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1081 황룡사지 9층 목탑 새로운 업데이트 155 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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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 나무위키

27 thg 12, 2022 —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이다. 당시 주변국에게 위협받던 신라의 불안한 국제정세를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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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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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그곳 – 21세기, 다시 만나는 황룡사 9층 목탑.20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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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역사적 변천],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문화재 종목별 검색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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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100% 황룡사지 9층 목탑 360도 VR (큰별쌤★ 최태성 특강) [히스토리AR] VR 특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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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The construction of Hwangnyongsa Temple, located east of Wolseong in Gyeongju, was begun in 553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 (540-576) of the Silla Dynasty to honor a yellow dragon that is said to have appeared at the building site. At the time of its completion in 574, Silla received models of Sakyamuni Buddha and his two acolytes, along with a vast amount of iron and gold, from India which, as the story goes, the great Indian king Asoka intended to use to make the statues of a Shakyamuni triad but failed. Silla was able to build a 5-meter-tall Shakyamuni triad with the precious metals, and in 584 erected a golden shrine hall in which to enshrine them. Later, a nine-story wooden pagoda was started in 643 on the advice of Jajang, a great priest of Silla, and was completed in 645 by a famous Baekje builder named Abiji. Silla’s rulers hoped that the pagoda would bring Buddha’s aid for the protection of their kingdom against the nine foreign enemies symbolized by the nine stories of the pagoda. Hwangnyongsa Temple, which took 93 years to complete and eventually its Nine-story Wooden Pagoda became one of the three national treasures of Silla along with a sixteen-feet-high statue, which also was in the temple, and a jade belt bestowed by heaven. This great temple was, however, burnt down during the Mongol invasion of Korea (then Goryeo) in 1238. The remaining features of the temple show that it originally consisted of a middle gate, a wooden pagoda, a main prayer hall and a lecture hall arranged in a straight line, to which two more prayer halls, a bell tower and a scripture hall were added at a later date to form a wonderful symmetry. The temple was then enclosed by the huge structures of the gallery. According to Samguk 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the temple also had a large temple bell, which is now missing. An excavation of the temple site started in 1976 produced a large collection of about 40,000 artifacts including gilt-bronze Buddhist statuettes, bells, ear ornaments, glass vessels and a huge 182-centimeter-long ornamental ridge-end tile. It is said that the temple also had a mural painted by Solgeo, who was admired as the greatest artist of his time, in its central prayer hall. The shards of a white porcelain jar from Tang China discovered at the wooden pagoda site constitute valuable tangible evidence of active exchanges between Silla and Tang.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경주 황룡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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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복원 신라최고의 사찰 황룡사 9층목탑 [역사실험] KBS 1996.05.2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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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룡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황룡사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 [ 편집 ]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2]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2]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2]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2]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황룡사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이 친행예불한 장소로는 황룡사 이외의 곳에서 예불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2]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현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의 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2]

남겨진 절터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그 절터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2]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2]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2]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2]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2] 또 솔거(率居)의 노송도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2]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 · 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2]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2]

황룡사 9층 목탑 [ 편집 ]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터 [ 편집 ]

황룡사 9층목탑을 위시한 황룡사 터 개략도 황룡사 복원 전경 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사진 [ 편집 ]

당간지주

경주국립박물관 소재 망새(치미)

망새에 새겨진 얼굴 무늬

황룡사 장륙삼존불상의 불대좌

관련 작품 [ 편집 ]

《비원의 탑》(2012, 학산문화사) – 전혜진 글, 최미애 그림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을 소재로 하는 만화이다. 전3권.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경주 황룡사지 553 – 우리역사넷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문헌 기록에 의해 탑의 높이는 약 80m로 추정된다. 탑의 건립을 위해 당시 백제의 장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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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꿈을 품은 황룡사 9층 목탑!|다시만나는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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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황룡이 나타난 신라의 국찰(國刹)

