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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를 시대구분한 한 시기. 우리나라 역사를 시대구분한 한 시기. 일반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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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무렵 당나라에서 있었던 양국 사이의 경쟁사건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 897년에 양국 사신 사이에 벌어졌던 윗자리 다툼 사건, 872년과 906년에 벌어졌던 양국 유학생 사이의 빈공과(賓貢科) 수석 다툼 사건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기의 계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구분을 하느냐, 아니면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는 “고려가 발해 역사를 편찬하지 않음으로써 그 국세가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도다.”라고 하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했으니 그것을 남국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 그 후예가 그 땅 위에 발해국을 세웠으니 그것을 마땅히 북국으로 하는 역사체계를 세워야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고려 왕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②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삼국통일을 최초의 민족적 통일로 평가해왔고, 지금도 남한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 견해를 따르다가, 1960년대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분적 통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1979년 『조선전사』부터는 부분적인 통합이란 사실마저 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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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일반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를 말한다.
‘남북국시대론’이라는 것은 발해사도 한국사에 넣어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으로 부르자는 주장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개되는 종래의 역사 체계를 벗어나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포함시키자는 논리이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장수였고, 주체세력도 고구려유민들이었으므로 결국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가였다는 데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다.
발해는 멸망 후 ‘사라진 왕국’으로 버림받다시피 했는데,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역사체계에 넣으려 했던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넣었다 하더라도 통일신라와 대비시켜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이해하려는 이른바 ‘남북국’의 착상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국시대론이 학문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전개된 것은 1784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엮은 『발해고 渤海考』의 서문에서이다.
그는 “고려가 발해 역사를 편찬하지 않음으로써 그 국세가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도다.”라고 하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했으니 그것을 남국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 그 후예가 그 땅 위에 발해국을 세웠으니 그것을 마땅히 북국으로 하는 역사체계를 세워야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고려 왕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특히, 그가 아쉬워한 것은 고구려 영토가 여진과 거란에 점거되었어도 그 땅을 되찾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사실이니, 이는 고려가 발해사를 엮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大東地志』(1864년경)로 이어졌다. 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방여총지 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다.
「발해국 渤海國」항목에서는 삼한·삼국(신라·가야·백제)·삼국(고구려·신라·백제)·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와 다시 재론되었다.
장도빈(張道斌)이 『국사 國史』(1916·1946)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했고, 권덕규(權悳圭)의 『조선유기 朝鮮留記』(1924)와 황의돈(黃義敦)의 「상고시대 上古時代」(1943)라는 글에서는 각기 ‘남북조’시대를 설정하였다.
해방 이후 새로운 사학의 시각에서 엮어진 역사서에는 대개 발해사를 국사의 체계에 넣어 서술하고 있으나 남북국사의 체계 자체는 거론되지 않았다. 그후 식민지사관의 극복과 민족의 주체의식이 고조되던 1970년 무렵부터 남북국시대론이 다시 거론되었다.
1970년 5월에 개최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이우성(李佑成)이 「삼국사기와 발해문제」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국사가 남북국사로 엮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사학계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한우근(韓㳓劤)의 『한국통사 韓國通史』가 개설서로서는 처음으로 이 체계를 따랐다.
1980년대에는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송기호(宋基豪)·한규철(韓圭哲) 등이 다시 이 용어 사용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한국사에서 발해사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근래에 남북국시대론이 수용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반론도 적지 않아, 아직도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제기된 반론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대구분의 기준과 관련된 문제이다. 고병익(高柄翊)·이기백(李基白)이 제기한 것으로,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북국시대라는 것이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이기 때문에 역사서술에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다른 기준을 가지고 시대구분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 방식은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란 용어나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를 인정할 경우, 발해와 신라를 포괄해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는 것보다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점을 덜 안고 있다.
