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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옥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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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 – 시정사진 컬렉션 상세 | 서울기록원

제14대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부산직할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공무원이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66.03.31.~1970.04.15.) 동안 세종로, 명동 등 지하도 개설, 자동차 전용 입체고가도로 건설 및 주요 간선도로 확장 포장, 세운상가·파고다 아케이드·낙원상가 등 도심재개발 사업 추진, 한강개발사업, 남산1·2호 터널 개통, 400여동의 시민아파트 건설, 영동1·2지구·화양 망우지구·시흥 신림지구 등 대규모 구획정리사업 추진하는 등 서울의 지도를 바꿀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t

*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

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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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물현대사 – 불도저시장 ‘신기루’를 세우다, 김현옥 / KBS 2003082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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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

제14대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부산직할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공무원이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66.03.31.~1970.04.15.) 동안 세종로, 명동 등 지하도 개설, 자동차 전용 입체고가도로 건설 및 주요 간선도로 확장 포장, 세운상가·파고다 아케이드·낙원상가 등 도심재개발 사업 추진, 한강개발사업, 남산1·2호 터널 개통, 400여동의 시민아파트 건설, 영동1·2지구·화양 망우지구·시흥 신림지구 등 대규모 구획정리사업 추진하는 등 서울의 지도를 바꿀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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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별명답게 진짜 불도저처럼 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였다. 김현옥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 240억 원을 투입해 2천동 10만호의 아파트를 산비탈과 고지대에 있는 무허가 불량주택을 모두 헐고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1969년의 경우 서울시 총예산(416억원)의 12.4%에 해당하는 51억원을 시민아파트 건설에 썼다.[3] 김현옥은 세종로와 명동에 지하도를, 종묘 앞 필동 간 소개도로에 세운상가를 건립하고, 여의도에 제방을 구축해 여의도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강변북로를 건설하고,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남산 1, 2호 터널과 삼청터널 그리고 사직터널도 개설하였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 60년대 말 서울의 판잣집은 기어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도심·외곽 할 것 없이 들어찬 판자촌은 한 마디로 서울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으니까요. 내 발상은 간단했습니다. 쓰러질 듯 누워 있는 판잣집을 번듯하게 일으켜 세우자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아파트지요. 당시에는 서대문 금화지구 7만 채를 포함, 서울시 1백만 평 땅에 14만5천재의 판잣집이 널려 있었습니다. ” — 김현옥, 1994년경 월간중앙 허의도와의 인터뷰[3]

1954년부터 1955년 육군수송감실 차감이 되고, 1955년부터 1957년에는 육군수송학교 학교장, 1957년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수송참모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9년 12월 육군 제3항만사령부 부사령관, 1960년 육군 수송감실 차감, 1960년부터 1962년 4월에는 제3항만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5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부산 A지구 행정관을 겸직하였다.

김현옥(金玄玉, 1926년 10월 27일 ~ 1997년 1월 9일)은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 제12~13대 (정부 직할) 부산시장, 제14대 서울특별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공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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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TV]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서울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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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현옥(金玄玉, 1926년 10월 27일 ~ 1997년 1월 9일)은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 제12~13대 (정부 직할) 부산시장, 제14대 서울특별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공무원, 행정 관료이다.[1] 육군사관학교 4기 출신이자 박정희의 후배로, 1966년 제14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어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개발사업을 동시에 추진,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바꿔놓은 인물이다.[2]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육군 수송감실 수송차감, 육군수송학교장, 제1야전사령부 수송참모부장, 제3항만사령부의 부사령관과 사령관 등을 거쳐 5.16 군사 정변 이후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경상남도 부산시장이 되었다. 예편 이후에도 부산시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했다가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로 사퇴하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받기도 했다. 1981년 양산으로 내려가 인척이 인수한 사립학교 장안중학교장을 지내다가 1995년 지방 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다.

생애 [ 편집 ]

초기 활동 [ 편집 ]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인 1947년 4월 육군사관학교 3기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48년 9월 25일~9월 26일에는 대한탁구협회로부터 탁구지도자로 발탁되어 합숙훈련에 참여하였다. 1949년 4월 24일에는 탁구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군인 생활 [ 편집 ]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3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그해 6월 수료하였다. 1954년 3월 육군수송학교장이 되었다. 1955년 육군 대령으로 재직 중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57년 9월 건국대학교 법정대학을 수료하였다.

1954년부터 1955년 육군수송감실 차감이 되고, 1955년부터 1957년에는 육군수송학교 학교장, 1957년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수송참모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9년 12월 육군 제3항만사령부 부사령관, 1960년 육군 수송감실 차감, 1960년부터 1962년 4월에는 제3항만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5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부산 A지구 행정관을 겸직하였다.

1962년 준장으로 예편 후 부산시장에 임명, 4년간 근무한 뒤 1966년 서울특별시장이 되었다.[1]

관료 생활 [ 편집 ]

1962년 4월 해병 대령 변재갑이 부산시장에서 해임되자, 현역 육군 준장의 신분으로 경상남도 부산시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1월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예편하고 (정부 직할) 부산시장이 되었다. 그렇게 역대 부산광역시장 중에서도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정부 직할) 부산시로 승격되던 시기의 시장이 되었으며, 1966년 3월 윤치영이 경질되면서 당년 4월에 서울특별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별명답게 진짜 불도저처럼 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였다. 김현옥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 240억 원을 투입해 2천동 10만호의 아파트를 산비탈과 고지대에 있는 무허가 불량주택을 모두 헐고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1969년의 경우 서울시 총예산(416억원)의 12.4%에 해당하는 51억원을 시민아파트 건설에 썼다.[3] 김현옥은 세종로와 명동에 지하도를, 종묘 앞 필동 간 소개도로에 세운상가를 건립하고, 여의도에 제방을 구축해 여의도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강변북로를 건설하고,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남산 1, 2호 터널과 삼청터널 그리고 사직터널도 개설하였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1970년 4월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 후 1971년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 1973년 2월까지 있었다. 1971년 2월에는 육상경기연맹 회장에 추대되었고, 1972년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3년 2월 내무부장관을 사퇴한 이후 유스호스텔협회 회장과 복지법인 정립회관 이사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생애 후반 [ 편집 ]

1973년 행정 비상임위원, 1977년 한국유스호스텔협회 회장과 정립회관(소아마비협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공직을 떠나 조용히 지내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었다.[4] 1981년 5월 부산 양산군 기장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5]

1995년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에 부산시장으로 출마, 169,652표로 문정수, 노무현에 이어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7년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학력 [ 편집 ]

수상 경력 [ 편집 ]

가족 관계 [ 편집 ]