경주 중심지에 위치한 사적 제6호 황룡사지(皇龍寺址)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 완공된 황룡사의 옛터이다. 황룡사는 진흥왕, 진지왕(眞智王), 진평왕(眞平王), 선덕여왕(善德女王) 등 4대 왕에 걸친 대규모 불사(佛事)를 통해 국찰(國刹)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 착공 때부터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 군대에 의해 소실될 때까지 오랜 기간 유지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 황룡사의 창건부터 소실까지 발생한 재해와 중수 내력, 목탑의 구조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황룡사 구층 목탑 찰주본기(皇龍寺 九層木塔 刹柱本記)」를 통해 872년의 황룡사 9층 목탑 중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사찰의 구조와 변천이 밝혀졌고, 현재까지 지속적인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에 완공된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진흥왕의 불교치국(佛敎治國) 정책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경주의 중심지에 위치한 황룡사는 본래 진흥왕이 궁전을 지으려고 한 건물의 용도를 사찰로 변경하여 완공된 것이다. 이후 574년(진흥왕 35)에 크기가 1장(丈) 6척(尺)인 장육불상(丈六佛像)이 조성되고 584년(진평왕 6)에 황룡사에 부처를 모시는 전각인 금당(金堂)이 새롭게 완공되었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총 높이가 약 80m인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조의 기록이 주목된다. 이는 533년 진흥왕이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는 도중에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건물을 절로 고쳐 짓고 황룡사라 하였다는 기록이다. 월성 동쪽은 신라의 신성한 7개의 절터 가운데 하나로,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에 자세한 내용이 전해진다. 여기에서 아도(阿道)는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오기 전에 그의 어머니인 고도녕(高道寧)에게 전불시대(前佛時代), 즉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출현한 부처들이 있었던 시대에 경주 안에 7개 절의 터가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 가운데 신라 월성의 동쪽에 용궁이 있고, 바로 이 용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세워졌다. 신성한 7개의 절터에 대한 기록은 신라인들의 불국토(佛國土) 사상과 연관되는데 이것은 신라가 본래 오래전부터 부처가 계신 땅이었다는 관념을 나타낸다. 신성한 땅에 황룡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사찰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창건 배경은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황룡사지 기반의 토양 상태, 사찰 주변의 토목공사 흔적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황룡사가 건립된 땅은 범람지(氾濫地)였기 때문에 황룡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범위한 영역의 땅을 다지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현재 황룡사 남쪽 남문 앞에는 대규모 광장 유적과 함께 서쪽으로는 동궁과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까지 동·서쪽으로 뻗은 대형 도로 유적이 확인된다. 황룡사 앞 도로 유적의 남쪽에는 도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담장이 있는 작은 건물들이 다수 건립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자갈과 흙을 여러 층으로 다져 쌓은 땅 위에 건설되었다. 황룡사 주변 도로와 건물 등을 건설한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사찰의 건립과 함께 황룡사 주변 일대의 새로운 시가지 건설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이러한 토목공사에는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서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당시 대규모의 사찰 창건 공사를 진행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되는 진흥왕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진흥왕은 법흥왕(法興王)이 지니고 있었던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을 계승하며 불교적 이상군주로서 신라에 정법(正法) 왕국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이름이 사미(沙彌) 또는 승가(僧伽)를 뜻하는 삼맥(彡麥)이고 태자들의 이름이 전륜성왕을 의미하는 동륜(銅輪), 금륜(金輪)이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그의 행적이 불교를 숭상하며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의 행적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선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며 건립한 순수비(巡狩碑)는 아쇼카왕이 정복 지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건립한 석주(石柱) 및 마애법칙(磨崖法勅)과 유사하다. 또한 진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승려로서 사원에 머문 모습도 경전에 전해지는 아쇼카왕의 행적과 유사하다. 신라의 3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진 황룡사의 장육불상도 아쇼카왕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에 의하면 이 불상은 진흥왕이 아쇼카왕에게 받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은 불상 조영에 실패한 아쇼카왕의 숙원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즉 장육불상의 연기설화(緣起說話)를 통해서도 진흥왕이 지니고 있었던 전륜성왕 의식이 확인되는 것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문헌 기록에 의해 탑의 높이는 약 80m로 추정된다. 탑의 건립을 위해 당시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신라로 초청되었고 김용춘(金龍春)이 신라 장인 200여 명을 인솔하였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에 기록된 목탑의 창건 배경을 살펴보면, 자장이 중국 당(唐)을 유학할 당시의 내용이 전해진다. 신인은 자장에게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본인의 큰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고 황룡사에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어서 신인은 신라에 돌아가 황룡사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자장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목탑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자장이 중국을 유학한 시기가 수(隋)·당(唐) 교체기인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 때라는 것이다. 이 시기 중국 장안(長安)에서는 여전히 수의 문제(文帝, 재위 581~604)가 실시한 불교 정책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어 자장이 그의 불교 정책을 견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전륜성왕을 모델로 하여 다수의 사리탑을 건립한 수 문제의 불교 정책이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배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된다. 중국 당의 도선(道宣, 596∼667)이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의하면 자장은 각 지방에 많은 사리탑을 건립한 문제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리탑만 건립하였다. 하지만 자장은 분명히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이는 신라의 국찰인 황룡사에서의 목탑 건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장이 수 문제의 사리탑을 모델로 하여 선덕여왕도 부처의 사리를 지킬 만한 전륜성왕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의도를 바탕으로 건립된 황룡사는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시기별로 창건가람, 중건가람, 최종가람으로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황룡사의 창건가람은 동시기에 건립된 백제의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늘어서고 회랑으로 감싼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형태였다. 중건가람 이후의 가람배치는 목탑 위쪽에 세 개의 금당이 일렬로 늘어선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 형태로 변화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일반적으로 일탑삼금당 형식은 세 개의 금당이 동과 서, 북쪽에서 목탑을 둘러싸는 배치이지만 이 시기 황룡사의 일탑삼금당 형식은 금당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금당-중금당-동금당의 순으로 일렬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계통의 3금당식 가람에서 발전·변화된 형태라고 이해된다.