둘째,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이다. 하마다 고사쿠(浜田耕策)나 이성시(李成市)는 한국학자들이 주장한 남북국시대론의 논리적 취약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에 논리적 취약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반대의 논리가 타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 반면에 중국학자나 러시아학자들은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유민을 주체로 한 국가였으므로,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셋째, 현재적인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주장들이다. 이것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① 발해와 신라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므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견해가 대표적인 것으로서,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이 용어의 사용은 반대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사회구성체를 바탕으로 시대구분을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더 근저에 깔린 이유는 현재의 남북한 관계와 직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조선)이란 하나의 통일체를 상정하고 그것이 일시적이나마 갈라져 있는 것이 남북한인데, 신라와 발해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북국이란 용어에 대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역사에 투영한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② 이와 비슷한 발상으로서, 발해와 신라 또는 발해와 고려 사이에 동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남북국시대론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이용범(李龍範)은 발해사에 우리 역사와의 공동추억체의식(共同追憶體意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또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사실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데, 일본학자들은 이것이 동일민족의 북쪽 부분이란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방위 개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 유민들을 동족아닌 이민족으로 취급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의식이 확립된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이후이며, 당시는 이러한 의식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므로 현재의 민족의식을 기준으로 당시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상으로 반론을 살펴보았지만,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할 수 없다는 두번째 주장은 여러 가지 증거를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너무 현재적 시각에서 발해사를 바라보려는 세번째 주장도 문제가 있다.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7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남북국시대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① 한국사에서 신라사와 발해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보면, 신라사가 발해사보다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가 병존했던 당시에는 양국의 국력이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8세기에는 신라의 국력이 앞섰지만, 9세기에 들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대등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있었던 양국 사이의 경쟁사건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 897년에 양국 사신 사이에 벌어졌던 윗자리 다툼 사건, 872년과 906년에 벌어졌던 양국 유학생 사이의 빈공과(賓貢科) 수석 다툼 사건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기의 계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구분을 하느냐, 아니면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참고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이다. 그 뒤에 일어난 수나라는 기본적으로 북조를 계승한 국가였으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원용한다면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②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삼국통일을 최초의 민족적 통일로 평가해왔고, 지금도 남한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 견해를 따르다가, 1960년대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분적 통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1979년 『조선전사』부터는 부분적인 통합이란 사실마저 부정하였다.
이렇게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부각시켜, 고려를 역사상 첫 통일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면 어떻게 신라가 통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론이 상호 배치된다고 하면서 고려의 통일이 최초의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사에서 언제부터 하나의 국가로만 남게 되었는가 하는 기계적이고 외면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고려의 통일이 발해까지 아우른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다. 더구나 발해가 건국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이고,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뒤로부터는 20여 년이 흐른 뒤이다. 따라서 발해는 통일이 일단락된 뒤 새로이 형성된 국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의 건국은 한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부분적이었다는 한계성을 보완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통일신라나 삼국통일이란 용어와 결코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연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①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② 고려에의 계승성, ③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①과 관련해 발해는 건국집단의 구성이나 지배집단의 성씨(姓氏) 구성에서 고구려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지배층의 성씨에서 고구려계통의 고(高)씨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발해 초기의 지배층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서 고구려식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문왕(文王)시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구려의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원용해 천손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의미로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강왕(康王)시대에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왕 스스로 국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표명한 것은 발해 지배층의 인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872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워 발해 사신을 접대했던 사실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② 발해의 고려에의 계승성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발해의 멸망 무렵부터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 대화균(大和鈞), 공부경 대복모(大福謨), 좌우위장군 대심리(大審理), 검교개국남 박어(朴漁) 등 고위관료들이 잇따라 무리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였다.
또한 세자인 대광현(大光顯)까지 내투해 보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2백여 년간 발해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은 민족적 계승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태(太)씨는 고려로 들어온 발해 왕실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의 신하였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황제국의 질서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통일신라와는 다른 태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고려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계승성도 유추될 수 있다.