부인 : 오정자(吳貞子, 1929년 ~ ?) 3남 3녀

사촌 매부 : 황석동(黃錫東, 기업인, 교육자, 동호섬유 대표이사)

어록 [ 편집 ]

“ 60년대 말 서울의 판잣집은 기어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도심·외곽 할 것 없이 들어찬 판자촌은 한 마디로 서울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으니까요. 내 발상은 간단했습니다. 쓰러질 듯 누워 있는 판잣집을 번듯하게 일으켜 세우자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아파트지요. 당시에는 서대문 금화지구 7만 채를 포함, 서울시 1백만 평 땅에 14만5천재의 판잣집이 널려 있었습니다. ” — 김현옥, 1994년경 월간중앙 허의도와의 인터뷰[3]

평가 [ 편집 ]

서울시청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개발 행정의 효시” 또는 “경영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시장”이라는 평가가 있다.[6]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71년 총선 8대 국회의원 서울 마포구 민주공화당 61,201표 49.09% 2위 낙선 1995년 지방 선거 30대 시장 부산광역시 무소속 169,652표 9.84% 3위 낙선 민선 1기

김현옥(金玄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59년 12월부터 1962년 4월까지 육군제3항만사령관을 지냈다. 5·16 이후 1962년 4월에는 육군준장의 군복을 입은 채 최연소의 나이로 제12대 부산시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월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예편하여, 제13대 부산시장으로 연임되었고, 1966년 3월까지 약 4년 동안 부산시정을 이끌었다.

1971년 10월에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새마을운동의 조기정착과 치산녹화5개년계획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68년 10월 미국 헤리 디킨슨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해 12월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4월에는 43세의 나이로 최연소 서울시장이 되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서울시장을 사퇴하였다. 1971년 2월부터 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으면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3년 2월에 내무부장관에서 물러나 유스호스텔협회 회장과 복지법인 정립회관 이사장을 맡으면서 복지사업에 손을 대기도 시작하였다. 또한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47년 4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53년 6월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54년 3월부터는 육군 수송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57년 9월에는 건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6년 4월에는 43세의 나이로 최연소 서울시장이 되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서울시장을 사퇴하였다. 1971년 2월부터 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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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아카이브] 불도저 시장, 김현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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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53년 6월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54년 3월부터는 육군 수송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57년 9월에는 건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12월부터 1962년 4월까지 육군제3항만사령관을 지냈다. 5·16 이후 1962년 4월에는 육군준장의 군복을 입은 채 최연소의 나이로 제12대 부산시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월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예편하여, 제13대 부산시장으로 연임되었고, 1966년 3월까지 약 4년 동안 부산시정을 이끌었다.

1966년 4월에는 43세의 나이로 최연소 서울시장이 되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서울시장을 사퇴하였다. 1971년 2월부터 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으면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1년 10월에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새마을운동의 조기정착과 치산녹화5개년계획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68년 10월 미국 헤리 디킨슨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해 12월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2월에 내무부장관에서 물러나 유스호스텔협회 회장과 복지법인 정립회관 이사장을 맡으면서 복지사업에 손을 대기도 시작하였다. 또한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불도저로 불린 서울시장 김현옥 (인물현대사) – 네이버 블로그

“당시는 서울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그런 단계였습니다. 급격한 성장단계에서는 사실은 공공부문이 선도해서 인프라를 놓고 공공시설을 놓고 또한 그 시설이 공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 이후에 사적부분에서 도시를 개발하거나 도시를 이용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기틀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야 도시전반에 공공성이 살아나는데 김현옥 시장께서는 경영행정이라는 원리를 도입하면서 비록 시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주로 이윤을 남기고, 성과를 남기는 그런 사업을 하다보니까 비록 공공사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의 결과는 공공성을 담보로 하지 못하는 결과가 그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잘못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루는 계장이상이니까 수십명, 백명가까이 되었을거예요. 그 사람들 다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들어오더니 서슬이 퍼래가지고 앉기도 전에 ‘목지과장’하고 불러요. 목지과장이 일어서요.후에 보니까 나보다 나이가 많아요.(김현옥은 나하고 동갑이거든요) 다짜고짜 ‘이 새끼야,너집 마당에 나무심으면 그런것 심겠느냐?’ 입에 거품물고 야단을 쳐요.내용은 뭔고하니 자기가 시찰을 자주 다녔으니까 나가보니까 어느 가로수를 심었는데 큰 것 안심고 가는 가로수를 심었다 그거예요.그러니까 너희집에 그런것 심겠느냐고 야단인데, 아무리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과장이지만 계장이상 온 간부직원있는데서 그렇게 할 일이예요?”

​”알다시피 전부 무허가 건물이 있었던 데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 건물을 지을려니까 골재운반이 잘안되고(도로가 없으니까) 또 거기에 들어가는 물, 섞을려면 물이 필요한데 물이 부족하니까 아무래도 시민아파트 건립이 아주 조잡하게 된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거기에 골재가 안들어오니까 그 근처에 있는 흙을 섞어서 썼던 것. 그다음에 물이 없으니까 도랑물, 폐수를 써서 골조를 만들었는것 이런 등등이 실패작이었고… 와우아파트는 거기에 沙질이 많습니다. 모래의 질이 많은 그런 동네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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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 656호-건설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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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로 불린 서울시장 김현옥 (인물현대사)

​​​​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며 하루에 차량 16만대를 실어날랐던 청계고가도로.

청계천 복원사업에 따라 2003년 7월 1일부터 철거하기 시작해 약 2달에 걸쳐 상판을 모두 걷어냈다.

그렇게 영원히 사라진 청계고가는 지난 시대 발전된 서울과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청계천에 고가도로가 놓이기 시작한 것은 1967년 8월.





원래 삼일고가라 이름했던 청계고가는 공사를 시작한지 2년만인 69년 3월에 개통했다.

서울 근대화의 신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은 김현옥 前 서울시장이었다.

오로지 앞만보고 달렸던 시대, 김현옥은 바로 그 시대가 만들어낸 불도저였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서울시장, 김현옥.

그는 1966년부터 70년까지 4년동안 서울시장을 하면서 ‘돌격’이란 구호가 붙은 헬멧을 쓰고 수도 서울 건설에 나섰다.

오늘날 서울은 인구 천만이 넘는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지만, 김현옥이 시장으로 일하던 60년대까지만해도 서울은 기본 골격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도시였다.

김현옥은 그런 서울의 모습을 놀라운 속도로 바꾸어 나갔다.

서울 여의도와 마포 사이에 있는 73,000평 크기의 한강 밤섬.

김현옥은 한강을 개발하기 위해 밤섬을 통채로 폭파시켰다. 그때 폭파되고 남은 부분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현재의 밤섬으로 되살아났다.

