대부들의 풍속을 그린 작품이 상당수가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성행하던 사대부들의 친목 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나 아집도(雅集油然圖), 바둑 두기나 투호(投壺)놀이, 매사냥, 집안이나 야외에서의 놀이를 그린 각종 유연도(遊宴圖) 등이 전한다. 이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후원유연도(後苑遊宴圖)>는 비록 낙관은 없으나 김홍도의 작품이 분명한데, 여기에는 당시 상류층의 여유있는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어떤 부유한 양반의 후원에서 열린 음악 감상회의 한 장면인데,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담뱃대를 물고 노래를 감상하고 있고, 아래쪽에는 하녀들이 음식상을 분주히 나르고 있다. 동일한 장면이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된 김홍도의 풍속도8폭 병풍 중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인물이나 나무, 담장 등이 더욱 세밀하고 정확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실력을 유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3)국가나 궁중의 행사를 그린 기록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 유교 문화권에서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공정한 사실기록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관념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 특유의 유교적 권선징악의 감계적 의도와도 깊이 관련된 것이며, 또한 정의의 판단을 추상적인 하느님에게 맡기기보다는 도덕적인 인간의 의지에 맡기려는 현실주의적 성격과도 관련된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는 “글로써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에서 소위 기록화도 함께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기록화 중에는 특히 의궤도(儀軌圖)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의궤란 어떤 국가적 행사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일 참조케 하고자 하는 것인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나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왕실의 혼례나 상장례(喪葬禮), 세자나 세자빈의 임명(冊封), 중요한 건물의 준공이나 수리, 임금의 초상화 제작과 봉안 등에 대한 많은 의궤가 보관되어 있다. 이런 의궤 속에는 반차도(班次圖)라고 하여, 그 행사 중 중요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는 부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함께 실려있다. 따라서 의궤 반차도는 도서 속에 포함된 일종의 삽도라고 할 수 있는데, 화원이 밑그림을 그리고 목판화로 제작하게 된다. 김홍도가 그린 의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인데, 이것은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수원 화성(華城)에서 개최한 행사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행사 장면이 목판화로 인쇄되어 있는데, 김홍도가 중심이 되고 여러 화가들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다. 이 정리의궤에 실린 삽도 중에서 <주교도(舟橋圖)>를 보면,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보기 드문 투시도법과 원근법을 이용하여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배다리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갈 때 가설되던 임시 교량으로써, 현재의 노량진 근처 한강에 설치되었다. 한편 정리의궤 안에는 <주교도>이외에도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수원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마치고 다시 시흥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장면을 판화로 싣고 있다. 이 [원행을묘정리의퀘]는 수원성 축조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함께 조선시대의궤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이들 의궤도들은 단순히 국가 행사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회 풍속을 보여주는 풍속화로서의 의의도 큰 것이다. 참고로 {화성성역의궤}의 판화는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엄치욱(嚴致郁, 18세기말-19세기초)이라는 화가가 밑그림을 그렸다.
국가적 행사를 기록한 것으로 의궤도 이외에 계병(契屛)이 있다. 계병은 어떤 국가적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끼리 계를 조직하여 그 행사의 중요 장면을 그린 그림과 그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병풍에 함께 실어 궁중이나 관청에 보관하는 한편, 개인들도 기념으로 나누어 갖게 된다. 이런 계병은 상당수가 남아 있는데, 김홍도가 그린 가장 유명한 것이 흔히 말하는 <수원능행도병풍(水原陵行圖屛風)>이다. ‘수원능행’이란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陵)을 참배하러 간 것을 뜻하는데, 정조가 수원에 능행한 것은 여러 차례지만 이 병풍에 그려진 것은 을묘년 원행(園行) 행차이다. 을묘년 원행이란 앞에서 살펴본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이 되는 행사로서, 1795년 정조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잔치를 동갑인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수원 화성(華城)에서 거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 병풍의 원래 정식 이름은 <원행을묘정리소계병(園行乙卯整理所契屛)>으로서, 을묘년 원행을 총괄하던 임시 관청인 정리소에서 만든 계병이라는 뜻이다. 이 계병은 다음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1.<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수원성 행궁의 봉수당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장면
2.<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경축행사의 일환으로 수원 인근의 노인들을 낙남헌에 불러 양로연을 베풀어주는 모습
3.<알성도(謁聖圖)>: 수원성의 공자묘를 참배함
4.<방방도(放榜圖)>: 경축행사의 일환으로 임시 과거를 열고 합격자를 발표함