③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래에는 2백여 년간 대립적이었다고 일컬어져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장애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먼 것으로, 양국은 상호 대립 혹은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양국이 대립하거나 세력 경쟁을 벌였던 사건으로는 먼저 733년에 벌어졌던 양국 사이의 전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의 요구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했던 이 전쟁을 제외한다면, 양국 사이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
9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국세가 약화되고 반대로 발해의 국세가 강화되면서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당나라에서 상호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양국 사이에 교섭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다수 나타난다. 발해 건국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또 『삼국사기』을 보면, 790년(원성왕 6)과 812년(헌덕왕 4) 두 차례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의 파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당시 개설되어 있던 신라도(新羅道)를 이용했을 것이다.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신라도가 들었고, 『고금군국지 古今郡國志』에는 발해의 책성부(柵城府)와 신라 국경의 천정군(泉井郡)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하였다. 양국 사이에는 이렇게 상설적인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훨씬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발해의 3성 가운데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9세기 통일신라에 선교성(宣敎省)이 설치된 것은 명칭의 유사성으로 보아 발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으로 세 가지 검토를 통해 발해사가 한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았다.
발해사는 과거에 항상 한국사의 일부로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서 제외했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넣으려고 했던 시기가 있고, 양면적인 인식이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 말갈계 국가로도 인식하였다.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했고, “고구려 잔당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고 한 반면에, 다른 글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해 세운 나라’라고 하여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상반된 인식을 보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반으로 성립된 고려는 기본적으로 신라 계승의식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를 주목하였다.
고려 초기에 발해를 ‘혼인한 나라’ 또는 ‘친척의 나라’라고 하여 동족의식을 나타냈다. 이에 발해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으며, 934년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이 주축을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다.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겪었다. 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동국통감 東國通鑑』(1484)의 역사 인식이다.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했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해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하는 사론을 달아 비판한 것은 이 책의 역사 의식을 잘 반영한다.
둘째 단계는 발해사를 새롭게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것은 다시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뉜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했으니,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 東國地理誌』(1615)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으면서,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발견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되었다.
후기에는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 疆界考』(1756)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 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했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공격해 고구려 왕의 치욕을 설욕했다고 하였다.
셋째 단계에는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했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일부에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이 때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세가(世家)·세기(世紀) 등으로 다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발해의 역사를 세가로 다룸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역사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은 홍석주(洪奭周)의 『동사세가 東史世家』(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세가로 다룸으로써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한편 유득공의 『발해고』가 선구적인 역할을 한 후자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흐름은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되어야 함에도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리고 다음 세기의 과제로 넘겨졌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장기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삼한정통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러다가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하면서 만주 지역의 북방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권덕규(權悳奎) 등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대종교에서도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발해 수도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으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용범이 연구를 주도했고, 북한에서도 같은 시기부터 박시형, 주영헌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의 뒤를 잇는 연구자들의 실증적인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발해사 자체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해 남북국시대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들이 진행됨으로써, 이제는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남북한 학계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사라졌다.
남북국시대 – 나무위키:대문
남북국시대는 한국사의 시대구분 중 하나다. 넓게는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부터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좀 더 정확하고 좁게는 발해의 건국인 698년부터 신라가 후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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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이전 삼국시대처럼 서로 적극적으로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략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발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이북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신라의 동해안을 따라 서라벌에 이르던 교통로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시기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발해인들은 서로 적지 않은 경쟁의식을 가졌던 것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고려사》 최언위 열전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신라를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으로서 삼국사기 문무대왕편을 따르는 역사관으로 발해가 제외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비록 발해의 영토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중국에 흡수되며 고려는 발해를 압록강 이남의 일부를 제외하면 전혀 흡수하지 못했지만, 글로벌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고려 태조는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4년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20만명 발해 유민의 이주를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는 점에서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볼 수 있다는 반박이 있다.
한편, 조선 초기 세조 때 발해의 역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키고 발해의 역대 왕들을 제사 지내자는 상소문이 일부 올라왔지만, 조선 세조는 본래 발해는 삼한(신라, 고구려, 백제)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다만 유희령의 16세기 초반 저작인 《표제음주동국사략》이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편입했고, 조선 후기 소수의 실학자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종결된 후 남부에는 신라가 있었고 북부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주의 관점인 ‘남북국사관’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 698년 – 926년)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부터 후삼국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이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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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대조영의 고구려 계승 | 발해는 어느 나라의 역사일까? | 한국사 남북국시대 애니메이션 ★ 지니스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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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 698년 – 926년)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부터 후삼국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이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북국이라 칭한다.