67년말까지 밤섬에는 62세대 400여 주민이 살고 있었다.

김현옥은 밤섬을 폭파하기로 하고 주민들을 마포로 강제이주시켰다.

김현옥의 계획대로 68년 2월 10일 밤섬은 폭파된다.

폭파된 밤섬은 수만톤의 자갈과 모래가 되어, 여의도 매립을 위한 둑을 쌓는데 쓰였다.

홍수를 막는 목적 이외에도 김현옥은 쓸모없이 버려졌던 여의도를 택지로 만들어서 새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의 첫단추가 바로 여의도를 둘러싸는 윤중제였다.

“100일동안 비가오면 여의도개발은 다시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예배를 봤어요. 3개월동안 비가 안오게 해달라.비가 오면 윤중제 쌓은 것이 다 무너져 버리거든요. 다행히 그때 비가 별로 안왔어요. 그래서 윤중제 공사가 100일만에 끝났습니다.”

김현옥은 한국의 맨하탄을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대로 여의도를 약 90만평의 택지로 개발했고, 아파트 부지와 관광서, 그리고 빌딩부지로 분양함으로써 서울속의 또다른 도시를 만들어냈다.

한강개발은 사실 박정희의 오랜 숙제였다.

그때 한강은 장마철마다 막대한 홍수피해를 냈다. 박정희는 그런 한강을 다스리고 싶어했다.

김현옥은 한강의 흐름을 바꿈으로써 박정희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의 골자는 모랫벌이던 250만평의 한강변을 메워서 도로를 만들고, 매립지엔 아파트를 짓는 것이었다.

김현옥은 그런 청사진을 시대적인 조국의 과업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했죠. 한강의 물줄기를 잡으면 흥하고, 잡지 못하면 망한다. 한강을 개발하자.”

김현옥의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이 완성됨에 따라 한강변은 도로와 아파트촌으로 변모했다.

서울의 지도는 나날이 바뀌어 갔다. 심지어 산의 모습도 달라졌다.

서울 북악산을 관통하는 길이 6.7km, 너비 16m의 북악스카이웨이, 험준한 산을 깎아만든 이 도로 역시 김현옥의 작품이다.

그는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인 1.21사태가 일어나자 즉각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를 시작했다.

남산 1.2호 터널역시 전쟁때 반공호로 쓰기위해 뚫은 것이다.

그 시대 안보논리는 산을 깎고 터널을 뚫는 수많은 난개발의 명분이 되었다.

김현옥은 시장에 부임하자마자 도로정비 사업에 나섰다.

자갈길을 포장해 새도로를 놓고 2차선에 불과하던 기존 도로는 모두 4차선 이상으로 넓혔다.

김현옥은 수십년이 걸려야 해냄직한 도로망 확충 사업을 단 4년만에 완성했다.

“아마 다른 나라같으면 20년정도 걸렸을거예요. 이전 시장이 하신 일에 비하면 4년동안에 30년정도의 일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서울이 6.25전쟁후에 맨먼저 한 일은 기존에 있는 도로를 포장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도로를 신설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을 못하고…”



“우리가 워커힐에 존슨대통령이 투숙한다고 하는데, 그곳이 2차선이었습니다. 우리가 10일만에 2차선을 4차선으로 만들었습니다.그런데 지금같으면 있을 수 없어요. 집도 헐고.. 지금 생각해보면 한강도로 넓힌다든지, 반도호텔 길 넓히고, 종로를 넓히고. 지금할려면 어려웠을거예요. 그래서 불도저식으로 하지않으면 불가능했거든요. ”

한양대앞 워커힐(12km)간 2차선 도로를 10일만에 4차선으로 확장

김현옥은 그때 기술로는 도저히 해낼수 없을것 같았던 지하도 공사도 과감하게 추진했다.

김현옥은 명동과 시청앞, 서울역 등 6군데에 지하도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하로 다니게 하고, 도로는 자동차에 내줌으로써 차를 좀 더 빨리 달릴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김현옥은 임기동안 육교를 무려 144개나 만들었다.

육교는 적은 공사비를 들이고도 지하도처럼 사람과 자동차를 분리시킬수 있는 시설이었다.

김현옥은 자동차를 보다 빨리 달리도록 하기 위해서 아예 도시 한복판에다가 고속도로를 세웠다.

청계고가도로와 아현고가도로가 그렇게 등장했다.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의 모델인 삼각지 입체교차로를 비롯해서, 용산과 원남동 등 곳곳에 입체교차로를 세운 것도 김현옥이었다.

그는 자동차란 빨리 달려야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런 김현옥에게 시속 8km에 불과한 전차는 당연히 없어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결국 전차는 68년 11월 30일, 운행을 멈추고 철거되었다.

또다른 철거 대상은 무허가 건물이었다.

김현옥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무허가 판자촌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세계속의 서울을 만들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심을 재정비한다며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 들어서있던 무허가 건물과 종삼이라 불리던 사창가를 없앴다.

무허가 건물을 밀어낸 자리엔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을 세웠다.

낙원상가와 세운상가가 그렇게 들어섰다.

특히 국운을 세계로 펼치라는 의미의 세운상가는 발전의 상징이었다.

시민들은 이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낸 김현옥의 불도저식 개발에 박수를 보냈다.

“김현옥시장이 처음 부임할때 대한민국 정부안에 3대의 ‘인간 불도저’가 있다고 했는데,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씨가 큰 불도저, 학원정상화를 위해 강경일변도를 고수하는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중 불도저,그리고 새로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이 소 불도저. 이렇게 정부안에 3대의 ‘인간 불도저’가 있다!고 어느 신문에서 다뤘는데, 한 두달뒤에 대한민국 전체 불도저는 김현옥시장 한 분만 남았어요. 큰 불도저, 중 불도저를 전부 흡수해 버립니다. 그건 부임하자마자 워낙 많은 일을 벌여서…”





“대통령께서 테이프 끊는걸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좋아하시니까 김현옥시장은 공사많이 하고 대통령 모시고 테이프 끊는걸 하는거지요. 테이프 하나 끊으면서 수없이 발전한 것이지요. 제 기억에도 대통령이 테이프 끊는 일이 상당히 많았어요.”

각종 공사에서 준공테이프를 자른 가위들로 시장실 사방벽을 빽빽이 채울정도로 김현옥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한강을 개발하고, 도로망을 확충했으며, 또 도심을 재개발하고, 많은 양의 시민아파트를 건설하는 등 그 하나하나가 도시개발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대형사업들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정권 시대엔 이른바 조국근대화란 이념. 그것이 모든것에 앞서는 법이자 원칙이었다. 김현옥은 그시대 그 이념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고, 이를 앞장서 추진해 나갔다.