5.<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燥圖)>: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식을 참관함
6.<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謝圖)>: 득중정에서 임금이 활을 쏘는 장면
7.<시흥환어행열도(始興還御行列圖)>: 모든 행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귀환하는 중 시흥 행궁에서 쉬는 모습
8.<주교도(舟橋圖)>: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건너 한강 북쪽 궁궐로 가는 모습 이 정리소계병도 김홍도의 주도 아래 여러 화원들이 참여하여 그려졌는데, 현재에도 국립중앙박물과, 호암미술관, 창덕궁 등에 여러 벌이 전하고 있다. 이 병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사실적 건물이나 산수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의 성대했던 행사의 분위기를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병풍에 그려진 장면이나 기본 구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삽도와 같은 부분이 많아서 김홍도의 주도적 역할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김홍도가 그린 기록화로서의 풍속화 중 특이한 것으로 평양도가 있다. 평양은 옛날부터 산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국방과 경제의 요충으로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따라서 명승지로서, 혹은 어떤 행사가 열린 장소로서 그림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종 15년(1560)에 왕이 평양의 산천과 누각 등의 명승을 그려 채색병풍을 만들게 하고, 글 잘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시문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또 명종은 평양 이외에도 1562년에는 성천(成川), 영흥(永興), 의주(義州), 영변(?邊) 네 곳을 8폭병풍으로 그리게 하고, 그 끝 폭에 신하들로 하여금 시문을 지어 써넣게 하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전주도>도 그렸다고 하며, 한양의 거리 모습을 그린 <城市全圖>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하는 <평양도병풍> 중에는 김홍도가 밑그림을 그리고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 상당수 있다. 또 평양시내와 대동강에서 벌어진 선유락(船遊樂)이나 여러 가지 행사의 기록화도 김홍도의 것으로 전하는 것이 있다. 비록 후자는 김홍도의 원작은 아니지만, 김홍도가 평양도를 잘 그렸기 때문에 그 명성을 빌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홍도가 밑그림을 그린 목판본 평양도는 19세기와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모방하고는 하였다. 이런 평양도도 당시 평양 지방에서 벌어지던 사회풍속의 모습을 분명하게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귀중한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 김홍도 풍속화의 특징과 성격 위에서 김홍도의 풍속화를 그 내용에 따라 대표적인 작품들만 몇 개씩 추려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김홍도 풍속화의 특징과 성격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사람이 그린 풍속화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난 점인가? 이 장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김홍도 풍속화의 특징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두 가지 면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김홍도는 어떤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그림 자체의 됨됨이가 어떤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면은 주로 소재상의 특징이 되겠고, 둘째 면은 양식상, 기술상 특징이 되겠다. 첫째 소재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우선 우리나라의 많은 풍속화가들 중 가장 다양한 소재를 다룬 점이 주목된다. 앞서 풍속화 작품을 소개 할 때 설명하였지만,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서민들의 생활풍속 이외에도 양반 사대부의 풍속, 그리고 국가와 왕실의 풍속을 담은 기록화까지 아주 다양하였다. 그런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소재가 이처럼 다양한 점 이외에도, 유모어와 품위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당>에서 훈장 선생님에게 매맞는 아이의 모습이나, <빨래터>에서 바위 뒤에 숨어 여인들을 훔쳐보는 갓 쓴 남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웃음은 어떤 한도, 즉 너그럽고 점잖다고 할 수 있는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신윤복의 기생 그림처럼 남녀의 연애를 진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넌지시 암시하여 미소짓게 할 뿐이다. 둘째 김홍도 풍속화의 양식적, 기술적 특징으로는 한 줄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그의 풍속화는 우리나라 풍속화가 다다른 최고의 사실성과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주는 인물과 현장의 핍진한 묘사에서 오는 박진감은 현대인들보다도 옛날 사람들이 더 깊이 느꼈다. 그래서 김홍도의 선생님인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은 [단원기(檀園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홍도는) 특히 세속의 모습(俗態)을 옮겨 그리기를 잘 하였는데, 인생에서 항상 접하는 것들과 길거리, 나루터, 가게, 시장, 시험장, 공연장 등을 한번 그리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김홍도의 속화(俗畵)가 바로 이것이니, 진실로 신령스러운 마음과 슬기로운 지식으로 홀로 천고의 묘함을 깨닫지 않았으면 어찌 이처럼 그릴 수 있으리요?” 강세황이 말한 바, “신령스러운 마음과 슬기로운 지식으로 천고의 묘함을 깨달음”이란 바로 김홍도의 풍속화가 다다른 경지를 문학적,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세황은 너무 과장한 것일까? 아니다! 신령스러운 것과 슬기로운 것, 천고의 묘함은 바로 나날의 인생살이의 속에 있는 것이며, 그것을 정확히 집어내어 표현한 김홍도의 풍속화 속에 있는 것이다. 참고로 풍속화라는 용어는 요새 쓰는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속화(俗畵)라고 불렀다.
