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1999 황룡사 9층 목탑 업데이트 116 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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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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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사터에 있었던 삼국시대 조성한 9층 목탑의 탑터.목탑터. 키워드. 황룡사지; 선덕여왕; 자장; 목탑; 아비지. 영역닫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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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tle Website: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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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그곳 – 21세기, 다시 만나는 황룡사 9층 목탑.20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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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역사적 변천],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문화재 종목별 검색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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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tle Website: 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문화재 종목별 검색
  • Description Website: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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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꿈을 품은 황룡사 9층 목탑!|다시만나는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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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The construction of Hwangnyongsa Temple, located east of Wolseong in Gyeongju, was begun in 553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 (540-576) of the Silla Dynasty to honor a yellow dragon that is said to have appeared at the building site. At the time of its completion in 574, Silla received models of Sakyamuni Buddha and his two acolytes, along with a vast amount of iron and gold, from India which, as the story goes, the great Indian king Asoka intended to use to make the statues of a Shakyamuni triad but failed. Silla was able to build a 5-meter-tall Shakyamuni triad with the precious metals, and in 584 erected a golden shrine hall in which to enshrine them. Later, a nine-story wooden pagoda was started in 643 on the advice of Jajang, a great priest of Silla, and was completed in 645 by a famous Baekje builder named Abiji. Silla’s rulers hoped that the pagoda would bring Buddha’s aid for the protection of their kingdom against the nine foreign enemies symbolized by the nine stories of the pagoda. Hwangnyongsa Temple, which took 93 years to complete and eventually its Nine-story Wooden Pagoda became one of the three national treasures of Silla along with a sixteen-feet-high statue, which also was in the temple, and a jade belt bestowed by heaven. This great temple was, however, burnt down during the Mongol invasion of Korea (then Goryeo) in 1238. The remaining features of the temple show that it originally consisted of a middle gate, a wooden pagoda, a main prayer hall and a lecture hall arranged in a straight line, to which two more prayer halls, a bell tower and a scripture hall were added at a later date to form a wonderful symmetry. The temple was then enclosed by the huge structures of the gallery. According to Samguk 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the temple also had a large temple bell, which is now missing. An excavation of the temple site started in 1976 produced a large collection of about 40,000 artifacts including gilt-bronze Buddhist statuettes, bells, ear ornaments, glass vessels and a huge 182-centimeter-long ornamental ridge-end tile. It is said that the temple also had a mural painted by Solgeo, who was admired as the greatest artist of his time, in its central prayer hall. The shards of a white porcelain jar from Tang China discovered at the wooden pagoda site constitute valuable tangible evidence of active exchanges between Silla and Tang.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경주 황룡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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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복원 신라최고의 사찰 황룡사 9층목탑 [역사실험] KBS 1996.05.2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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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황룡사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 [ 편집 ]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2]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2]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2]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2]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황룡사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이 친행예불한 장소로는 황룡사 이외의 곳에서 예불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2]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현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의 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2]

남겨진 절터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그 절터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2]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2]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2]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2]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2] 또 솔거(率居)의 노송도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2]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 · 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2]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2]

황룡사 9층 목탑 [ 편집 ]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터 [ 편집 ]

황룡사 9층목탑을 위시한 황룡사 터 개략도 황룡사 복원 전경 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사진 [ 편집 ]

당간지주

경주국립박물관 소재 망새(치미)

망새에 새겨진 얼굴 무늬

황룡사 장륙삼존불상의 불대좌

관련 작품 [ 편집 ]

《비원의 탑》(2012, 학산문화사) – 전혜진 글, 최미애 그림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을 소재로 하는 만화이다. 전3권.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황룡사 9층 목탑 – 네이버 블로그

자장이 중국에 있는 절 근처 연못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령스런 사람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고 자장은 ‘고국인 신라에 주변 나라가 자주 침략해와서 백성들이 힘들고 걱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신령스런 존재가 본인은 원래 황룡사를 지키는 용의 아버지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9층의 목탑을 세워라. 그러면 한층의 하나씩 9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치고 정복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열심히 주춧돌을 닦고 기반을 만들면서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으면 정말 백제가 멸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아비지는 더 이상 목탑을 짓지 않기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변이 깜깜해지더니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노승이 다가오더니 그 가운데 기둥을 세울 큰 돌을 올려놓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울산항에서 이 배를 발견한 관리가 진흥왕에게 알렸고, 신라는 한 번에 이 불상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기원전 200년 전 왕이고, 진흥왕은 기원후 500년 대의 왕으로 두 왕 사이에는 700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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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을 재연해 보았습니다_마에스트로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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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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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은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주춧돌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황룡사에 있었던 9층 목탑이라 하여 ‘황룡사 구층 목탑’이라 불린다.