개요 [ 편집 ]
과거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러왔으나, 이 당시에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도 존재했으므로 한국사의 범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는 문제 의식이 제기되어 왔다. 이후 발해를 한국사에 넣기 위해 두 나라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남북국 시대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근래에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예는 최치원의 글과 《삼국사기》에 이미 나타난다. 최치원의 글 중에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가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국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남북국이란 용어를 단순한 방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 속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조선시대 말기이다.
발해는 남국 신라와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말갈인이 다수인 민족 구성, 중심지의 위치, 발해 멸망 이후의 상황 등 여러 면에서 한국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며,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가 중국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을 밝혀내는 연구 성과가 있어야만,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도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1]
남북국 시대 인정 논란 [ 편집 ]
일반적으로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들 별 견해가 없지만 발해에 대한 정통성이나 문화, 그 역사관이 어느 나라의 뿌리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특히 한반도 고대사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사료 문제도 있다. 만일 남북국 시대를 인정할 경우 발해의 민족 구성이 말갈인이 다수인 점, 발해가 멸망하였을 때 발해 유민의 대부분이 현대 중국의 영토인 요나라와 금나라로 이주했다는 점 등으로 중국과의 역사 논쟁이 심화되어 여러가지로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러한 난제들에도 발해의 역사는 한반도 대륙사와 중국과의 영토 분쟁으로 이어지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사료 [ 편집 ]
중국의 《구당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을 고려 별종이라 기록했다.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고려에 부속된 자들로 성은 대씨라고 기록했다.
《무경총요》는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라고 기록했다.
《신오대사》는 발해는 본래 말갈인데, 고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했다.
《금사》는 당 초엽에 말갈에 속말(粟末)과 흑수(黑水) 두 부(部)가 있었다. 모두 고려에 신속(臣屬)하였는데, 당이 고려를 멸망시키자 속말은 동모산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해져서 발해라고 불렀는데, 성은 대씨이고 문물과 예악이 있었으며, 당 말엽에 이르러 점점 쇠퇴하여져서 이후로는 다시 들리는 바가 없었다. 금이 요를 정벌하자 발해가 귀부해왔는데, 대개 속말말갈의 후예라고 기록했다.
《속일본기》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 ,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는 말갈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는데, 대조영은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으로 등극하였다. 영주에서 동으로 2000리나 되고 군사가 수만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발해에 대한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인용하고 결론을 도출했는데, 다음과 같다.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해가 뜨는 곳(震旦)이라고 불렀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분리되고 통합됨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등으로 칭함으로써 발해의 주체를 고구려가 아닌 말갈로 기록했다. 이는 김부식이 신라계로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사관을 가지고 결론을 도출한 것과 연관이 있다.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보잘 것 없는 말갈의 부락에서 속말이라는 소번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하면서도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삼국사기』” 라고 하거나 ,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동문선』” 이라고 하기도 했다. 발해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라의 대학자인 최치원은 발해를 고구려가 아니라 말갈이 세운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제왕운기 下》는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성에 의거하여 측천무후 갑신년(684년)에 나라를 열었는데 발해라 이름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협계태씨족보 권1》는 사성 13년(696년)에 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이라 하였다고 기록했다.
시기 [ 편집 ]
신라는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 676년부터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 권력을 재편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통합하여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한편 30여년이 지난 후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698년, 속말말갈의 부족장인 대조영이 대사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 세력을 총 규합하여,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한 뒤 진국을 건국하고, 곧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고구려의 후국임을 자처하였다. 이때부터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200여년간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됐다.