(2)김홍도 풍속화의 성격 위에서 김홍도의 풍속화가 가지는 그림 자체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김홍도의 그림 자체를 떠나서, 그 그림을 배출시킨 사회와 화가, 시대적인 면에서 그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즉 위에서는 작품자체의 미시적(微視的) 시각에서 특징을 생각해 보았다면, 여기에서는 작품 외적인 좀 더 거시적(巨視的) 성격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리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김홍도는 자기의 취미에 따라 그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주문에 의해 작업하는 초일류 전문가였다. 따라서 그의 풍속화는 반드시 사회적 수요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김홍도의 풍속화를 필요로 하였을까? 위의 질문에 대한 첫째 대답은 우선 감상의 대상으로 필요로 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한 당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이 여러 기록들에 남아있다. 또 김홍도의 많은 작품에는 당대를 지도했던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일종의 감상과 비평이 대부분이다. 당시 사람들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며 동시대를 살아가던 동료나 이웃, 혹은 상전이나 아랫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 혹은 즐거운 한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기 원했다. 그래서 그들 집안 어른의 일생을 평생도로 그려달라고 부탁하였고, 즐거운 모임에는 김홍도를 초청하여 아집도(雅集圖)로 그리게 했다. 여기에는 집안 가문의 내력, 혹은 개인적 이력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후대가 알아주기를 희망하는 마음도 들어있었다. 세 번째 국가나 왕실, 혹은 공공기관의 수요는 위 두 번째 경우가 개인적, 사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을 국가적, 공적인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엄숙한, 혹은 의미 있는 국가 행사의 공식적 기록과 선양의 목적이 김홍도로 하여금 기록화를 그리게 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김홍도가 이처럼 뛰어난 풍속화를 창작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처하였는가의 문제가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해석하는데 있어 일각에서는 사회계층간 대립이나 저항의 표현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김홍도가 살던 조선후기는 아직 봉건적 신분 체제가 유지되던 시기이고, 김홍도는 양반 사대부 층에 끼지 못하는 중인 출신인 점 때문에 이런 시각이 나타난 것 같다. 그러나 김홍도의 풍속화, 나아가 그의 전체 회화작품을 살펴볼 때 사회개혁의 의지나 지배층을 향한 분노, 저항의 표현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사회적 수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또한 창의적으로 부응하여 그 시대적 미감(美感)을 창출하는데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김홍도는 당시 시대에 대해 부정적, 저항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에 있어서 미술 분야의 일인자가 된 것이다. 끝으로 김홍도 풍속화에 대해 가장 거시적 관점의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김홍도 풍속화의 역사적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풍속화 속에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다양하고 폭넓은 관심이 표출되어있다. 또 그가 바라보는 시각(視覺)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폭넓은 관심과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은 김홍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영조, 정조대 사회의 균형 잡힌 시각이기도 한 것이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건강하고 활기찰 때 그 시각은 넓고도 균형 잡힌 것이며,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간존재의 엄숙한 요구에도 그만큼 많이 부응하게 되는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 맺음말 – 현대의 풍속화를 기대하며 지금까지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해 그 요점만 대강 살펴보았다. 김홍도의 다른 장르의 회화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그의 풍속화는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의 시대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품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없다면 우리는 조선후기 영조, 정조대 선조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속담에 “백 번 듣는 것보다도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而不如一見)”라고 했다. 조선후기에 비록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같은 뛰어난 문학가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글보다도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더 쉽게 당시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김홍도를 한 줄로 평가하자면 “위대한 시대가 낳은 천재 예술가”요, 그의 풍속화를 평가하자면 “시대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요술거울처럼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2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김홍도는 뛰어난 한 천재 예술가이다. 그러나 무수한 시대에 무수한 천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역사 속에 매몰되어갔다. 우리나라의 인물들이 유독 세종대왕 시대와 영조, 정조대에만 뛰어났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 시대가 그 재능을 발굴하고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홍도의 천재도 영조, 정조대의 시대가 키워냈다고 할 수 있다.