복원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고 한다.

복원이 된다면 80m가 넘는 높이….

신라인들은 이 탑을 왜 만들었을까?

황룡사 구층 목탑이 건립된 시기는 643년으로 선덕여왕의 통치시기였다.

그 당시 신라의 주변정세는 당나라에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군주인 태종이,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막리지에 올라서 강경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백제도 의자왕이 즉위한 상황이었다.

의자왕의 통치 말기에는 여러가지 타락하고 안좋은 모습도 있었지만, 즉위 초기에는 신라의 대야성 등 여러 성을 빼앗는 등 영토를 확장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그런 존재였다. ‘의롭고 자비롭다’고 하여 의자왕이라 불릴 정도로 현명한 군주였던 것이다.

즉 643년 신라 선덕여왕은 의자왕에게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겨 왕권이 크게 실추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자장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여왕을 찾아간다.

이것과 관련된 일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중국에 있는 절 근처 연못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령스런 사람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고 자장은 ‘고국인 신라에 주변 나라가 자주 침략해와서 백성들이 힘들고 걱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신령스런 존재가 본인은 원래 황룡사를 지키는 용의 아버지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9층의 목탑을 세워라. 그러면 한층의 하나씩 9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치고 정복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목탑을 세우기로 결정했지만 신라에는 9층의 목탑을 지을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그래서 백제의 기술력을 빌리기 위해 의자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백제에서는 ‘아비지’라는 기술자를 신라에 보낸다.

열심히 주춧돌을 닦고 기반을 만들면서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으면 정말 백제가 멸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아비지는 더 이상 목탑을 짓지 않기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변이 깜깜해지더니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노승이 다가오더니 그 가운데 기둥을 세울 큰 돌을 올려놓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본 아비지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완성하는 것이 하늘이 뜻이라고 생각해 끝까지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짓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불탑을 왜 만들까?

불탑 안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어서 부처님의 무덤 역할을 한다.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면 9개의 나라를 정복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등 나라들이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정해진 나라가 실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가 생각했던 완전한 수가 9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보다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그 이후에도 잘 보존되어 오다가 몽골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후로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 목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1964년 12월, 도굴꾼들이 황룡사 구층 목탑에 있었던 자리의 주춧돌, 심초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들어올리자 그곳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의 사리라고 한다.

이 사리함들 중에는 ‘찰주본기’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을 중수할 때 왕들이 넣었던 것이라 한다.

이 찰주본기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만들게 된 경위와 어떤 방식으로 고쳤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조금 더 놀라운 것은 찰주본기에 쓰여져 있는 내용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 찰주본기 외에도 많은 사리함과 사리갖춤 도구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던 황룡사는 진흥왕때 지어졌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이 즉위하고 19살이 되던 해에 궁궐을 크게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궁궐을 지으려고 하는데, 막 지으려는 과정에서 황룡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궁궐이 아닌 절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여 17년동안 황룡사를 지었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구층 목탑 외에도 거대한 유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서 거대한 불상이 있었는데, 이 불상은 인도의 아소카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많은 재료를 들여서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소카왕은 재료를 모아 배로 떠나보내면서 ‘인연이 닿는 곳에서 완성하기를 기원한다’ 고 했다고 한다. 이 배가 닿은 곳이 신라의 울산항…

울산항에서 이 배를 발견한 관리가 진흥왕에게 알렸고, 신라는 한 번에 이 불상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기원전 200년 전 왕이고, 진흥왕은 기원후 500년 대의 왕으로 두 왕 사이에는 700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불상의 높이는 5m에 달하고 동으로 제작했지만 겉을 다 금박으로 칠해서 굉장히 크고 화려한 불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불상 또한 안타깝게도 몽골침입 시기에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에는 이외에도 거대한 종이 있었다. 성덕대왕 신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종의 4배에 달하는 종이 황룡사에 있었다고 한다.