서기 900년,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의 북부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국의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에 태봉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환원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고려에서는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삼한을 일통한 신라와 멸망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명칭 [ 편집 ]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는 발해를 한민족과는 다른 말갈 국가로 인식하였다. 신라는 발해를 타국으로 인식했고, 고려도 자국의 역사관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발해를 조선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발해를 한국사와 별개인 말갈족 왕조로 보고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의 역사관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중기까지 서술된 역사에서는 발해의 역사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조선 초기 세조 때 발해의 역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키고 발해의 역대 왕들을 제사 지내자는 상소문이 일부 올라왔지만, 조선 세조는 본래 발해는 삼한(신라, 고구려, 백제)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다만 유희령의 16세기 초반 저작인 《표제음주동국사략》이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편입했고, 조선 후기 소수의 실학자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종결된 후 남부에는 신라가 있었고 북부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주의 관점인 ‘남북국사관’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부르며 발해의 존재와 그 역사적 소속에 무관심했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 학자들은 발해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2],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신라를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으로서 삼국사기 문무대왕편을 따르는 역사관으로 발해가 제외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비록 발해의 영토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중국에 흡수되며 고려는 발해를 압록강 이남의 일부를 제외하면 전혀 흡수하지 못했지만, 글로벌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고려 태조는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4년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20만명 발해 유민의 이주를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는 점에서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볼 수 있다는 반박이 있다.
통일신라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통일신라 입니다.
삼국 시대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진출은 활성화되었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 [ 편집 ]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이전 삼국시대처럼 서로 적극적으로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략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발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이북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신라의 동해안을 따라 서라벌에 이르던 교통로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시기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발해인들은 서로 적지 않은 경쟁의식을 가졌던 것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고려사》 최언위 열전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남북국의 군주 [ 편집 ]
신라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의 국왕 입니다.
신라 32대 효소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의 재임기간.
발해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발해의 역대 국왕 입니다.
발해 초대 고왕부터 15대 대인선까지의 재임기간.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와 발해 | KCCUK
발해는 영역을 확장해 옛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무왕 때는 북만주 일대를 장악했으며, 문왕 때는 체제를 정비해 755년경 수도를 상경(흑룡강성 영안현 일대)으로 옮겼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일본에 보낸 문서에도 고구려왕을 뜻하는 ‘고려왕’이라고 표현했다.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만큼 번영했으나 백두산 화산 폭발과 거란의 침략으로 926년 멸망했다.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경기도 화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 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이라는 해적 소탕 기지 이자 무역 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의 당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698년 대조영 등 고구려 유민 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지린성 동모산 근처에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대립하는 형세가 됐다.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와 발해.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신라의 영토와 인구는 크게 늘고, 경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삼국통일 과정 에서 한때 전쟁을 벌였던 신라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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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남북국 시대|당일치기 한능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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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와 발해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경기도 화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 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이라는 해적 소탕 기지 이자 무역 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의 당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698년 대조영 등 고구려 유민 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지린성 동모산 근처에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대립하는 형세가 됐다.
발해는 영역을 확장해 옛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무왕 때는 북만주 일대를 장악했으며, 문왕 때는 체제를 정비해 755년경 수도를 상경(흑룡강성 영안현 일대)으로 옮겼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일본에 보낸 문서에도 고구려왕을 뜻하는 ‘고려왕’이라고 표현했다.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만큼 번영했으나 백두산 화산 폭발과 거란의 침략으로 926년 멸망했다.
다. 남북국 시대가 열리다 – 우리역사넷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은 그 땅을 모두 자신의 영토로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동맹 당시의 약속을 주장하며 백제 영역에서 당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당의 지나친 야욕 때문에 결국 신라와 당의 동맹 관계가 대립 관계로 바뀌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단결하여 당군과 싸운 결과 그들을 몰아 내고 통일을 완수하였다(676).
나·당 연합군의 거듭된 전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지면서 삼국 시대는 끝났다. 신라는 삼국의 남부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고구려의 북부 지역을 잃게 되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한 지 30여 년 만에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가 일어나(698), 역사는 삼국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로 바뀌었다.
한편,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도와 당에 맞서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고구려 계승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 고구려 장군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를 세운 것은 이와 같은 저항 운동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나·당 연합군의 거듭된 전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지면서 삼국 시대는 끝났다. … 계승하는 발해가 일어나(698), 역사는 삼국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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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중3역사②[2-2~1]남북국의 발전과 변화(1)(feat.통일신라)-빡공시대 람보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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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은 그 땅을 모두 자신의 영토로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동맹 당시의 약속을 주장하며 백제 영역에서 당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당의 지나친 야욕 때문에 결국 신라와 당의 동맹 관계가 대립 관계로 바뀌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단결하여 당군과 싸운 결과 그들을 몰아 내고 통일을 완수하였다(676).
