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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 – 나무위키

11 thg 11, 2022 — 통일신라 신문왕 대에 발생한 반란 모의 사건이다. 그러나 곧바로 진압되었으며, 이후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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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金欽突의 亂)은 신라에서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미상~681년 9월 25일(음력 8월 8일))이 파진찬(波珍湌) 흥원(興員: 미상~681년 9월 25일(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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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이라고 봐드리지 않습니다 l 신문왕 l 듀냐TV 핵심 in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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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흠돌란의 발생 – 우리역사넷

그러면 이때 진골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할 수 있었던 신문왕의 勢力基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문왕의 교서에서 股肱으로 표시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고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으나, 그 대체적인 것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들 수 있다. 무열왕계의 경우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보다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하여 王弟나 王子와 같은 혈연적인 측근을 中侍 등 행정기구의 요직에 임명한 사실에서0151)李基白, 앞의 책(1974), 162∼164쪽.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계의 경우 무열왕계와는 혼인을 통해서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뿐만이 아니라, 전제정치의 성립과정에서나 삼국통일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무열왕계를 도왔다는 사실에서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0152)申瀅植,<新羅 中代 專制王權의 展開過程>(≪汕耘史學≫4, 1990; 앞의 책, 1990, 129∼130쪽). 이들이 신문왕대에 있어서 고굉이었다는 사실은 김흠돌란이 진압된 이후 신문왕 3년(683)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임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살필 수는 없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라는 것은 愷元이나 三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김춘추과 김유신의 아들인 것이다.0153)개원과 무열왕과의 관계는 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 앞의 책(1974), 162쪽를 참조할 것. 삼광과 김유신과의 관계는≪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개원과 삼광과 함께 언급되는 文潁의 경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대백제전에서 기일을 어겼다고 그를 斬하려고 했을 때 김유신이 목숨을 구해준 점에서(≪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김유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김흠돌세력과 무열왕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문무왕은 유조를 통하여 그의 뒤를 잇는 신문왕에게 자신의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죽음과 신문왕의 즉위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0149)한편 문무왕말 김흠돌세력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문무왕 10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흥원의 관등이 김흠돌란 당시에 더 높아졌다든지, 오랫동안 저지되었던 군관의 상대등 임명이 20년 2월에 이루어지고 있다든지, 문무왕 19년(679) 8월 중시 天存의 사망 이후 신문왕 3년(683)에 이르기까지 중시가 임명되고 있지 않은 사실 등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義相이 문무왕 20년 왕에게 王京의 城을 수축하지 말라고 諫하고 있는 것도 당시 진골귀족세력의 움직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가 한다.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사후 한층 강력히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신문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에 미리 대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문왕 즉위 직후 단행된 군관의 상대등 교체와 왕비의 無子出宮은 그것을 더욱 촉진시켜 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 김흠돌을 중심으로 한 진골귀족세력이 세력회복을 노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일어난 김흠돌란이었다. 문무왕이 7월 1일에 죽었으니 신문왕이 즉위한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시기에 이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0150)金欽突亂에 대하여는 金壽泰,<新羅 神文王代 專制王權의 확립과 金欽突亂>(≪新羅文化≫9, 1993)을 참고. 그러나 김흠돌세력의 이러한 움직임과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흠돌의 경우 그의 활동은 문무왕대에 들어와서야 찾을 수 있다. … 군관이 물러난 후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을 통해서 군관에 대한 무열왕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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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tle Website: 2) 김흠돌란의 발생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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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史야사TV] 신라 최고의 미저리 김흠돌 l 천일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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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흠돌란의 발생