현대는 물질적 풍요의 면에서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는 조선처럼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현대는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작가가 많이 배출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나라에 김홍도처럼 당대의 온 국민에 의해 사랑 받는 화가가 있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시대적 여건과 개인적 재능 이외에 다른 변수(變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자각과 치열한 자기연마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발견하여 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이다. 그런 개인의 자각과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좋은 환경만으로는 안된다. 오히려 최소한의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자극과 꺾어지지 않을 정도의 내적 좌절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홍도는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中人)이라는 제한된 출생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예술상 천재적 재능이 있어도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 그의 내적 고민과 좌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극복을 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는 예술 면에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을 성취하고자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 않았을까? 현대의 화가들에게 결여된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다. 현대는 또 서구 사조의 지배아래 미술 분야에서도 개성과 자아의 표현이 가장 중시되며, 미술 사조로는 추상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풍속화란 개성의 돌출보다도 묘사하려는 객관적 대항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어떤 면에서 개성의 표현보다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무아(無我)가 더 중요하다. 이런 무아, 망아(忘我)는 비단 풍속화뿐만 아니라 동양에 있어서는 전통 예술 전반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겸손한 무아는 현대의 개성주의와 끊임없는 새로움의 추구와는 반대편에 서 있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풍속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항상 뛰어난 예술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현대의 진정한 풍속화도 우리 시대의 그 누군가에 의해 그려질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의 생명력과 우리 민족의 문화 전통의 힘이 그렇게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부상도 (負商圖)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그려진 작품으로 종이에 수묵담채를 사용하였고 가로 38.5cm에 세로 27.0cm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상적인 서민 생활의 단면을 흥미롭고 실감나게 표현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무거운 봇짐을 지고 성벽 밑을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여 단원이 만년에 이룩한 시정 넘치는 풍속화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가 그린 씨름 – 브런치
씨름은 누가 이길까? 단원은 이 경기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장치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우선 A선수의 손을 자세히보자. 왼손은 허리를 잘 붙들고 있지만 오른손은 손가락이 유난히 길게 그려져 있다. 화가가 솜씨가 부족해서 저렇게 비정상적으로 그렸을까? 이는 손이 미끄러져서 놓쳤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A의 왼쪽 다리가 들린 것으로 봐서 B가 9시 방향으로 넘기려고 기술을 쓰는 중이며, A는 남은 한쪽 다리로 힘겹게 버티는 중이다. B는 기회를 엿보다가 힘이 한쪽으로 쏠리면 이를 역이용하여 반대방향으로 기술을 써서 넘어뜨릴 것이다. 그림의 3시방향에 청중이 없는 것과 4시 방향의 두 사내가 입을 벌리고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도 그쪽으로 A가 넘어질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아무래도 경쟁이 심해지면서 단순한 성능이나 기량만 가지고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으니 그런 말이 나온거 같다. 좋은 스토리가 있다면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게된다.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을 설명하는데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문화유산에 걸맞는 스토리가 있다면 사람들이 해외의 모나리자 같은 미술작품처럼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이고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처우나 제도도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가 담긴 문화유산은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씨름의 구도를 보면 중앙의 씨름 선수를 중심으로 원형의 구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경은 생략한채 원형의 구도를 취함으로 인하여 감상자가 씨름에 집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아래쪽보다 위쪽의 관중이 더 많은데, 이렇게 그린 이유는 씨름판의 생생한 분위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이다. 아래쪽에 더 많은 사람들을 그렸다면 표정을 드러내기 어려우므로 현장의 열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민들을 상단에 더 많이 그린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무래도 굳은 자세와 표정의 사대부들 보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들이 경기의 흥미진진함을 드러내기에 더 좋았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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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오늘 – 김홍도, 삶의 현장을 화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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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씨름
“으쌰~!”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넘어가겠어, 힘을 내라고!”