​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금당을 장식하는 건물의 치미의 길이와 넓이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에서 이렇게 큰 치미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서 황룡사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는 황룡사는 불에 타 주춧돌만 남아있지만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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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 박진호의 문화재 디지털 복원 ...

각 층에는 상층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계단은 경사도가 큰 사다리 형식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단은 김극기의 시(詩)에도 잘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각 층을 나선모양으로 크게 감아 돌면서 9층까지 연속적인 동선을 구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층 이상의 각 층에는 난간(欄干)이 설치되었다. 2층부터 9층까지 이렇게 난간이 매 층마다 설치되었는데 만자(卍字)살을 사용한 구편란간(勾片欄干)이었다. 황룡사 목탑의 9층 문을 열고 난간으로 나가면 당시 신라왕궁의 웅장한 면모를 관람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김동현의 복원안을 기준으로 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의 고증 근거는 다음과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총 9층의 목탑 구조로 2중의 탑구(塔區)를 가진 높은 단층기단 위에 세워졌었다. 평면은 사방 7칸으로 구성됐다. 탑신은 수평방향으로 각 층 및 각 주칸이 균일하게 체감되는 의장적 특징을 가지며, 그 체감 비율은 경주 탑골바위 마애 9층탑이나 불일사 출토 금동 9층 소탑의 비율과 유사하게 1층에서 9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 정도는 조금씩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양 구인사 소장 청동 9층탑도 좋은 참고가 된다.

하지만 황룡사 복원 사업은 거센 논란의 한 가운데 있다. 당시 건물이나 목탑의 모양, 건축 양식 등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증거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목탑은 뜨거운 감자다. 목탑이 21세기형으로 ‘중창’ 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건축 양식을 고증할 길이 없으니 복원이든 중건이든 ‘말살’이라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 있다. 복원이란 ‘원래 상태로 복구한다’는 뜻인데,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너무도 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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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않지만 가장 유명한 절, 황룡사 9층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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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주변국 통일 서원 담은 동아시아 최대 목탑

▲ 디지털로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 전경.

정부 30년간 3조원 투입

올해부터 향후 30년간 3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하게 될 경주 역사문화도시 사업의 핵심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옛 모습 복원이다. 신라시대 최고 고층 건물이 있었던 황룡사 복원을 시작으로 2000년 전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 유적 뿐 아니라 도로ㆍ건물 등 시가지도 리모델링한다.

이 사업의 하이라이트는 몽골 침입 때 불탄 황룡사와 9층 목탑의 복원. 복원에는 국비 1,527억 원을 포함해 지방비 654억 원 등 총 2,181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경주시민을 상대로 복원이 시급한 문화재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황룡사 및 9층 목탑이 33.5%를 차지해 1순위로 꼽혔다.

선덕여왕 건립, 몽고 침입 때 전소

9층 목탑이 복원되면 경주를 찾는 이들은 높이 80m가 넘는 탑을 만나볼 수 있게 된다. 또 신라시대의 주막에서 막걸리를 들이키며 1000년 전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 서라벌로 되돌아 가보는 추억여행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라 선덕여왕은 재위 12년(AD 643),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 스님의 권유로 외적의 항복을 받겠다는 서원을 담아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9층 목탑 건립을 시작했다. 탑의 각 층은 신라를 위협하는 9개의 나라들을 상징하고 있는데, 645년에 완공됐다.

탑의 높이는 무려 82m. 동시대 유럽이나 중국에도 이같은 높이의 초대형 목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AD 7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은 신라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경주시 한복판에 무려 600년 가까이 꼿꼿이 서있던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고종 25년(AD 1238)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황룡사 터에는 탑에 대한 안내판과 주춧돌만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동양 최대 규모라는 황룡사를 지금은 찾는 사람도 위치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해당 분야의 전문학자라 하더라도 이 황량한 대지 위에 있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의 존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렇듯 지금의 9층 목탑을 쌓았던 64개의 초석만으로는 82m(225척)의 웅장한 목탑을 상상하기 힘들다. 현존하는 목탑 중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중국 산서성 ‘응현 5층 목탑’(1056년 요나라 때 조성, 기단 포함 67m)을 능가하는 높이다. 많은 이들이 9층 목탑의 복원을 소망하는 것도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짐작되는 중국불교의 규모를 능가하는, 선조들의 위대한 기상이 그립기 때문은 아닐까?