무열왕계의 전제정치의 확립을 지향한 문무왕의 집중적인 왕권강화작업은 필연적으로 진골귀족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정치개혁은 결국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진골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골귀족들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갖고 새로운 모색을 꾀하였다. 즉 진골귀족세력은 당시 太子妃의 父였던 金欽突을 중심으로 뭉쳐나갔는데, 이를 김흠돌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흠돌세력에는 김흠돌을 중심으로 金軍官·興元·眞功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김흠돌의 경우 그의 활동은 문무왕대에 들어와서야 찾을 수 있다. 김흠돌은 문무왕의 즉위초부터 大幢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고구려정벌에도 참여하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김흠돌의 정치적 경력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무왕 5년(665)이후 太子妃로 그의 딸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흠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김군관의 경우0139)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앞의 책, 1974, 107쪽)에서는 김군관이 김흠돌에 대하여 그 지지자도 반대자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왕이 김군관을 처형한 것이 귀족세력 전체에 대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기백의 말을 따른다면, 그 역시 김흠돌세력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문무왕 원년부터 장군으로 활약한 이후 계속해서 군사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군사적 활동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그가 병부령을 역임한 사실일 것이다.0140)김군관이 병부령에 임명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眞珠가 제거된 문무왕 원년(661) 이후의 일일 것으로만 생각된다. 더욱이 그는 문무왕 20년(680)에는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에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흥원이나 진공의 경우는 문무왕 8년에서 11년 사이에 그들의 활동을 찾아볼 수 있다. 흥원은 문무왕 8년 罽衿幢摠管이 된 이후 군사적으로 활동하다가 10년 면직된 바 있는 인물이다. 진공의 경우 장군의 경력이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당시 군사적으로 활동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알 수 있는 김흠돌세력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살펴본다면, 우선 이들이 문무왕대 활동한 대표적인 진골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신문왕이 그의 敎書에서 이들의 정치적 출세가 이들의 재능 보다도 王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언급한 사실에서나, 김군관의 경우 班序, 즉 문벌로0141)李基白, 앞의 책(1974), 96∼97쪽. 상대등이 될 수 있는 어떤 서열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승진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쉽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김흠돌세력의 정치적 성격이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의존하고 있는 진골귀족임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들이 삼국통일전쟁기에 군사적으로도 크게 활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김흠돌·흥원·김군관 등이 모두 장군의 경력을 가진 인물이라든지, 김흠돌의 경우 6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대인 대당의 장군을, 군관의 경우 장군 및 군사관계로 최고의 관직인 병부령을 역임한 사실에서 쉽게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력이 군사적으로도 당시에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이들 세력은 문무왕대 정치와 군사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진골귀족세력으로서, 문무왕과는 그 정치적 성격을 달리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작용하는 세력이었다. 이는 김흠돌세력이 “능히 始終을 삼가하거나 富貴를 보전하지 않고 … 官僚를 모멸하고 上下를 속이어 매일 그 無厭의 뜻을 나타내고 포학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凶邪한 자를 불러들이고 近臣과 결탁하여 禍가 內外에 통하고 같은 惡人들이 서로 도와 期日을 約定한 후 亂逆을 행하려 하였다”0142)≪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원년 8월.는 사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들 세력은 무엇보다도 문무왕의 가장 중요한 세력기반의 하나인 관료를 모멸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흠돌세력이 문무왕대의 관료세력과 충돌·대립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관료들이란 문무왕의 왕권에 기생하고 있었던 새로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흠돌세력은 관료들의 정치적 성장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가졌으며, 그 결과 관료세력과 충돌·대립하는 등 무열왕계가 추진하는 전제정치의 확립을 방해하였던 것이다.0143)기존의 연구에서는 전제정치하에서 관료세력의 성장이 진골귀족세력과의 충돌 대립보다는 골품제와의 일정한 타협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李基白,<新羅 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 앞의 책, 1974, 230∼231쪽 및 李基東, 앞의 책, 142쪽). 때문에 중대의 관료제가 처음부터 기존의 신분체제인 골품제의 기반위에서 성립되어 그와 마찰되지 않는 한계내에서 운영 전개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정치 사회에서 관료제가 순조롭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더욱이 景德王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나마 왕권에 기생하면서 발전하고 있던 관료제는 더 이상의 전개가 억제되고 말았다고 한다(李基東, 위의 책, 142쪽).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역시 관료세력이 진골귀족과의 일정한 충돌 대립과정을 거침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전제정치하의 관료세력의 성장이란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입각한 진골귀족의 세력약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에 골품제적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진골귀족세력과 왕권에 기생 발전하는 관료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무왕은 김흠돌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귀족세력의 정치적 활동을 크게 제약하는 등 이들을 소외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우선 김흠돌의 경우 그의 女가 태자비로 들어간 후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살필 수 있다. 왜냐하면 중대 전제정치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역대의 왕들에게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강하게 나타나서, 심지어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를 出宮시키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서슴치 않았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0144)李基白, 앞의 글(1982), 312쪽. 그것은 景德王의 예에서 확인이 된다고 한다. 그녀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으로 인하여 태자비로서, 신문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왕비로서의 지위가 매우 불안정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0145)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神文王에 의하여 왕비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출궁되자 그것에 반발한 金欽突이 자기세력의 약화를 우려하여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李丙燾,≪韓國史≫古代篇, 645쪽·李基白, 앞의 책(1974), 106쪽, 및 井上秀雄, 앞의 책(1974), 455쪽 등). 그러나 金相鉉·辛鍾遠은 그보다는 父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金相鉉,<萬波息笛說話의 形成과 意義>,≪韓國史硏究≫34, 1981, 14쪽 및 辛鍾遠,<新羅 五臺山事蹟과 聖德王의 卽位背景>,≪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103쪽).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비가 사실상 출궁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왕비의 無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태자비의 無子란 바로 문무왕대 김흠돌의 정치적 위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흥원의 경우 비교적 분명하다. 문무왕 10년(636) 흥원이 참여한 전역에서 흥원 역시 일정한 공로를 거둔 것으로 파악됨에도 불구하고 일시 퇴각한 일로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형을 받을 뻔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그는 사형은 받지 않았지만, 면직됨으로써 정치적 활동이 좌절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흥원은 무열왕계에 반대하는 진골귀족으로서 김흠돌란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군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군관의 상대등 임명과 관련하여 살필 수 있다. 