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에 대한 기사를 찾고 있습니까 “동궁 과 월지“? 웹사이트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전체 정보를 제공합니다 https://c1.castu.org 탐색에서: 새로운 상위 849 가지 팁 업데이트. 바로 아래에서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찾고 있는 주제를 더 잘 이해하려면 끝까지 읽으십시오. 더 많은 관련 검색어: 동궁 과 월지 동궁과 월지 야경 시간, 동궁과 월지 소개, 동궁과 월지 가는 법, 동궁과 월지 야간개장, 동궁과 월지 역사, 동궁과 월지 나무위키, 동궁과 월지 만든 사람, 동궁과 월지 입장료
Table of Contents
동궁과 월지 – 나무위키:대문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는 일종의 유원지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
- Source: namu.wiki
- Views: 67409
- Publish date: 6 hours ago
- Downloads: 18708
- Likes: 8294
- Dislikes: 2
- Title Website: 동궁과 월지 – 나무위키:대문
- Description Website: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는 일종의 유원지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
- Source: Youtube
- Views: 87251
- Date: 31 minute ago
- Download: 72162
- Likes: 6598
- Dislikes: 5
동궁과 월지 – 경주문화관광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무왕 14년(674)에 연못인 ‘월지’가 조성되었고, 삼국통일이 완성된 이후인 679년에 ‘동궁’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동궁내의 ‘임해전’은 연희, 회의, 접대 장소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 무리가 있는 연못이라 하여 ‘안압지’라 불렀는데,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 있던 자리다.
연희장소로 쓰인 ‘임해전(臨海殿)’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연못 월지의 조경이 바다를 표현했다는 것을 에둘러 짐작할 수 있다.
- Source: www.gyeongju.go.kr
- Views: 44198
- Publish date: 13 hours ago
- Downloads: 74988
- Likes: 4485
- Dislikes: 10
- Title Website: 동궁과 월지 – 경주문화관광
- Description Website:
- Source: Youtube
- Views: 89577
- Date: 21 minute ago
- Download: 75840
- Likes: 2975
- Dislikes: 5
경주야경 제 1의 명소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동궁과월지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 무리가 있는 연못이라 하여 ‘안압지’라 불렀는데,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 있던 자리다.
그래서 2011년 ‘동궁과 월지’라는 제 이름을 찾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무왕 14년(674)에 연못인 ‘월지’가 조성되었고, 삼국통일이 완성된 이후인 679년에 ‘동궁’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동궁내의 ‘임해전’은 연희, 회의, 접대 장소로 활용되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조경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인 월지는 남서쪽의 둘레는 직선인데 반해 북동쪽은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못의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없어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연희장소로 쓰인 ‘임해전(臨海殿)’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연못 월지의 조경이 바다를 표현했다는 것을 에둘러 짐작할 수 있다.
동궁과 월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3]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3]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3]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3]
이에 따라 현재는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이다.
연못의 발굴조사는 연못 호안의 석축유구를 확인하는 것과 출토유물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발굴에 앞서 동궁과 월지의 주변은 현황대로 기록되었고, 이 실측도에 따라 먼저 연못 서안西岸으로부터 남북 폭 2.5m의 트렌치 120개소를 설정하였다. 발굴조사는 설정된 트렌치 구간에서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와 함께 연못 전 구역에 동서 및 남북 의 기준점 및 기준선 설정 측량작업도 이루어졌다. 기준점은 남북 및 동서가 각 10m로 구획되어 10m 방안이 되도록 하였다. 방안으로 구획된 각 트렌치 사이에는 1m폭의 둑을 남기고 서안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 트렌치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연못 호안주변에서 석축이 노출되기 시작하여 알 수 없었던 호안석축의 축조공법과 그 내용이 확인되었다.[12]
- Source: ko.wikipedia.org
- Views: 14947
- Publish date: 12 hours ago
- Downloads: 89472
- Likes: 643
- Dislikes: 5
- Title Website: 동궁과 월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왜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을까? 호수는 저절로 생겨났을까? |포항MBC 211007 전국시대 방송
- Source: Youtube
- Views: 38739
- Date: 3 hours ago
- Download: 54905
- Likes: 6451
- Dislikes: 3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 영어: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경주 월성의 별궁 터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예전엔 안압지(雁鴨池)로 불렀다가, 유물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명칭 [ 편집 ]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1]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현지 안내문 [ 편집 ]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3]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3]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3]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3]
역사 [ 편집 ]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이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이에 건축한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곳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던 곳이다.