한편,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도와 당에 맞서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고구려 계승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 고구려 장군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를 세운 것은 이와 같은 저항 운동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나·당 연합군의 거듭된 전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지면서 삼국 시대는 끝났다. 신라는 삼국의 남부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고구려의 북부 지역을 잃게 되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한 지 30여 년 만에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가 일어나(698), 역사는 삼국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로 바뀌었다.
남북국의 통치 체제 – 우리역사넷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 고등학교 국사 7차 ·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남북국의 통치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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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Website: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 고등학교 국사 7차 ·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남북국의 통치 체제 …
중2역사1[3-2](1)남북국의 성립과 발전(2020빡공시대이보람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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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의 통치 체제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의 중앙 행정 통일 신라에는 통일 신라에는 위화부(이부) 조부 와 창부(호부), 예부, 병부 , 좌⋅우 이방부(형부), 예작부(공부) 등이 있어 중국의 6전 제도와 비슷하게 행정을 분담하였다.
상수리 제도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 로 이어졌다.
남북국시대의 국제 교류 – 동북아역사넷
남북국시대의 국제 교류. 한반도에 발해와 통일신라가 있던 시기, 일본은 율령을 정비하고 천황권을 강화하며 당과 직접 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직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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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Website: 남북국시대의 국제 교류 – 동북아역사넷
- Description Website: 남북국시대의 국제 교류. 한반도에 발해와 통일신라가 있던 시기, 일본은 율령을 정비하고 천황권을 강화하며 당과 직접 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직접 …
장보고의 죽음 | 사라진 청해진 #2 | 남북국 역사애니메이션 ★지니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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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용어, 과연 타당한가 – 한대신문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 즉‘남북국시대론’이 대두된 것은 최근 발해 역사를 고찰하면서부터다. 동북공정에 따른 중국의 역사왜곡, 즉 최근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입장 탓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중요해지면서 발해 관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신라시대란 단어가 발해가 우리의 역사가 아님을 의미한다는 점과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라는 입장이 상충하면서 문제가 제기 된다.
마지막으로는 당시에 동족의식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같은 선상에 있는 역사라 함은 동족의식에 근거한다. 삼국시대는 한(韓)민족이라 할 수 없으나 고려는 한(韓)민족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러나 발해-신라-고려 사이에서는 어떠한 동족의식도 찾을 수 없다. 반면에 남북국론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시대구분만 보더라도, ‘통일신라시대’란 용어보다 낫다는 입장이다.
반대 입장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 보다 단지 왕조별 시대구분론적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발해사가 한국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용어가 타당치 않다는 것이고, 셋째는 신라는 남북처럼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해는 대부분 말갈인과 고구려인을 포섭하면서 대조영이 세운 나라다.
24 thg 3, 2008 — 남북국시대는 7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를 일컫는 한국사 시대구분 용어이다. 즉, 삼국시대가 무너진 후에서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남북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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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남북국 시대|초등 한국사능력검정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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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용어, 과연 타당한가
7차 교육과정에 들어서면서 통일신라시대란 용어는 사라지고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남북국시대는 7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를 일컫는 한국사 시대구분 용어이다. 즉, 삼국시대가 무너진 후에서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 즉‘남북국시대론’이 대두된 것은 최근 발해 역사를 고찰하면서부터다. 동북공정에 따른 중국의 역사왜곡, 즉 최근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입장 탓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중요해지면서 발해 관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신라시대란 단어가 발해가 우리의 역사가 아님을 의미한다는 점과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라는 입장이 상충하면서 문제가 제기 된다.
이 두 가지, 중국의 국제적 역사왜곡과 발해의 한(韓)민족 역사성 부여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대신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지고 있다.최치원의 글과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북국이라 명명했다는 점,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명명했다는 점에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ㆍ일본ㆍ북한은 우리나라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세 나라는 남북국이란 말을 통일신라와 발해가 대등하다고 해석하기보다 단순한 지역구분에 따른 용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남북국시대’란 용어에 대해 국내 학자 중에도 이견이 존재한다. 그런데 논란의 소지가 됨은 이견의 근거가 터무니없지 않다는 데 있다.