군관의 상대등 임명은 김유신이 사망한 문무왕 13년 이후 거의 7년이란 오랜 공백기간과 함께0146)上大等 金庾信이 죽은 문무왕 13년 7월 이후부터 20년 2월까지의 기간이다. 이루어진 임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군관의 상대등 임명이 문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상대등 임명이 오히려 오랫동안 저지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군관은 임명된 후 약 1년이 조금 지난 시기인 신문왕의 즉위와 함께 바로 내쫒겨졌다는 사실로 보아 그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군관이 물러난 후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을 통해서 군관에 대한 무열왕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신문왕의 즉위 직후 임명된 眞福은 문무왕대의 中侍 역임자로서, 중시 출신으로 상대등에 임명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시 출신의 상대등 임명은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것은 상대등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전제왕권의 정치적 목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0147)李基白, 위의 책, 104쪽에서 중대 상대등의 지위변화는 김유신의 상대등 임명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시와 상대등을 이제까지의 대립관계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진골귀족의 성격을 귀족적인 것보다는 왕권에 복속하는 존재로서 관료화시키려는 의지로까지 해석되는 것이다.0148)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합집, 1964 ; 위의 책, 169∼170쪽). 진복의 상대등 임명은 역시 군관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군관이 문무왕과 신문왕에게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문무왕의 왕권강화로 인하여 이처럼 정치적으로 소외된 진골귀족들도 나름대로의 새로운 모색을 꾀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진골귀족세력은 일정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이때 태자비의 父로서 당시 대표적인 진골귀족이었던 김흠돌이 자연스러이 부각되었을 것이며, 김흠돌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와 함께 소외된 진골귀족세력을 상징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김흠돌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진골귀족들은 무열왕계의 왕권에 도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김흠돌세력과 무열왕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문무왕은 유조를 통하여 그의 뒤를 잇는 신문왕에게 자신의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죽음과 신문왕의 즉위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0149)한편 문무왕말 김흠돌세력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문무왕 10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흥원의 관등이 김흠돌란 당시에 더 높아졌다든지, 오랫동안 저지되었던 군관의 상대등 임명이 20년 2월에 이루어지고 있다든지, 문무왕 19년(679) 8월 중시 天存의 사망 이후 신문왕 3년(683)에 이르기까지 중시가 임명되고 있지 않은 사실 등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義相이 문무왕 20년 왕에게 王京의 城을 수축하지 말라고 諫하고 있는 것도 당시 진골귀족세력의 움직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가 한다.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사후 한층 강력히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신문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에 미리 대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문왕 즉위 직후 단행된 군관의 상대등 교체와 왕비의 無子出宮은 그것을 더욱 촉진시켜 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 김흠돌을 중심으로 한 진골귀족세력이 세력회복을 노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일어난 김흠돌란이었다. 문무왕이 7월 1일에 죽었으니 신문왕이 즉위한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시기에 이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0150)金欽突亂에 대하여는 金壽泰,<新羅 神文王代 專制王權의 확립과 金欽突亂>(≪新羅文化≫9, 1993)을 참고. 그러나 김흠돌세력의 이러한 움직임과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와 함께 진골귀족세력을 소외시킴으로써 일어난 김흠돌란에 대하여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다. 신문왕의 교서는 김흠돌란이 발생한 이후 20여 일에 걸쳐서 행해진 신문왕의 수습과정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즉 “枝葉까지 샅샅이 찾아서 모두 이미 죽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의 가담자들까지도 이를 철저히 색출하여 살해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문왕은 이 기회를 통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려는 생각에서 그러한 과감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때 진골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할 수 있었던 신문왕의 勢力基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문왕의 교서에서 股肱으로 표시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고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으나, 그 대체적인 것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들 수 있다. 무열왕계의 경우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보다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하여 王弟나 王子와 같은 혈연적인 측근을 中侍 등 행정기구의 요직에 임명한 사실에서0151)李基白, 앞의 책(1974), 162∼164쪽.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계의 경우 무열왕계와는 혼인을 통해서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뿐만이 아니라, 전제정치의 성립과정에서나 삼국통일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무열왕계를 도왔다는 사실에서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0152)申瀅植,<新羅 中代 專制王權의 展開過程>(≪汕耘史學≫4, 1990; 앞의 책, 1990, 129∼130쪽). 이들이 신문왕대에 있어서 고굉이었다는 사실은 김흠돌란이 진압된 이후 신문왕 3년(683)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임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살필 수는 없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라는 것은 愷元이나 三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김춘추과 김유신의 아들인 것이다.0153)개원과 무열왕과의 관계는 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 앞의 책(1974), 162쪽를 참조할 것. 삼광과 김유신과의 관계는≪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개원과 삼광과 함께 언급되는 文潁의 경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대백제전에서 기일을 어겼다고 그를 斬하려고 했을 때 김유신이 목숨을 구해준 점에서(≪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김유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竹旨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집사부의 설치 이후 최초로 중시에 임명된 죽지는 김유신과 함께 무열왕계에 계속 협력하였는데, 그는 신문왕대에까지 冢宰로 머물렀다고 한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 총재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정치적 실권자의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한편 문무왕대 이후 계속 성장하고 있던 6두품 이하의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세력들도 신문왕의 주된 세력기반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관료들의 경우 문무왕이 왕권강화를 추진할 때 주된 세력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0154)문무왕의 遺詔도 여기에 참조가 된다. 문무왕은 官員들로 하여금 태자인 神文王을 도와주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이때 관원이란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왕의 김흠돌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바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으로부터 전제정치의 기반인 관료세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무왕대에 단행된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강화된 무열왕계의 세력기반은 김흠돌란에 대하여 철저한 숙청을 가할 정도로 그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김흠돌의 난]김흠돌의 어긋난 사랑으로 시작된 반란이 불러온 …