경남 진주출생인 김현옥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장교가 되었다.

그는 특히 수송분야에 전문장교였다.

​

박정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61년 5.16군사 쿠데타였다.

그때 김현옥은 부산 제3 항만사령관이었고 박정희가 이끌던 쿠데타세력은 먼저 수도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부산과 영남지방을 장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박정희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김현옥대령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부산시내 곳곳을 점령한거죠. 그래서 그 소식이 전해지고 전국적으로 쿠데타가 성공하게 된거죠. 그러면서 쿠데타가 어느정도 가닥이 잡혔을때 박정희가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을 방문하고 처음으로 수고했다고 악수를 나눈 사람이 김현옥 대령이었고, 그 해 8월에 별을 달게 되었죠. 그러면서 소위 군정이 시작된 거죠. 부산시정을 접수하고 34세의 나이로 부산시장으로 김현옥 중장이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34살의 부산시장 김현옥은 낙후되어 있던 부산항과 부두 주변을 정비하고, 해운대로 향하는 넓은 도로를 닦아서 부산의 얼굴을 바꾸어놓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현옥의 불도저식 추진력이 바로 자신의 조국 근대화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무렵 1962년에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가고 있었다.

오로지 잘살아보겠다는 목표로 시작했던 경제개발계획은 일단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것이었고, 정부는 저곡가 정책등으로 농촌사람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서울의 인구가 폭증한다.

1955년부터 10년 사이에 서울의 인구는 2배이상 불어나 있었다.

도시다운 모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인구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 서울로 온 사람들은 당장 살집이 없었다.

그들은 무허가 판자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서울은 동아일보 연재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박정희였다.

그때 박정희는 67년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미 63년 대선때 야당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서울에서 참패를 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결국 400만 서울민심을 얻지못하면 67년 대선 또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타난 투표형태가 ‘여촌야도’ 도시에서는 야당이 앞서는 것이죠. 그러니까 67년에 또 대통령선거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서울시에 득표상황을 향상시키느냐? 이것이 박대통령 뿐만아니라 그때 비서실에서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선거를 승리로 이끌 열쇠는 서울의 인구 문제와 교통란, 주택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서울시장이었던 윤치영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시를 아주 아름답고 살기좋은 도시로 만들면 지방사람들 전부 서울로 모인다. 그러니까 서울은 도시계획 잘못하고 개발하지 않아야 서울에 사람이 적게 모인다.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국정감사때도 답변을 그렇게 합니다.”

심지어 윤치영은 지방사람들이 서울로 올때 반드시 서울시장의 허락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윤치영씨가 미국에 있다가 1937년에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때 그분이 한국에 돌아왔을때 서울시민이 70만이거든요. 그때 이미지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답답했던거지요.저래서는 안된다하고 박정희대통령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형옥시장이 마침 부산에 큰화재가 난 다음에 부산구획정리를 과감하게 합니다.그래서 박정희대통령이 김현옥이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죠.”

66년 3월 박정희는 서울시장 윤치영을 해임한다.

그리고 한달후인 66년 4월 4일, 부산시장 김현옥을 서울특별시장에 임명한다.

박정희는 김현옥에게 부산시장에 이어 더 큰 기회를 주면서 “건설에 용감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환을 하면서 겨우 중학교를 마쳐야했던 김현옥에게 그 기회는 하늘이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역대 서울시장 가운데 가장 젊은 마흔 살이었다.

부임한 그날부터 김현옥은 서울을 바꾸어 나갔다.

그는 이동시청이라는 차를 타고 다니며 건설현장을 지휘했다.

그는 군인출신답게 모든 일을 명령과 복종으로 처리하는 군대식 문화가 몸에 배여 있었다.

심지어 각종 건설사업에 공사기간을 정할때에도 군대식으로 하였다.

​주로 국경일을 완공일로 잡고 그날짜에 맞추려고 24시간 작업을 강행했다.

“조급하게 생각했죠. 우리사람들보고 빨리빨리 한다는 개념을 제일먼저 심어준 사람이 김현옥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조건 빨리하라고 그러니까요. 100일작전, 200일작전 이런 식으로 하면서..”

명령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직원들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일도 예사였다.

“하루는 계장이상이니까 수십명, 백명가까이 되었을거예요. 그 사람들 다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들어오더니 서슬이 퍼래가지고 앉기도 전에 ‘목지과장’하고 불러요. 목지과장이 일어서요.후에 보니까 나보다 나이가 많아요.(김현옥은 나하고 동갑이거든요) 다짜고짜 ‘이 새끼야,너집 마당에 나무심으면 그런것 심겠느냐?’ 입에 거품물고 야단을 쳐요.내용은 뭔고하니 자기가 시찰을 자주 다녔으니까 나가보니까 어느 가로수를 심었는데 큰 것 안심고 가는 가로수를 심었다 그거예요.그러니까 너희집에 그런것 심겠느냐고 야단인데, 아무리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과장이지만 계장이상 온 간부직원있는데서 그렇게 할 일이예요?”

자신의 그런 행정방식을 비판하는 기자들 앞에서 김현옥은 서울의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장으로써의 고충을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다.

“그 전시장까지는 젊잖은 말씀으로 많이 했는데, 이 양반은 확확 내뱉는 말이잖아요. 행정자체도 내닫는 행정을 했는데, 어떤때는 내닫는 행정이 좋을수도 있고…내가 김현옥씨에게도 그걸 느꼈는데, 브레이크 기능이 좋지않은 엔진만 숭상하는 것같은 리더쉽이잖아. 엔진이 좋을수록 브레이크가 든든해야 되거든요. 이런것에 대한 배려가 ‘브레이크는 나중에 생각해’ 같은 모양으로 내닫는것 같은 것을 내가 느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현옥에게 주어진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는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온갖 문제들을 어떻게든 해결해야하는 그에겐 무겁고 외로운 짐이었다.

김현옥은 하루빨리 도로을 내고 빌딩을 세워서 보기좋은 서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조국근대화를 앞당기는 길이라 여겼다. 즉흥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또 ‘하면 된다’는 구호를 앞세워서 밀어붙였다.

정해놓은 완공날짜에 무리하게 공사일정을 맞춰나갔다.

상당수 시민들은 군사작전처럼 진행되는 개발사업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서울을 보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군사정권은 일도 잘한다는 말도 해줬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김현옥의 불도저식 개발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김현옥의 대규모 개발사업들을 지켜보면서 반대의견을 내놓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한정섭씨는 청계고가도로 건설계획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김현옥이 시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서울시의 도시계획 과장이었다.