‘나는 씨름보다 엿이 더 좋은데….. 아버지한테 사달라고 졸라볼까?’
‘저 선수의 약점은 뭐지? 어떻게 해야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구경꾼들이 많은걸 보니 오늘 경기는 꽤나 흥미진진한가보네. 엿도 많이 팔리겠지’?
섬세한 필치를 쓴 것도 아니고, 당대에 유행했던 최고의 기법이 쓰인 것도 아니지만 이 그림은 서민의 풍속을 소재로 한 까닭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쉽다. 동서양을 대표할만한 유명한 대작들처럼 보자마자 마음을 확 잡아끄는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보는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번 봐도 쉽사리 질리지 않는 그런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그렇지만 약간의 설명을 곁들인다면 좀 더 풍성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자라는 지식이나마 여기에 풀어놓아 보려한다.
그림0. 단원풍속도첩을 구성하는 하나인 씨름
해당 작품은 중앙에 씨름 경기중인 두 선수를 관중들이 에워싸고 구경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작품의 구도 같은 것은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먼저 시합 중인 선수들을 살펴보자.
편의상 두 선수 중 한쪽 발이 들린 선수를 A라하고, 다른 선수를 B라고 부르겠다. A선수의 미간을 찌푸린 모습과 B선수의 굳게 다문 입을 보면 경기가 굉장히 격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두 선수를 유심히 보면 입고 있는 복장에서 신분의 차이가 느껴진다. A선수는 B선수에 비해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종아리에도 무언가를 차고 있는게 보인다. 이는 행전이라고 하는 것인데, 바지의 통을 줄여주어 거동시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3시방향에 벗어 놓은 신발에서도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하나는 다소 가지런히 놓인 발막신이며 다른 하나는 평범한 짚신이다. 발막신은 아마도 가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씨름은 누가 이길까? 단원은 이 경기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장치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우선 A선수의 손을 자세히보자. 왼손은 허리를 잘 붙들고 있지만 오른손은 손가락이 유난히 길게 그려져 있다. 화가가 솜씨가 부족해서 저렇게 비정상적으로 그렸을까? 이는 손이 미끄러져서 놓쳤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A의 왼쪽 다리가 들린 것으로 봐서 B가 9시 방향으로 넘기려고 기술을 쓰는 중이며, A는 남은 한쪽 다리로 힘겹게 버티는 중이다. B는 기회를 엿보다가 힘이 한쪽으로 쏠리면 이를 역이용하여 반대방향으로 기술을 써서 넘어뜨릴 것이다. 그림의 3시방향에 청중이 없는 것과 4시 방향의 두 사내가 입을 벌리고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도 그쪽으로 A가 넘어질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씨름 선수들은 요즘 선수들과 다르게 허리샅바를 매고 있지 않은데, 이는 한양과 경기지역에서 성행했던 바씨름이라고 한다. 바씨름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샅바를 상대의 왼쪽 허벅지에 매고 그 나머지를 나의 오른손에 둘둘 말아서 잡고 하는 씨름이라고 한다. 허리샅바는 잡지 않는다고 하며, 왕십리, 뚝섬, 광나루 등지에서 실시되었다고 쓰여있다. 그림을 자세히보면 선수의 왼쪽 허벅지에 샅바가 매여 있는게 보인다.(사진1 참조)
사진1. 왼쪽 허벅지에 샅바가 매어져 있다.
이제 구경나온 사람들을 살펴볼 차례다. 자세히보면 대체로 양반은 왼편에 앉아있고, 오른편에는 평민들이 앉아서 구경하고 있다. 양반과 상놈들이 한데 어울려 씨름을 했다는 것과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은 당시 무너지고 있던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다.
10시 방향을 자세히보면 한사람이 두손을 깍지낀채 다리를 모으고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씨름을 바라보고 있다. 옆에는 갓을 벗어서 포개놓은 것으로 보아 양반임이 확실하다. 그 뒤에 있는 사람은 형제인듯 매우 닮았는데, 역시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 역시 선수로 뛸 예정인것 같다. 9시방향에 갓을 벗어 땅에 놓고 있는 사람의 밝은 표정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대조가 된다.