김흠돌은 당시 문무왕의 태자비를 흠모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태자비가 되기 전의 보룡의 딸인 그녀를 흠모하였다. 물론, 그 전에 참 많이도 치근덕 거렸다고 한다. 그것도 더 재미있는 사실은 본인의 정실도 아니고 첩으로 두려고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보룡의 딸이 김흠돌에게 관심이 있었을까? 집안도 괜찮고 곧 왕실의 주인이 될 몸이 한 정치가의 정실도 아닌 첩이…

이렇게 되니 짜증이 제대로 받은 김흠돌은 이렇게 문무왕에게 시집가버린 태자비를 씹어대고 심지어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직접 겁박까지 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부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무왕,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 힘도 없고, 유신 삼촌 생각하면 무서워 자다가도 깨는데 그런 심약한 분인지라 흠돌이에게 지랄 한번을 못한다.

31 thg 10, 2016 — 신라 시대의 김흠돌의 난에 대해서 혹시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자 진골 귀족 중 하나인 신라의 건국에 공을 세운 김유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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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한국사]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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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김흠돌의 어긋난 사랑으로 시작된 반란이 불러온 신문왕의 전제왕권

김흠돌은 당시 문무왕의 태자비를 흠모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태자비가 되기 전의 보룡의 딸인 그녀를 흠모하였다. 물론, 그 전에 참 많이도 치근덕 거렸다고 한다. 그것도 더 재미있는 사실은 본인의 정실도 아니고 첩으로 두려고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보룡의 딸이 김흠돌에게 관심이 있었을까? 집안도 괜찮고 곧 왕실의 주인이 될 몸이 한 정치가의 정실도 아닌 첩이…

이렇게 되니 짜증이 제대로 받은 김흠돌은 이렇게 문무왕에게 시집가버린 태자비를 씹어대고 심지어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직접 겁박까지 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부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무왕,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 힘도 없고, 유신 삼촌 생각하면 무서워 자다가도 깨는데 그런 심약한 분인지라 흠돌이에게 지랄 한번을 못한다.