한정섭씨는 김현옥의 계획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설계도까지 내놓았다.

전문가가 보기에 고속도로가 도심을 관통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청계천고가도로를 반대한 것은 기왕 자동차 도로를 가지고 고가도로를 만들더라도 도심을 관통해서는 안된다.교과서 ABC이거든요.김포공항에 내린 사람이 워커힐에 간다해서 청계천을 통과하면 청계천은 올 필요없는 사람아닙니까? 그러면 도심이 자꾸 발달하면 어느 나라고 교통량이.. 도심에 들어오는 차만 가지고도 감당을 못하잖아요.그러니까 순환선이라는게 필요한거예요.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그게 더 빠르고, 또 도심에는 진입을 안시키는게 그 순환선이거든요.”

“한정섭씨가 비판한 것은 뭐할라고 도심에 그런 고가도로를 놓을 필요가 있느냐.이것이 한정섭씨가 비판한건데 그때는 서울의 도시계획을 한 사람들이 거의다 청계천고가도로에 대해 비판적인 눈으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김현옥은 도심 전체를 관통하려 했던 원래 계획에서 규모만 조금 줄여 공사를 강행했다.

김현옥으로서는 그렇게라도 청계고가를 세워야만 하는 남다른 필요성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상식이었는데 박정희대통령이 그당시 자주 워커힐에 투숙을 하셨거든요. 밤에도 가고,토요일에도 가고 하룻밤 주무시고 오고. 그래서 박정희대통령이 워커힐에 가기 편하도록 고가도로를 만들었다. 그때로봐서는 그것이 상식이었어요. 지금은 이해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만…”

게다가 청계고가는 날림으로 지어져 완공직후부터 안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정섭씨가 더욱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서울의 도시계획마저도 날림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서울시 도시계획 과장시절 한씨는 도심 곳곳을 꼼꼼하게 측량해서 도시계획안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유엔이 주는 장학금을 받고 일본 동경대 도시계획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중에 그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한정섭씨가 유학을 떠난 사이 김현옥이 시장으로 부임하면서 한씨가 초안만 잡아놓은 계획안을 단 2달만에 완성해서 전시한다는 것이었다.

몇년이 걸려도 모자랄 도시계획을 2달만에 완성했다니 황당할 뿐이었다.



“2만5천분의 일 지도에다가 (그건 도면도 아니에요) 쭉 바둑판식으로 금을 그어서 도시라고 전시하고, 또 전시만 하는줄 알았더니 한달인가 두달인가 도시계획안이 결정되었다는 거예요.아니~ 한나라의 도시를 그렇게 하는게 어딨어요? 그러니 정말 실망스럽죠. 한번 하면 백년대계라해서 사실 외국에서는 도시계획뿐만 아니라 다른 건축계획도 마찬가지지만 실시하는 시간보다 계획기간이 더 긴게 정상이에요.”

도시계획안을 두달만에 완성했던 것은 8월 15일로 잡아놓은 전시회 날짜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계획안에 참여했던 전문가와 서울시 간부들조차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문제가 있었죠. 지금도 그것은 무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지적이 맞지않는데다가 선을 넣었으니까. 집행하는 행정과로서는 우리때문에 애를 먹은데도 많았을 겁니다. 지적이 안 맞으니까.”

그들은 명령과 복종이라는 그시대의 방식에따라 무모한 계획도 현실로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때 우리가 젊어서 그래요. 젊었고 우리가 빨리빨리하는 민족성 아니에요? 그리고 그당시 군사정권 시절이고. 또 군의 스타일이 명령떨어지면 즉각 집행에 옮기는 겁니다. 그런것이 상당히 영향을 주었지, 무슨 도시계획을 무시하고 법을 무시하고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당시 군사정권시대에서는 모든것이 명령으로 다 움직였거든요.”

한정섭씨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1년만에 서울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전공과 상관없는 포장계로 발령났고 서울시를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도심에 있는 공원부지들이 차례로 팔려나가 다른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명동의 경우 제일백화점이 들어선 자리는 60년대 초반 이 일대 지주들의 땅을 조금씩 모아서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공원이거든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명동토지구획사업지구내 지주들의 땅이에요. 그런데 사업시행을 市가 했으니까, 市에다가 관리를 위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시가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할 땅을 팔아먹은 거예요.”

국보1호인 남대문옆은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로 해방후 공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서린동에 들어선 호텔 자리에도 어린이 공원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밖에도 많은 공원 용지와 녹지들이 확보되어 있었다.

김현옥이 부임하기 전인 1965년 당시의 서울도시계획지도.

도심 곳곳에 녹지 표시가 남아있다.

현장에서 확인했던 서린동과 명동 그리고 남대문옆 공원 용지외에도 10군데 이상의 녹지들이 기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군인들에게 팔려나갔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지금과 같이 건물이 들어섰다.

“잘못한 것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랬나요? 재원확보하기 위해서 그랬죠. 여러 공사를 해야되는데 재원은 없고하니까 그런 것을 매각해서 어떻게라도. 지금 명동에 나가면 쉴만한 곳이 없는데 공원이 남아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 물론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땐 어떤의미에서는 김현옥시장의 명령에 의해서 내가 움직였다는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식견이 없었다할까 내 철학이 없었다할까, 그런 점에선 후회를 합니다만…”

공원용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고가도로와 입체교차로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 만들어진 입체교차로들은 9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김현옥은 도심재개발 사업에도 민간자본을 끌어들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운상가이다.

그런데 세운상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

남산과 종묘를 연결하는 동서 녹지축을 끊어놓은 것이다.

세운상가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불이 났을때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 공터로 비워둔 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선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대형주상복합건물을 지은 것이다.

“당시는 서울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그런 단계였습니다. 급격한 성장단계에서는 사실은 공공부문이 선도해서 인프라를 놓고 공공시설을 놓고 또한 그 시설이 공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 이후에 사적부분에서 도시를 개발하거나 도시를 이용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기틀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야 도시전반에 공공성이 살아나는데 김현옥 시장께서는 경영행정이라는 원리를 도입하면서 비록 시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주로 이윤을 남기고, 성과를 남기는 그런 사업을 하다보니까 비록 공공사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의 결과는 공공성을 담보로 하지 못하는 결과가 그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잘못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김현옥이 그때 전문가들의 의견에 두루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 서울의 모습은 전혀 달라져 있을 것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명동, 남대문,무교동을 포함해서 서울 한복판에도 공원 용지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김현옥시장 시절에 민간에 모두 팔아버렸던 것이다.