사료에서의 언급 왕조 연도 기록 문무왕 14년 2월 674 二月宮內穿池造山種花草養珍異禽獸
궁 내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이한 금수를 길렀다 문무왕 19년 8월 679 創造東宮始定內外諸門額號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 6년 9월 697 宴君臣於臨海殿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덕왕 11년 8월 752 東宮衙景德王十一年置上大舍一人次大舍一人
동궁아를 경덕왕 11년에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 혜공왕 5년 3월 769 燕君臣於臨海殿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성왕 2년 4월 800 暴風木折蜚瓦臨海仁化二門壞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 5년 7월 804 重修臨海殿新作東宮萬壽房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헌덕왕 14년 1월 822 以母弟秀宗爲副君入月池
동복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 문성왕 9년 2월 847 重修平議臨海二殿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안왕 4년 9월 860 王會君臣於臨海殿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경문왕 7년 1월 867 重修臨海殿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강왕 7년 3월 881 燕君臣於臨海殿酒桿上鼓琴左右進歌詞極歡而罷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 경순왕 5년 2월 931 太祖率五十餘騎至京畿通謁王與百官郊迎入宮相對曲盡情禮置宴於臨海殿
태조가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 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
발굴 [ 편집 ]
일제 강점기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일제 강점기 입니다.
동궁과 월지 부근에 대한 최초의 조사 자료는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1929년부터 2주 동안 경주의 신라시대 도성지와 사지를 조사한 내용을 담은 《조선건축사론》에 실려 있다. 이 때 월성의 건축에 대한 내용에서 안압지와 임해전지에 대해 간단히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월지에 접한 건물지 1동을 임해전지로 비정하고 신라시대 궁전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예 로 언급하였으며, 임해전지와 안압지를 《삼국사기》 기사에 등장하는 동궁이나 월지와 구분하여 병렬적으로 나열하였다.[5][6]
1970년대 [ 편집 ]
동궁과 월지의 항공사진. A 건물지가 표시되어 있다.
안압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경주시는 당시 방치되어있던 안압지를 1974년 11월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 때 경주사적관리소가 담당하여 호수 중심부에 2 m 가량의 트렌치를 내고 조사를 실시한다.[6] 그러나 조사 도중 12월 16일에 명문 기와 등 다량의 신라시대 유물이 드러나게 되고,[7] 문화재위원회 및 문화재 관리국에 이를 보고하여 경주고적발굴단이 1975년 3월 24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6]
발굴조사는 크게 연못에 대한 조사와 연못 주변 건물지 조사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연못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 24일부터 다음 해인 1976년 3월 25일까지 만 1년간 지속되었으며, 연못 주변 건물지 발굴조사는 1976년 5월 10일부터 그 해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6] 이 때의 발굴 내역은 1978년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로 출판되었다.[8]
월지 서편과 남편에서 일련의 건물지들이 확인되었으며, 이 때 서편의 A건물지에 대한 발굴기록을 정리한 것이 2018년에 보고서로 발간되었다.[6]
21세기 [ 편집 ]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현황 및 구역별 위치도
200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동궁과 월지 북동쪽 일대에 대한 중장기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그 결과 동궁과 월지의 영역과 동궁 내 대형 건물지군, 담장, 배수로 등 동궁 관련 시설을 확인하였다.[9] 이중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성과를 2012년과 2014년에 각각 《경주 동궁과 월지 Ⅰ》과 《경주 동궁과 월지 Ⅱ》로 공개하였다.[10]
2020년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 Ⅲ》보고서에서 동궁과 월지 북동쪽 지역 중 ‘가’지구에 대한 조사내역을 발표하였다.[10]
‘가’지구는 약 6,500m2 면적으로, 월지 북동쪽으로 지나가는 동해남부선 철로 북쪽 공간에 해당한다. 남북 담장을 중심으로 2기의 대형 적심 건물지와 깊이 10m가량의 대형 우물, 창고시설로 추정되는 줄기초[주해 1] 건물지 등이 발굴된 곳이다.[10]
《경주 동궁과 월지 Ⅲ》에는 ‘가’지구 안에 있는 담장으로 나눠진 공간들과 그 공간 안의 건축유구의 구조와 배치 등에 대한 조사 결과가 주를 이루었다. 크고 작은 건물지 40동과 담장, 우물, 배수로 등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각종 생활시설, 기와와 벽돌, 토기와 도기, 금속유물 등 591점의 선별된 유물이 수록됐다.[10]