김흠돌(金欽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이 때는 백제 잔민의 반란 진압이 급선무였고, 또한 군량미 보급이 주 임무여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서 김인문·김흠순(金欽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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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판 송민호, ′신문왕 – 겁♪’ | 설민석 한국사 강사 [어쩌다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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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공신들을 숙청한 신문왕 – 라봉봉

8 thg 1, 2019 — (김흠돌의 난인데 딱히 어떤 반란이거나 하는 기록은 없고. 김흠돌 역시 삼국통일전쟁 전쟁공신에 신문왕의 장인인데. 적극적인 왕권강화책을 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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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별개념2]_ 6-1 통일신라(전기) / 6강 고대(통일신라, 발해)|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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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흠돌의 난 < 김상현교수의 7세기 한반도 < 이전 ... - 법보신문

김유신계의 도움을 얻어 무열왕권의 출범을 본 무열왕의 백제정벌이 무열왕가의 명예회복을 위한 정치적 수단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이어 문무왕은 재위 21년간에 삼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무열왕권의 권위를 확립시켰다. 왕위계승이 성골왕족으로부터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 및 문무왕이 재위하는 동안은 골품제에 의한 어떤 형태의 반발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에는 별다른 반란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기가 통일전쟁이라고 하는 대외적인 관심에 집중되고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의 주역을 담당했던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등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한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이에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사전에 계획되어 추진되었던 이 난이 무열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 난은 김흠돌 등이 왕실 내부의 주요 관직에 있는 일부 귀족세력과 사전에 긴밀히 모의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당시 상대등(上大等)과 병부령(兵部令)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金軍官)까지 이 난에 관련되어 있었다. 흉악하고 사특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시(近侍)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가 안팎으로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정한 후에 반역을 행하려 하였다는 교서의 내용 등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집된 병사로 나머지 잔당을 토벌하는데 5일이 걸림으로써 사인이 놀라게까지 했던 사실은 이 반란 세력의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상대등 김군관은 김흠돌 등과 교섭하여 역모의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달 28일에 군관을 죽였다.

김흠돌의 난은 왕권에 도전하는 신라 중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 중의 하나였다. 정명(政明)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그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였다. 정명은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고, 이때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았다. 681년 7월 1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문무왕이 돌아간 1주일이 되는 7월 7일에 선왕의 구전(柩前)에서 왕위를 계승하고, 그 10일 후에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서 선왕을 장사지냈다. 8월 8일에 김흠돌(金欽突)·흥원(興元)·진공(眞功) 등이 난을 일으켰다. 장례를 치룬지 미처 한 달도 되기 전이었다. 이처럼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이 즉위하고 안정을 찾기도 전에 그 허를 노려 일어난 것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신문왕이 내린 교서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14 thg 12, 2011 — 신문왕의 장인이자 공신문무왕 죽자마자 곧 반란 혼란스런 왕실 허점 공격일부 고위관리·귀족 동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정치적인 개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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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한국사] 경찰시험 빈출! 신라 신문왕의 왕권강화 – 해커스 경찰학원 이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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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흠돌의 난

신문왕의 장인이자 공신

문무왕 죽자마자 곧 반란

혼란스런 왕실 허점 공격

일부 고위관리·귀족 동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정치적인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성골왕족에서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권에 대한 정당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사진은 경주시 배반동의 신문왕 능. 문화재청 제공

7세기 신라에는 세 차례의 반란이 있었다. 631년에 일어난 칠숙의 반란과 647년의 비담의 난, 그리고 681년의 김흠돌(金欽突)의 난이 그것이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던 왕이다. 왕 53년(631)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평왕은 이를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동시(東市)에서 목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석품은 백제로 도망가기 위해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몰래 총산(叢山)으로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서로 바꾸어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칠숙 등이 일으킨 반란의 원인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도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점에 유의하면 아마도 왕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진평왕의 맏딸 덕만(德曼)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곧 선덕여왕이다. 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의 침략을 받아 대야성 등 40여 성이 함락됨으로써 사직의 보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국가적 재난의 책임을 선덕여왕에게 돌리는 여론이 있었다. 여왕은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업신여겨 침략을 도모한다는 여론이었다. 선덕여왕 12년(643) 9월 신라 사신을 당에 파견해 원조를 청했다. 당나라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제시했던 계책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으니 주인을 잃고 도적을 불러들여 편안한 세월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 임금으로 삼되, 자신이 홀로 임금이 되기 어려우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를 하겠다. 그대 나라가 편안해짐을 기다려 그대들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게 하겠다.”

태종의 계책이란 신라를 병탐하려는 흉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그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난을 일으켰다. 여왕이 능히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담 등은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폐하려 했다. 반란군은 명활성에 주둔했고 김유신 등이 이끄는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치고 방어했다. 열흘 동안의 공격과 방어에도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고, 선덕여왕은 이달 8일 아직 난을 평정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갈문왕의 딸 승만(勝曼)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곧 진덕여왕이다. 이달 17일에 비담과 그와 연좌된 30명을 처형함으로서 이 난은 평정되었다.