김현옥은 세금만으로는 벌여놓은 사업들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민자유치라는 명분으로 대기업과 손을 잡았고, 결국 서울은 몇몇 자본가들의 이익에 따라서 기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민들의 쉴 공간과 걸어다닐 길은 마구잡이로 들어선 빌딩과 도로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개발이 무리하게 이루어지다 보니까 어처구니없는 희생이 생기기도 했다.

서울 신촌에 있는 와우아파트 한동이 완공된지 불과 4달만에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아래에 있던 판자집까지 덮쳐서 33명이 죽고 40명이 크게 다쳤다.

2일에 거쳐 생존자 구조작업이 벌어졌다.

아파트가 서있던 자리에는 철근과 콘크리트등 잔해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정도로 산산조각나 있었다.

와우아파트에 가장 큰 사고원인은 지형을 무시한 허술한 지반공사였다.

경사가 무려 70°나 되는 산비탈 모래바닥에 건물을 세워놓고는 기둥 몇개로 이를 지탱해 놓았다.

총체적인 부패와 안일한 건설행정은 사고의 또다른 원인이었다.

6단계에 걸쳐 하도급을 주는 과정에서 자재가 흘러나갔고, 건설비는 비리를 입막음하기 위한 뇌물로 빠져나갔다. 온갖 비리들이 맞물리면서 와우아파트는 그때 시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평당 만원으로 지은 것이다.

사람이 죽고 비리가 폭로되자 정치권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건국이래 최초의 건설참사인데다가 71년 대통령 선거까지 앞둔 시점이었다.

시민아파트 건립을 지휘했던 김현옥은 4년만에 서울시장 자리를 물러난다.

애초 김현옥이 시민아파트를 계획한 것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무허가 판자촌 때문이었다.

도심지에 판자촌을 철거할때마다 철거민들은 산위로 옮겨갔다.

보다못한 정부가 시외곽에 주택을 마련해줬지만 철거민들은 서울시내에 있어야만 먹고 살수 있었다.

결국 철거민들은 서울에 있는 산으로 산으로 밀려올라갔다. 그렇게 서울시내 산들을 가득메운 판자촌은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않은 그시대 서울의 얼굴이었다.

“1968년부터 서울에 외국관광객이 들어옵니다. 주로 일본사람들이. 서울에 들어온 단체관광객의 일부가 옛날 경성제대의 교수나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아마 80명이었다고 제가 기억하는데.. 그분들이 제일먼저 가보고 싶어한 곳이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니고 무허가건물 집단지역을 가보고 싶다는 것이 그분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김현옥은 산비탈의 판자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짓기 시작한다.

모두 약 2천동의 아파트를 짓기로 하고 사업 첫해에 400동을 완공한다는 것이 김현옥의 목표였다.

그런데 적은 비용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한가지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당시 시민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정리해서 서울시가 면모가 다른 도시로 만들겠다는 집념이 있었기 때문에 각구청으로 하여금 무허가 건물지역을 헐어라. 어디 이주시키려고 하니까 생계유지가 안되니까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지어서 입주시키자. 할려면 막대한 돈이 드니까 간단하게 골조만 만들어주고 안에 들어가서 자기네들이 살게 해주자. 이렇게 처음 구상이 되었는데..”

공사를 맡은 서울시의 각 구청들은 빨리 끝내라는 명령에 따라서 속도전을 벌였다.

“그리고 각 구청마다 경쟁을 시켰습니다. 빨리 끝내는 쪽이 칭찬도 받고 하니까 필사적이었죠.”

“또 그당시 구청장들이 거의다 군출신이니까…”

김현옥은 1년동안 모두 460여동의 시민아파트를 세웠다.

그때 지은 시민아파트 대부분이 서울시내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와우아파트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렇게 높은 산에 아파트를 세웠던 자체가 무리였다.

​”알다시피 전부 무허가 건물이 있었던 데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 건물을 지을려니까 골재운반이 잘안되고(도로가 없으니까) 또 거기에 들어가는 물, 섞을려면 물이 필요한데 물이 부족하니까 아무래도 시민아파트 건립이 아주 조잡하게 된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거기에 골재가 안들어오니까 그 근처에 있는 흙을 섞어서 썼던 것. 그다음에 물이 없으니까 도랑물, 폐수를 써서 골조를 만들었는것 이런 등등이 실패작이었고… 와우아파트는 거기에 沙질이 많습니다. 모래의 질이 많은 그런 동네였는데….”

와우아파트는 애초에 부실하게 지어지긴 했어도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완공직후부터 아파트 벽에 금이가고 건물이 흔들리는 등 붕괴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몇번이나 경찰과 구청에 신고를 하고 진정을 냈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감사원에서도 시민아파트의 건설비리와 부실공사를 여러 차례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현옥은 최악의 사태를 예감하기 시작한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기 보름전인가 담당 국장을 불러서 내꿈에 시민아파트가 무너지는 꿈을 꿨다. 괜찮겠나? 이렇게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 없습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는데..”

사고가 날 조짐이 보였을 때 빨리 대책을 세웠더라면 33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만은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 앞에서 김현옥은 고개숙여 사죄했다.

그에겐 4년동안 불도저로 밀어붙인 것들이 결국 무너지고말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는 오명만 남았다.

뿐만아니라 곳곳에 시민아파트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결국 정부는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안전진단에 나서서 그때까지 지어진 400여동 중에서 100여동의 시민아파트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기로 한다.

그것은 서울시장을 사퇴한 김현옥에게 또다른 불명예로 남았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직을 물러났던 김현옥은 1년 6개월만에 내무부장관이 되었다.

사고직후 구속되었던 공무원과 건설업자는 무죄선고를 받고 모두 풀려났다.



​

김현옥은 내무부장관을 지낸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후 그는 정치를 포기하고 중학교 교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죽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를 진정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이후의 제2,제3의 부실공사와 대형참사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우린 아직도 이러한 악순환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김현옥은 자신이 쓴 <푸른 유산>이라는 에세이집에서 불도저가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썩은 연륜을 단죄하여 그 위에 오롯한 푸른잎을 길러서 그것을 그대로 물러주고 싶다’

우리는 그시절 불도저식 개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가 말한 푸른 유산을 물려받진 못했다.

2003년 1월 서울의 한 건축회사는 미국 하버드대학 건축학과 대학원 학생들을 초청했다.

서울의 도시문화와 환경을 보여주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건축과 도시개발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은 일주일동안 서울 전역을 살펴봤고 저마다 소감을 털어놨다.

그들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600년 역사의 흔적이었다.