반대 입장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 보다 단지 왕조별 시대구분론적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발해사가 한국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용어가 타당치 않다는 것이고, 셋째는 신라는 남북처럼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해는 대부분 말갈인과 고구려인을 포섭하면서 대조영이 세운 나라다.
마지막으로는 당시에 동족의식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같은 선상에 있는 역사라 함은 동족의식에 근거한다. 삼국시대는 한(韓)민족이라 할 수 없으나 고려는 한(韓)민족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러나 발해-신라-고려 사이에서는 어떠한 동족의식도 찾을 수 없다. 반면에 남북국론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시대구분만 보더라도, ‘통일신라시대’란 용어보다 낫다는 입장이다.
본지는 다음호부터 연재기획으로 세 편의 기고를 받는다.
첫째, ‘왜 통일신라시대에서 남북국시대로 바뀌었는가’ 이고 둘째는 ‘역사적 관점에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는 어떤 점이 타당하고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가’다. ‘국제외교 및 정치에 있어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어떤 논란을 만드는가’ 이다.
*다음 호에는 김종복<성균관대·박물관> 학예사가 ‘왜 통일신라시대에서 남북국시대로 바뀌었는가’로 주제로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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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무역 연구의 현황과 과제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한국 고대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가 당시 사회상의 복원이라 할 때, 중국과 일본의교섭・동서 문물의 교류현황・그 가운데 나타난 우리 고대문화의 특성을 밝히는 데에 가장 적합한 주제는 무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남북국시대 무역사 연구의 진전을 위해 쟁점별 현황 검토 및 제언을 해 보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문헌자료로는 이슬람권을 포함한 외국자료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고고학 자료로는 상업시설이나 항만시설 관련 유구의 자료 확보가 필요하다. 木簡도 교역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전해주는 일급 자료로서 앞으로 국내외에서 추가 발굴 가능성이 높다. 둘째, 무역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무역관련 종사자들이 신봉한불교, 도교 등 營利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나 윤리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연구 시각의 확대이다. 거시적으로는 무역이라고 하는 주제의 특성상 당,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보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나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신라와 발해, 당과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주변 제민족이나 국가도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제인류학을 필두로 하는 무역을 보는 틀이나 이론에 대한 검토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생각된다. 미시적으로는 실제 무역이 행해진 장소 예컨대 항구나 항만시설, 거래된 물품, 거래 수단,거래의 경로 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남북국시대 무역사 연구의 진전을 위해 쟁점별 현황 검토 및 제언을 해 보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문헌자료로는 이슬람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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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무역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 고대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가 당시 사회상의 복원이라 할 때, 중국과 일본의교섭・동서 문물의 교류현황・그 가운데 나타난 우리 고대문화의 특성을 밝히는 데에 가장 적합한 주제는 무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남북국시대 무역사 연구의 진전을 위해 쟁점별 현황 검토 및 제언을 해 보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문헌자료로는 이슬람권을 포함한 외국자료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고고학 자료로는 상업시설이나 항만시설 관련 유구의 자료 확보가 필요하다. 木簡도 교역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전해주는 일급 자료로서 앞으로 국내외에서 추가 발굴 가능성이 높다. 둘째, 무역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무역관련 종사자들이 신봉한불교, 도교 등 營利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나 윤리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연구 시각의 확대이다. 거시적으로는 무역이라고 하는 주제의 특성상 당,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보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나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신라와 발해, 당과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주변 제민족이나 국가도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제인류학을 필두로 하는 무역을 보는 틀이나 이론에 대한 검토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생각된다. 미시적으로는 실제 무역이 행해진 장소 예컨대 항구나 항만시설, 거래된 물품, 거래 수단,거래의 경로 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If the ultimate goal of research into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is to restore the social aspects of the times, the trade history will make the most appropriate topic to investigate negotiations between China and Japan, exchanges of things between West and East, and the characteristics of ancient Korean culture in them. This study thusset out to review the current state of each issue and make proposals for them for the progress of research into the trade history during the North and South States Period. First, the top priority goes to the identification of new data. It is also required to investigate overseas data including the Islamic world for literature data. It is needed to obtain data about the architectural structures and styles in relation to