김흠돌의 난은 왕권에 도전하는 신라 중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 중의 하나였다. 정명(政明)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그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였다. 정명은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고, 이때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았다. 681년 7월 1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문무왕이 돌아간 1주일이 되는 7월 7일에 선왕의 구전(柩前)에서 왕위를 계승하고, 그 10일 후에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서 선왕을 장사지냈다. 8월 8일에 김흠돌(金欽突)·흥원(興元)·진공(眞功) 등이 난을 일으켰다. 장례를 치룬지 미처 한 달도 되기 전이었다. 이처럼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이 즉위하고 안정을 찾기도 전에 그 허를 노려 일어난 것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신문왕이 내린 교서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상(喪)중에 서울에서 난이 일어날 줄이야 누가 생각인들 했겠는가. 사인(士人)을 놀라게 했으니, 우려하고 괴이하게 생각하는 마음 어찌 조석으로 잊을 수 있겠는가?”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 난은 김흠돌 등이 왕실 내부의 주요 관직에 있는 일부 귀족세력과 사전에 긴밀히 모의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당시 상대등(上大等)과 병부령(兵部令)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金軍官)까지 이 난에 관련되어 있었다. 흉악하고 사특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시(近侍)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가 안팎으로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정한 후에 반역을 행하려 하였다는 교서의 내용 등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집된 병사로 나머지 잔당을 토벌하는데 5일이 걸림으로써 사인이 놀라게까지 했던 사실은 이 반란 세력의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상대등 김군관은 김흠돌 등과 교섭하여 역모의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달 28일에 군관을 죽였다.

이 모반사건의 구체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없지만, 이 사건을 왕비의 무자(無子)로 인하여 장래 자기 세력의 고약(孤弱)함을 우려한 나머지 나온 행동, 혹은 왕비를 통해 그 지위를 획책했던 것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난의 성격으로 볼 때, 이 난의 원인이 단순히 장래 자기 세력의 고립과 약화를 우려했기 때문이나 왕비를 통한 그 지위를 획책한 것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난은 무열왕권을 부정하는 반란으로써 김흠돌 등이 신문왕의 즉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유신계의 도움을 얻어 무열왕권의 출범을 본 무열왕의 백제정벌이 무열왕가의 명예회복을 위한 정치적 수단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이어 문무왕은 재위 21년간에 삼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무열왕권의 권위를 확립시켰다. 왕위계승이 성골왕족으로부터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 및 문무왕이 재위하는 동안은 골품제에 의한 어떤 형태의 반발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에는 별다른 반란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기가 통일전쟁이라고 하는 대외적인 관심에 집중되고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의 주역을 담당했던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등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한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이에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사전에 계획되어 추진되었던 이 난이 무열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골 왕권에 대한 반발

난 진압 후 개혁 잇따라

귀족 세력의 약화 초래

전제왕권 확립하는 계기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후의 신문왕은 많은 정치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이는 물론 통일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인 추이와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김흠돌의 난과 같은 중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무열왕권의 정당화 및 그 강화에 따른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신문왕은 즉위하여 9년에 이르는 동안에 뚜렷한 정책변화와 관제의 정비를 통해 중대왕권의 확립을 꾀한다. 이 때문에 중대(中代)로의 사실상의 전환기는 신문왕 9년 전후라고 보는 견해는 설득력을 갖는다. 이때의 주요한 변화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대등(上大等) 및 병부령(兵部令)을 격하했다. 상대등과 병부령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이 김흠돌의 난과 관련하여 처형되었다. 김군관의 처형은 중대에 있어서의 상대등 자체의 운명을 결정지어 준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상대등 및 병부령의 지위가 달라졌음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귀족 세력 전반의 사회적인 저하를 의미하고 반대로 전제왕권의 확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권 확립을 위해 중앙관부를 정비했다. 위화부(位和府) 및 예작부(例作府)를 설치함으로써 14부(府)의 중앙관부를 일단 정리했다. 오묘제(五廟制)도 확립했다. ‘삼국사기’ 신문왕 7년(687) 4월조에는 대신을 선조의 사당에 보내어 제사를 드리며 말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옵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靈)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기록으로 당시에 오묘제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의 오묘제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그 정확한 년대를 알 수는 없다. 무열왕의 오묘제 시정 가능성을 추측하는 견해도 있고, 문무왕이 그 즉위 8년 11월 6일에 여러 신하와 함께 선조묘(先祖廟)에 배알했던 사실이 있음을 보면 이미 신문왕 이전에 오묘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문왕은 오묘제에서 요구하는 태조 및 고조·증조·조의 사친(四親)으로 오묘제를 확립시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난황음(政亂荒淫)으로 축출되었던 진지왕을 조묘에 봉사(奉祀)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동시에 무열왕권이 유지되던 신라중대의 전 시기를 통하여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불천(不遷)의 묘주(廟主)로 삼게 함으로써 무열왕가의 법통을 공식적으로 완결시켰다. 오묘제는 직접 자기 세계(世系) 조상을 제사하는 가묘제(家廟制)로서 가조적(家祖的) 성격이 농후한 것이라고 볼 때, 신문왕의 오묘제 확립은 무열왕가의 강화나 그 신분의 합리화에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방통치제도를 정비했다. 신문왕은 그 즉위 5년에 서원경(西原京)과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 완산주(完山州)와 청주(菁州)를 설치하여 9주 5소경의 제도를 갖추었다. 이는 고구려 및 백제 고토의 완전 장악과 지방의 통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전제왕권의 확립과 그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유교정치이념의 확립을 위해,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당나라에 ‘예기(禮記)’를 구하기도 했다. 신문왕은 그 9년에 중외관리(中外官吏)의 녹읍을 폐하고, 매년 조(租)를 차등 있게 내리는 것으로 상례로 삼게 했다. 이는 왕권의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조처로 간주된다.