그 옆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데 그 역시 양반차림새를 하고 있다. 부채로 얼굴은 왜 가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양반인데 천한 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런 씨름판에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씨름 선수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막으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씨름판이 오래되어 다리가 저린듯 한쪽 다리를 펴고 있다. 미술사학자 故 오주석 선생은 한 강연에서 이 사람을 가리켜 별로 되먹지 못한 사람 같으니 사위로 삼지 말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뒤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반듯하게 앉아서 관람을 하시는 어르신이 계셔서 비교가 된다.
그 옆으로는 자세가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옷차림이 가벼운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상민들의 모습이다. 상투를 튼 사람은 장가를 간 성인이라는 의미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데 어울려서 즐겁게 관람을 하는 모습에서 세대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요즘은 사회변화가 너무 빨라서 10년 차이만 나도 관심사와 공감대가 달라 소통이 쉽지 않다. 세대간의 공감이 이루어지는 건 기껏해야 월드컵 정도가 아닐까?
오른쪽 상단에 묘사된 사람들 중에는 옆으로 팔베게를 하고 누운 남자가 한명 있다. 역시 씨름이 한참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앞에는 이 남자가 벗어놓은 털패랭이가 놓여있다. 이것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썼다는 모자의 일종이다.(사진2)
사진2.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썼던 털패랭이와 팔베게를 하고 누워서 관전하는 남자
아래쪽으로는 4시방향의 두남자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점잖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모두 양반으로 보인다. 6시쪽에 앉아있는 어린아이는 경기보다는 엿에 더 관심이 많은지 엿장수만 연신 바라보고 있다. 부채를 들고 있는 남자들이 많은데, 이로 보아 단오 무렵임을 알 수 있다. 단오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에도 더위를 쫓아가며 열심히 일해달라는 의미라고 한다.(더우면 쉬게 해야지 도대체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사진3)
사진3. 엿자수만 오매불망 쳐다보는 아이와 점잖게 부채를 들고 계시는 어른들
씨름의 구도를 보면 중앙의 씨름 선수를 중심으로 원형의 구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경은 생략한채 원형의 구도를 취함으로 인하여 감상자가 씨름에 집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아래쪽보다 위쪽의 관중이 더 많은데, 이렇게 그린 이유는 씨름판의 생생한 분위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이다. 아래쪽에 더 많은 사람들을 그렸다면 표정을 드러내기 어려우므로 현장의 열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민들을 상단에 더 많이 그린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무래도 굳은 자세와 표정의 사대부들 보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들이 경기의 흥미진진함을 드러내기에 더 좋았을테니까.
반면에 엿장수는 나홀로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구도가 너무 중앙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주는 하나의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중앙으로 시선이 전부 몰리면 감상자가 일종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으므로 일종의 숨구멍을 터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3시 방향에 신발만 그려져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사진4)
사진4. 작품의 원형 구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자면, 4시방향에 상투를 튼 남자의 손을 자세히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왼팔에 오른손이 달려있고, 오른팔에 왼손이 달려있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된다. 故 오주석 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일종의 숨은그림찾기라고 한다.(사진5)
사진5. 이 남자의 손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이 그림은 서민들 취향에 맞춰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이렇게 재미있는 요소를 하나 끼워넣은 것이라는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 풍속도 첩을 보면 이렇게 손이나 발의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그림이 상당히 많다. 작품의 소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점과 값싼 장지에 그려진 점, 배경이 없고 선 위주로 그려진 간단한 필법, 먹 외에 이렇다할 채색이 들어가 있지 않은 점, 씨름의 승자가 평민이라는 점 등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요즘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아무래도 경쟁이 심해지면서 단순한 성능이나 기량만 가지고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으니 그런 말이 나온거 같다. 좋은 스토리가 있다면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게된다.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을 설명하는데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문화유산에 걸맞는 스토리가 있다면 사람들이 해외의 모나리자 같은 미술작품처럼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이고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처우나 제도도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가 담긴 문화유산은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PS :
1. 해당 회화의 해석은 故 오주석 선생의 저서인 “한국의 미 특강”에 기반하였습니다.
2. 해당 글에 실린 사진은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제공하는 도판을 사용하였습니다.
3. 유튜브에 해당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을 만들어 올려두었으니 필요하시면 참고바랍니다. 내용은 이 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화성신문] [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④ 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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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40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 #김홍도 #단원김홍도 #김홍도씨름 #조선시대화가 #한국대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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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씨름도 특징, 비밀 설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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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씨름도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은? /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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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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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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