commercial and harbor facilities for archeological data. Wooden tables are also first-rate materialsto offer vivid information about trade. It is highly likely that more wooden tablets willbe excavated home and abroad. Secondly, it is also necessary to review the ideological backgrounds of trade. There is a need to review the logics or ethics to justify the acts of pursuing profits such as Buddhism and Taoism believed by the trade-related practitioners. Finally, the research perspective should be expanded. On a macroscopic dimension,it is fortunate that more and more researches are being conducted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 around Tang Dynasty and Japan given the characteristics of the topic, namely trade, but there is still shortage. It is necessary to include the neighboring ethnic groups and countries in East Asia except for Shilla, Balhae, Tang, and Japan in the perspective. There is a need to actively review the frameworks and theories oftrade starting with economic anthropology. On a microscopic dimension, it is required to conduct more specific analysis of the venues where trade actually took place such as the harbors and port facilities, the traded items, and means and routes of transaction.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도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될까?
우리나라 삼국통일는 신라에 의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당의 협력을 받은 불완전한 통일이다. 그리고 통일 이후 신라와 같이 있던, 발해는 우리역사다. 그러나 9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역사연대표상에 발해와 통일한 신라가 같이 존재한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라고 기록했었다. 따라서 통일신라 대신에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써야한다. 남쪽에는 신라, 북쪽에는 발해가 존재했기에 나온 시대명칭이다.(여기까진 옳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기자들이나 학자들은 통일신라라는 명칭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이자들은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 자랑스런 발해의 역사를 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가뜩이나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민족의 역사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우리 역사를 지켜야 할 학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등등의 논리전개라고 생각됩니다.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꼬릿말이 달립니다. 이런 꼬릿말을 관찰하면 어떠한 특정 기사에 꼬리표처럼 달리는 특정 내용의 꼬릿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저는 고고학과 역사 분야에 달리는 꼬릿말에 대해 한 마디 하려 합니다. 더 세부적인 주제는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의 명칭에 대한 것입니다.
10 thg 12, 2007 — 그중에 저는 고고학과 역사 분야에 달리는 꼬릿말에 대해 한 마디 하려 합니다. 더 세부적인 주제는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의 명칭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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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도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될까?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도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될까?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꼬릿말이 달립니다. 이런 꼬릿말을 관찰하면 어떠한 특정 기사에 꼬리표처럼 달리는 특정 내용의 꼬릿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저는 고고학과 역사 분야에 달리는 꼬릿말에 대해 한 마디 하려 합니다. 더 세부적인 주제는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의 명칭에 대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통일신라시대](우선 통일신라라고 칭하겠습니다)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동양최대의 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는 놀라운 내용이었지요.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현장은 지인이 있는 곳이라 기사를 더욱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그와중에 역시나 눈에 띄는 꼬릿말 발견.
통일신라에 대한 반감이 실린 꼬릿말들. [통일신라 혹은 통일신라시대]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여기에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렇게 반감서린 꼬릿말을 다시는 분들의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국통일는 신라에 의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당의 협력을 받은 불완전한 통일이다. 그리고 통일 이후 신라와 같이 있던, 발해는 우리역사다. 그러나 9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역사연대표상에 발해와 통일한 신라가 같이 존재한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라고 기록했었다. 따라서 통일신라 대신에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써야한다. 남쪽에는 신라, 북쪽에는 발해가 존재했기에 나온 시대명칭이다.(여기까진 옳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기자들이나 학자들은 통일신라라는 명칭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이자들은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 자랑스런 발해의 역사를 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가뜩이나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민족의 역사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우리 역사를 지켜야 할 학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등등의 논리전개라고 생각됩니다.
(비약이 존재한다면 죄송합니다. 따로 들은 의견이 아니라 꼬릿말을 모아놓은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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