▲김상현 교수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김흠돌의 반란, 통일 전쟁의 후유증 – 천년의 미소 – 티스토리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을 끝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의 상황이 계속되고, 당나라 또한 언제든지 또다시 침략해 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무신 진골귀족들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요. 태종 무열왕이 진골로 왕이 되면서,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진골의 수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진골이면 누구나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어요.

좀 복잡하지만 기존 사국유사와 삼국사기 그리고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참조해 알아보겠습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동생 정희 소생이고, 김유신의 딸 진광과 결혼했으니 김유신은 김흠돌에게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이 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김흠돌의 최고 뒷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태종 무열왕의 왕비인 이모 문명왕후입니다. 조카인 흠돌을 무척 아꼈나 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관계로 인해 자기의 딸이 정명 태자(신문왕)의 태자비가 되었어요.

난을 진압한후 주동자는 모두 처형하고, 동조했거나 방조한 신하들은 대거 숙청해 버립니다. 그동안의 걸림돌들을 한 번에 해결해 버린 셈입니다. 단 김유신 가문의 방계는 정도에 따라 정리를 하였지만 직계가족은 그대로 유지했는 것 같습니다. 김유신의 아들 삼광은 신목 왕후를 궁궐로 데려오는 과정에도 나오고, 지소 부인에 대한 후한 대우도 역사서에 기록되는 걸 보면 김유신의 후광과 명성은 어찌할 수도 없었겠지요.

4 thg 12, 2021 —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김흠돌. 김흠돌의 난을 이해할려면 먼저 김흠돌의 가계를 살펴보는 것이 제일 빠를 것 같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기존 사국유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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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신문왕의 신라 비하인드 스토리 | 설민석 한국사 강사 [어쩌다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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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반란, 통일 전쟁의 후유증

김흠돌의 반란은 신문왕이 즉위할 때에 일어난 반란으로 이후 통일신라는 체제 정비를 통해 확고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럼 오늘은 김흠돌의 반란이 일어난 배경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을 끝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의 상황이 계속되고, 당나라 또한 언제든지 또다시 침략해 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무신 진골귀족들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요. 태종 무열왕이 진골로 왕이 되면서,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진골의 수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진골이면 누구나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어요.

김흠돌 친인척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김흠돌

김흠돌의 난을 이해할려면 먼저 김흠돌의 가계를 살펴보는 것이 제일 빠를 것 같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기존 사국유사와 삼국사기 그리고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참조해 알아보겠습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동생 정희 소생이고, 김유신의 딸 진광과 결혼했으니 김유신은 김흠돌에게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이 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김흠돌의 최고 뒷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태종 무열왕의 왕비인 이모 문명왕후입니다. 조카인 흠돌을 무척 아꼈나 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관계로 인해 자기의 딸이 정명 태자(신문왕)의 태자비가 되었어요.