황룡사에서는 대규모 호국(護國) 법회가 거행되었다. 여기에서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거행되어 호국을 기원하는 국찰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법회에는 역대 왕들이 친히 행차하여 참석하기도 하였다. 백고좌회와 팔관회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순한 혜량(惠亮)이 황룡사에서 신라 최초로 개최하였다. 원광(圓光), 안홍(安弘), 자장, 원효(元曉) 등 많은 고승이 황룡사에 머무르면서 경전을 강독하는 강경(講經)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고승 중에는 황룡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신라 불교계의 최고 통솔자인 국통(國統)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황룡사가 신라 불교계와 승려를 관리하는 중추적인 기구로 기능하였다고 이해된다. 황룡사의 위상과 관련하여 754년(경덕왕 13)에 만들어진 황룡사 종의 시주자가 경덕왕의 전 부인인 삼모부인(三毛夫人)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이 종은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 4배가 컸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황룡사 종을 주조할 수 있었던 왕실 외척의 막대한 경제력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시기별로 중수를 거듭한 황룡사가 폐사(廢寺)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건립된 후 1238년(고려 고종 25년)에 몽골 군대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수 차례 중수가 거듭되었다. 그중에 주목되는 기록은 보물 제1870호에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로, 이 사료를 통해 871년(경문왕 11) 중수된 탑의 수리 경위와 탑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찰주본기가 새겨진 사리내함(舍利內函)은 사리외함(舍利外函)에 담겨져 목탑의 심초석(心礎石) 안에 보존되었다. 이후 사리함은 1964년에 도굴되었다가 1966년에 되찾아 경주국립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주목해야 할 내용은 찰주본기의 전반부에 기록된 탑의 창건 연기 설화에서 자장이 당에 유학을 떠난 연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찰주본기의 후반부에는 9층 목탑을 중수하기 위하여 설치한 성전(成典)의 관직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를 활용하여 왕실에 의해 건립된 사원이나 궁성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관청인 성전사원(成典寺院)의 구성과 운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 목탑은 벼락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중수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1238년에 몽골 군대의 침입으로 탑과 절, 장육존상, 전각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는 끝내 다시 중수되지 못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고려 말 문인 김극기(金克己, 1379~1463)의 시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층계를 올라가서 경주의 경치를 조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황룡사가 불에 타기 직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황룡사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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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 소장품 검색 – 국립중앙박물관

사리공의 안쪽을 감쌌던 사리외함 측면으로, 표면에 호법신護法神이 선각되어 있습니다. 호법신의 옷이 중국 북제北齊550-577년 누예묘婁叡墓 벽화의 인물 복식과 유사하여 구층목탑 건립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명칭.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 皇龍寺 9層木塔 刹柱本紀,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 국적/시대. 한국 –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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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을 재연해 보았습니다_마에스트로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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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사리공의 안쪽을 감쌌던 사리외함 측면으로, 표면에 호법신護法神이 선각되어 있습니다. 호법신의 옷이 중국 북제北齊550-577년 누예묘婁叡墓 벽화의 인물 복식과 유사하여 구층목탑 건립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 황룡사지 9층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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