“서울의 600년역사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20년마다 바뀌는 건물들에 의해서 어떤 도시의 역사의 흔적이나 도시 나이의 흔적이라든지 그게 너무 남아있지 않다.이런 말을 하면서 또 한강을 봤을때 어떻게보면 서울이 갖고있는 생명인 한강인데 한강에 갈수있는 고수부지 접근방법부터가 군데군데 차로 가면 조그만 토끼굴같은 곳을 통과해서 들어가는데 어떻게 그게 다냐?”

그들이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주유소 건물에 가정집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그들의 눈엔 위태롭고 혼란스런 광경이었고 계획없이 만들어진 도시라는 인상을 남겼다.

​

“이들이 볼때는 아무생각없이 개발이 된건 아닐까? 그러다보니까 또 이들이 앞으로 그러기때문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앞으로 많은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기회가 남아있지 않을까?하고 이들이 생각하고 간 것이고요.”

600년전 조선의 도읍이었던 서울은 치밀한 설계로 지어진 도시였다.

그때 도시설계의 기준은 동서남북을 둘러싸는 4개의 산과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이었다.

600년전 서울을 설계했던 조상들은 인간과 자연의 균형있는 조화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원칙은 일제를 지나면서 깨지기 시작했고, 개발시대를 지나면서 자취없이 사라져 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산은 백년앞도 내다보지 못한채 2,30년 주기로 허물고 갈아엎는 개발시대의 문화와 경제적 효율성만을 쫓았던 개발시대의 이념이다.

이제 개발시대를 넘어 역사와 자연 그리고 인간중심의 사고를 해야하는 지금, 그 시대의 김현옥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반면교사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KBS 인물현대사 (2003.8)

​

[기타뉴스]서울 개발의 그림자···’불도저시장’ 김현옥 – 경향신문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30분께에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였다. 두어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거였다. (…)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의 3분의 1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무계획적인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서울 도심을 오가는 차량이 늘어나자 서울시는 논스톱으로 달릴수 있는 고가도로를 건설합니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 고가도로(당시 3.1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질수 있는 새로운 도로가 생긴겁니다. 박원순 시장이 철거하겠다고 밝힌 서울역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인 1970년 8월15일 16개월만에 완공됐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개통으로 3.1 고가도로와 퇴계로쪽에서 제1한강교 방향으로 빠지는 차량이 신호를 받지 않고 달리게 됐습니다. 물론 당시 만들어진 도로들은 이후 부실공사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3.1고가도로는 완공 8년 뒤, 콘크리트가 깨져나가 직경 50㎝㎝의 구멍이 뚫리는 일도 있었죠. 보여주기·불도저식 개발정책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죠.

“한강 한가운데 돌과 모래로 된 섬 밤섬(율도)1만7300평이 없어진다. 서울시는 10일 상오 밤섬 폭파작업에 착수, 5월 말까지 제거작업을 한다. 폭파이유는 하구를 넓혀 현재 공사중인 여의도를 홍수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 500년 동안 운명의 혜택을 모르고 살아온 이 밤섬은 62가구 443명이 도선업과 어업으로 살아온 서울의 명소. 행정명칭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 6반. 도둑이 없고 질병이 없다는 이 섬엔 ‘부군신’이란 사당이 있다. 이 고장은 500년 동안 수도물과 전깃불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한강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다는데도 탈이 없다. 또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조롱불을 켜서 마을을 밝게 하고 있다.(…)주민들은 서울시가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이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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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뉴스]서울 개발의 그림자···‘불도저시장’ 김현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1966년부터 만 4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한 김현옥을 아시나요? 불도저 시장으로 세종로·명동 지하도 건설, 여의도 개발, 청계고가도로·남산터널 건설 등을 추진했습니다. 서울시내 빈민 주거지를 철거하고 빈민들을 경기 광주(지금의 성남)로 이주시키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개발사업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시장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내무부 장관에 오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7월1일부터 8월21일까지 ‘불도저시장 김현옥’ 전시회를 진행합니다. 김현옥은 어떤 시장이었을까요?

■세종로·명동 지하도, 청계고가도로 공사

1966년 4월. 세종로지하도 설치공사 기공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공사 안내판 앞에서 한손을 들고 설명하는 이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입니다. 현재 서울지하철 광화문역과 연결된 ‘세종로 지하도’를 만드는 공사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세종로 지하도는 1966년 4월부터 그해 10월까지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당시 광화문 4거리 모습과 공사 진행 과정을 보시죠.

1966년 세종로지하도 | 서울시(http://opengov.seoul.go.kr)

1966년 4월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10월 29일 세종로지하도 | 서울역사박물관

공사는 순식간에 진행됐습니다. 물론 완공 이후에 지하천장에 금이 가고 보수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서울시청역과 연결된 태평로 지하도와 명동 지하도, 광화문 지하도, 청계청 고가도로, 남산1·2호 터널 모두 김현옥 시장때 진행된 공사입니다. 번잡한 도로에 지하도 건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다보니 당시 경향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 항의 편지도 왔습니다.

“의욕있고 젊은 김현옥 시장이 취임한 후 세종로, 미도파 앞 등에 지하도공사가 벌어진 것은 교통난의 완화를 위해 오히려 만시지탄은 있을 망정,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과잉의욕 탓인지 이런 공사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가장 번잡한 두곳에서 착공돼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서대문 육교 공사가 끝난 뒤에 세종로 공사를, 그리고 그 동안엔 미도파 입구 공사를 했던들 이처럼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1967년 5월2일 태평로 지하도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10월 3일 명동지하도(미도파앞) 개통 | 서울시

1968년 5월31일 청계천 고가도로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도심을 오가는 차량이 늘어나자 서울시는 논스톱으로 달릴수 있는 고가도로를 건설합니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 고가도로(당시 3.1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질수 있는 새로운 도로가 생긴겁니다. 박원순 시장이 철거하겠다고 밝힌 서울역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인 1970년 8월15일 16개월만에 완공됐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개통으로 3.1 고가도로와 퇴계로쪽에서 제1한강교 방향으로 빠지는 차량이 신호를 받지 않고 달리게 됐습니다. 물론 당시 만들어진 도로들은 이후 부실공사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3.1고가도로는 완공 8년 뒤, 콘크리트가 깨져나가 직경 50㎝㎝의 구멍이 뚫리는 일도 있었죠. 보여주기·불도저식 개발정책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죠.

■남산 1·2호 터널

1969년 남산터널 시찰하는 김현옥 시장| 서울역사박물관

현재 서울의 주요 도로는 대부분 김현옥 시장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도심지를 연결하는 남산 1·2호 터널도 1970년 완성됐습니다. 완공된 뒤 터널에 물이 새는 사고도 빈번했습니다. 5년 뒤 남산 1호 터널은 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서울시는 세금을 써가며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갔습니다.