이는 신라왕가와 최고의 귀족인 김유신 집안 양대 가문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화랑 세력까지 장악한 김흠돌

화랑들은 항상 신라를 지키는 훌륭한 버팀목이었지요. 전쟁에 참가해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물론,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화랑에서 나왔습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라 할만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김유신이 살아있을 때에는 어느 정도 통제가 되었지만 김유신 사후에는 김흠돌 중심의 가야 세력들이 화랑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27대 풍월주인 김흠돌은 26대 풍월주인 진공으로 부터 물려받았는데, 반란의 동참자 진공은 흠돌의 누나인 흠신과 결혼하여 흠돌의 매형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 후 왕권파인 오기와 원선이 잠깐 풍월주가 되지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이후 풍월주는 사위 천관, 아들 흠언, 조카 신공이 이어받으면서 완전히 김흠돌의 사병화가 됩니다.

화랑은 원래 준군사조직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한명의 화랑 밑에 낭두, 낭도들이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을 거느립니다. 이런 화랑들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큰 힘이 되겠지요.

비대해진 진골귀족에 대한 경계

남부러울게 없던 김흠돌의 권력에 드디어 하나 둘 변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통일된 더 크고 넓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왕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왕권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래서 문무왕은 진골귀족에 대한 견제와 왕권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서서히 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핵심은 인사이지요. 김흠돌의 사람들을 요직에서 제외하려고 합니다.

자식을 낳지못하는 태자비

김흠돌의 딸인 태자비 김 씨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어요. 또한 정명 태자도 태자비 김 씨를 아끼지 않았지요. 오히려 형 소명 태자비로 내정되었던 김흠운과 요석공주의 딸을 더 가까이합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신문왕의 왕비가 되는 신목 왕후입니다. 이에 흠돌은 더 불만이 쌓이게 되겠지요.

문명왕후의 죽음

그리고 그동안 김흠돌의 든든한 배경이었던 이모 문명왕후의 죽음은 김흠돌에게는 그동안 저지른 여러가지 죄가 많기에 불만을 넘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뭔가를 해야 할 시기가 되었지요.

반란의 시작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김흠돌은 문무왕이 드디어 병석에 눕자, 정명태자를 제치고 문무왕의 후비인 신광(김유신의 딸)의 소생 인명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에 문무왕비 자의 왕후는 북원에 있는 오기 공(김대문의 아버지)을 불러 들어 왕실 호위를 맡기고, 서불한 진복을 동원합니다.

이미 자의왕후와 정명 태자, 그리고 죽기 전의 문무왕은 예견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빨리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예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문무왕은 정명 태자에게 내가 죽거든 내 시신 앞에서 즉위하라고 유언을 할 정도로 김흠돌의 반란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흠돌, 진공, 흥원은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에워싸고 시위하였지만, 왕권파인 오기, 진공 등의 발 빠른 대처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지요.

결과

난을 진압한후 주동자는 모두 처형하고, 동조했거나 방조한 신하들은 대거 숙청해 버립니다. 그동안의 걸림돌들을 한 번에 해결해 버린 셈입니다. 단 김유신 가문의 방계는 정도에 따라 정리를 하였지만 직계가족은 그대로 유지했는 것 같습니다. 김유신의 아들 삼광은 신목 왕후를 궁궐로 데려오는 과정에도 나오고, 지소 부인에 대한 후한 대우도 역사서에 기록되는 걸 보면 김유신의 후광과 명성은 어찌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제까지의 화랑제도를 폐지해 버립니다. 남은 화랑들은 병부에 귀속시켜 화랑들을 다시는 사병화할수없게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과감하게 정리해 버리네요.

마지막으로 김흠돌의 딸, 왕비 김씨를 내쫓아버립니다.

역사에 거론되는것보다는 훨씬 싱겁게 난이 끝나므로, 어떤 학자들은 반란을 조장했다거나, 방관하였다가 일거에 정리했다거나 여러 가지 설이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문무왕, 자의 왕후, 그리고 신문왕은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를 동원하는 과정, 난을 처리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여튼 이 반란이 일어난후 신문왕은 과감한 개혁과 왕권강화 정책을 실시해 일사천리로 신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킵니다. 모든 분야에서 능숙하게 처리하는 신문왕은 완전히 준비된 왕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김흠돌의 난 – Wikiwand

8 thg 8, 2022 — 김흠돌의 난 은 신라에서 681년 소판 김흠돌 )이 파진찬 흥원 ), 대아찬 진공 )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신라 의 왕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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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 – 한국사 공부할 땐 히스토링

신라 신문왕(神文王)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681년(신문왕 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 사건.

김흠돌의 난

신라 신문왕(神文王)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681년(신문왕 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 사건. 김흠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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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문왕(神文王)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681년(신문왕 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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