7년 전 일본 나라시(市)에 갔을 때 법륭사 5층 목탑을 바라보면서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나라에는 왜 목탑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지 정말 아쉬웠다. 물론 숱한 전란을 겪으며 소실된게 목탑 뿐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디지털 복원은 실제가 아니라 언제든지 새로운 이론이, 혹은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수정 가능하다. 때문에 실제 복원 작업을 하기 전에 선행은 필수적이다. 수 천 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물을 세워놓고 잘못 세웠다며 다시 부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실제 황룡사 건축물을 짓기 전에 디지털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복원안 11개로 혼란 가중

하지만 황룡사 복원 사업은 거센 논란의 한 가운데 있다. 당시 건물이나 목탑의 모양, 건축 양식 등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증거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목탑은 뜨거운 감자다. 목탑이 21세기형으로 ‘중창’ 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건축 양식을 고증할 길이 없으니 복원이든 중건이든 ‘말살’이라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 있다. 복원이란 ‘원래 상태로 복구한다’는 뜻인데,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너무도 빈약하다.

물론 앞으로 10년간 황룡사 복원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실질적인 건축으로 이어지는 복원은 2017년이 돼야 시작해 2035년쯤 마치는 등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은 세워놓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1929년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처음 목탑 복원안을 만든 이래 지금까지 11개의 목탑 복원안(아래 표 참조)을 내놓아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독립기념관 등에 놓여있는 모형도 모습이 달라 기준이 없다.

반대로 11개의 복원안이 나왔다는 얘기는 그 동안 목탑 복원안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이뤄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40년 간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진행됐고, 그 결과물로 학술논문이 다수 발표됐다.

11개의 복원안 중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했던 김동현의 복원안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황룡사 목탑 디지털 복원은 김동현의 복원안을 따랐다.

김동현 복원안으로 디지털 복원

김동현의 복원안을 기준으로 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의 고증 근거는 다음과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총 9층의 목탑 구조로 2중의 탑구(塔區)를 가진 높은 단층기단 위에 세워졌었다. 평면은 사방 7칸으로 구성됐다. 탑신은 수평방향으로 각 층 및 각 주칸이 균일하게 체감되는 의장적 특징을 가지며, 그 체감 비율은 경주 탑골바위 마애 9층탑이나 불일사 출토 금동 9층 소탑의 비율과 유사하게 1층에서 9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 정도는 조금씩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양 구인사 소장 청동 9층탑도 좋은 참고가 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의 평면은 모든 층이 사방 7칸인 방형 평면으로 구성됐다. 공포는 당시 유행하던 백제식 건축구조를 근거로 하앙식 공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입문은 좌우 목재판문(木材板門)이었고 창문은 직영창(直?窓)으로 디자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1층 출입구는 남쪽을 제외한 동ㆍ서ㆍ북쪽에 각각 한 곳의 출입구(門)를 두었다.

출입문이 설치되지 않은 주칸에는 하부에 토벽을 친 위에 직영창을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9층까지 층에는 각각 4면의 중앙칸에 외부 출입문을 설치하였으며, 출입문이 설치되지 않는 칸에는 겹겹이 직영창이 설치됐을 것이다.

각 층에는 상층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계단은 경사도가 큰 사다리 형식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단은 김극기의 시(詩)에도 잘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각 층을 나선모양으로 크게 감아 돌면서 9층까지 연속적인 동선을 구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층 이상의 각 층에는 난간(欄干)이 설치되었다. 2층부터 9층까지 이렇게 난간이 매 층마다 설치되었는데 만자(卍字)살을 사용한 구편란간(勾片欄干)이었다. 황룡사 목탑의 9층 문을 열고 난간으로 나가면 당시 신라왕궁의 웅장한 면모를 관람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의 최종적인 고증안이다. 따라서 이를 황룡사 9층 목탑 디지털 복원도 위에 설명한 김동현의 최종안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적용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AD 646년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던 황룡사 9층 목탑에 당시 신라를 둘러싸고 있던 9개의 나라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항복시키려는 염원이 담겼다면, 21세기에 세워질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의 9층은 문화의 힘을 통한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야 할 것이다.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지 20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다. 우리가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한다면 혹, 남북통일이 앞당겨지지는 않을까?

▲ 디지털로 복원한 경주 황룡사.

▲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관련 다양한 학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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