“당초부터 안전성을 무시한 설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물이 새고 터널의 천장을 암반에 매달아놓은 철근이 심한 산화작용으로 채 5년도 못돼 전면적인 보수를 해야하는 등 시민아파트와 함께 부실공사때문에 시세만 축내고 있다(…) 터널의 천장이 아치형으로 돼 암반과 천장사이에 철근 콘크리트 등으로 완전히 채워져야 하는데도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천장을 평평하게 하고 암반과 천장사이의 공간을 채우지 않은채 철근으로 천장을 매달아두는 정도로 설계됐기 때문에 천장을 뜯어내는 전면보수가 불가피”(1975년 3월28일자 경향신문)

■여의도 개발과 밤섬 폭파

1968년 5월31일 여의도공사장 | 서울역사박물관

한강 개발도 추진됩니다. 한강 개발의 핵심공사는 여의도 윤중제 준공. 여의도 주위에 제방도로인 윤중제를 쌓는 공사였죠. 1968년 서울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높이 16m, 둘레 7.6㎞, 폭 35~50m의 윤중제가 완성됐습니다. 윤중제로 여의도는 침수 피해에서 벗어나게 됐고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게 됩니다.

1968년 2월10일 한강 밤섬 폭파 전 | 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 개발을 위해 한강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보금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한강 밤섬을 폭파시킨 인물이기도 하죠. 밤섬을 폭파시킨 건 한강 하구를 넓혀 물이 여의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밤섬 폭파 당일 발행된 1968년 2월10일자 경향신문은 당시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강 한가운데 돌과 모래로 된 섬 밤섬(율도)1만7300평이 없어진다. 서울시는 10일 상오 밤섬 폭파작업에 착수, 5월 말까지 제거작업을 한다. 폭파이유는 하구를 넓혀 현재 공사중인 여의도를 홍수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 500년 동안 운명의 혜택을 모르고 살아온 이 밤섬은 62가구 443명이 도선업과 어업으로 살아온 서울의 명소. 행정명칭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 6반. 도둑이 없고 질병이 없다는 이 섬엔 ‘부군신’이란 사당이 있다. 이 고장은 500년 동안 수도물과 전깃불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한강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다는데도 탈이 없다. 또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조롱불을 켜서 마을을 밝게 하고 있다.(…)주민들은 서울시가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이주 된다”

■시민아파트

1969년 금화아파트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는 서대문구 석교동과 영천동 뒷산 고지대의 판자촌을 철거합니다. 지금의 서대문역과 독립문 사이에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천연동, 석관동, 영천동, 냉천동 일대의 셋방이나 불광동 문화촌의 집단천막촌에 흩어있는 철거민들이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1969년 5월20일 월곡아파트 시찰 중인 김현옥 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월곡동에는 9동짜리 시민아파트를 준공했습니다. 문제는 서울시가 시민아파트 건설공사를 성과내기식으로 밀어붙이다보니 날림 공사가 많았다는 겁니다. 당시 시민아파트 건립에 대해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 프레시안 기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 쿠데타, 열다섯 번째 마당 )

서중석= 무주택자나 아주 형편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이 사람들의 대다수는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게 박정희 정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서울의 경우 무허가 불량 주택이 1961년에 8만4440호였는데 1964년에는 11만62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였던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1966년 말 서울시내 판자촌 인구가 약 127만 명이나 됐다. 당시 서울시 인구의 3분의 1 정도나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1966년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부임했다. (…)하나는 철거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아파트(시민 아파트)를 건립하는 정책이었다. 그중에서 서민 아파트 건립 정책이 서울시내의 경우 우선 눈에 띄었는데, 그 문제점을 단번에 싹 드러낸 것이 유명한 와우아파트 도괴 사건이었다.

불도저식, ‘빨리빨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와우아파트지만 다른 데에도 이것과 비슷하게 지은 경우가 많지 않았겠나. 그런데 와우아파트가 건립된 입지는 70도나 되는 경사진 산비탈이었다. 이럴 때에는 그런 경사로 인해 가중되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 시공했어야 하는데 그런 고려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서울의 시민 아파트가 다 이런 고지대에 건립됐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내가 대학 다닐 때 이처럼 고지대의 시민 아파트를 참 많이 봤다. 고지대 건립은 저지대 건립에 비해 자재 운반, 공사 진척 등 모든 것에서 힘이 더 들고 건립 비용도 더 들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싼 가격으로 빨리빨리 지으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산비탈이나 산등성이에 지어놓았느냐.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서울시 간부로 있었던 손정목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쓴 게 있다. 그걸 보면 한 간부가 ‘왜 이렇게 높은 데다가 아파트를 지어야 하느냐.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이 출퇴근하기도 힘들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을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김현옥 시장이 “야 이 돌대가리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박정희 시기 경제 정책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장면이다.

1970년 와우아파트 구조작업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김현옥 시장의 불도저식 개발의 문제점은 1970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해 4월8일 서울 마포 창전동 산1번지에 위치한 와우아파트(시민아파트) 15동이 무너졌습니다.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당시 와우아파트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30분께에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였다. 두어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거였다. (…)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의 3분의 1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무계획적인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철거민 문제

1971년 광주대단지 | 경향신문 사진자료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났지만 김 시장이 시작한 불도저식 개발 드라이브는 또다른 사건을 낳게 됩니다.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죠.

“김 서울시장은 해마다 수해를 겪는 청계천 중앙천 홍제천 등 35개 천가에 난립한 무허가 판잣집 1만1657동을 이달안에 모두 철거, 경기도 광주군의 대단지에 이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1969년 7월14일자 경향신문)

경기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중원·수정구 일대). 바로 위 기사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이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고 서울 근교로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키기 위해 조성한 곳입니다. 당시만해도 ‘광주대단지’라고 불렸습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시장이 물러난지 1년 뒤, 이곳에 철거민 수만여명이 “살려달라”고 모였습니다. 나무 몽둥이와 삽 등을 든 이들은 이날 관용차량과 시영버스는 물론 파출소 등 공공기관까지 불태웠죠. 정부나 언론은 즉각 “무지하고 가난한 폭도”들의 ‘폭동’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수년에 걸친 건의, 진정, 호소, 시위와 집회도 먹혀들지 않자 최소한의 생존권·주거권을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싸움이었습니다.

1969년 자신이 추진한 공사 준공식의 준공가위들의 모아놓은 김현옥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준공가위 앞에 선 김현옥 시장의 모습입니다. 현대 서울의 모습을 만든 시장이지만 개발 논리를 앞세우며 공사를 밀어붙이다 날림공사를 낳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빈민들을 몰아낸 불도저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여러분은 김현옥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 김현옥 서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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