특히, 조사구역 남쪽에서 확인된 29호 건물지는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함께 발굴되어 신라 왕궁의 화장실 유구인 것으로 확인됐다. 화장실 유구는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되어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주해 2]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변기형 석조물은 신라에서는 불국사에서, 백제에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이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1]
특히 고급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변기시설과 오물 제거에 수세식 방식이 사용된 점,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의 전돌(쪼개어 만든 벽돌)을 깔아 마감한 점에서 통일신라 왕궁에서 사용된 고급 화장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된다.[11]
‘가’지구에서 나온 인골의 DNA 조사와 분자유전학적 분석 결과, 같이 출토된 각종 동물(사슴, 개, 소, 남생이, 상어 등)의 뼈와 식물(밤나무, 복사나무, 잣나무, 참외 씨앗 등)의 유체 조사도 이루어졌다. 이로써 인골 분석을 통해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벼, 보리, 콩 등의 작물과 단백질을 얻기 위해 소, 개, 사슴 등을 섭취했던 결과를 확인하는 등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었으며, 동·식물유체 분석을 통해 인근에 서식하던 동물들과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주변 식생 등도 추정하였다.[10]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8년에 ‘가’지구에 대한 기본정비계획을 마련하여 해당 유적 내 중요 유구에 대한 정비·활용안을 관련 지자체에 제안한 바 있으며, 2020년부터 ‘나’지구 발굴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10]
유적 [ 편집 ]
월지 [ 편집 ]
월지의 바닥에 여러개의 트렌치가 조성되어 있다.
연못의 발굴조사는 연못 호안의 석축유구를 확인하는 것과 출토유물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발굴에 앞서 동궁과 월지의 주변은 현황대로 기록되었고, 이 실측도에 따라 먼저 연못 서안西岸으로부터 남북 폭 2.5m의 트렌치 120개소를 설정하였다. 발굴조사는 설정된 트렌치 구간에서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와 함께 연못 전 구역에 동서 및 남북 의 기준점 및 기준선 설정 측량작업도 이루어졌다. 기준점은 남북 및 동서가 각 10m로 구획되어 10m 방안이 되도록 하였다. 방안으로 구획된 각 트렌치 사이에는 1m폭의 둑을 남기고 서안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 트렌치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연못 호안주변에서 석축이 노출되기 시작하여 알 수 없었던 호안석축의 축조공법과 그 내용이 확인되었다.[12]
건물지 기단 석축은 물에 잠긴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된 부분의 축석 기법이 다르다. 물에 잠긴 부분은 모두 괴석塊石으로 면만 골라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된 부분은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맞추어 쌓았다. 그러나 장대석 기단 석축은 거의 파괴되어 밑에 한·두 단만 제 위치에 남아 있다. 건물지 주위 연못 속에는 장대석 외에 주좌가 있는 초석들이 다수 흐트러져 있었고 돌난간 부재도 출토되었다.[6]
연못의 남동 모서리에서는 2단 수조 水槽 로 구성된 입수구를 확인하였다. 수조 양 쪽에는 넓적한 판석을 깔고, 그 아래는 3단으로 구분하여 물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입수구 쪽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연못 바닥에는 큰 판석을 깔았다. 출수구는 중도의 동북모서리에서 확인되었다. 호안 석축 면에 장대석을 기초로 놓고 그 위에 높이 1.8m의 장방형 판석을 세우고, 판석에 상중하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물높이를 조절하였다.[6]
서안 석축 밑에 소도가 보인다.
또한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섬이 확인되었다. 대도는 연못 남쪽에 있으며, 중도는 대도와 대칭 방향인 연못의 서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소도는 못의 한 가운데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대도에서 소도까지의 거리는 102m, 대도에서 중도까지의 거리는 160m이다. 세 섬은 전부 연못 안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높이 1.7m 내외로 쌓은 석축 위에 흙으로 가산 假山 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괴석 등을 놓았으며, 석축 아 래에는 큰 냇돌을 등간격으로 놓아 호안 석축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축조되었다.[6]
건물지 [ 편집 ]
연못 발굴조사 완료 후 연못 주변의 서편 및 남편 건물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연못 서편 건물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서쪽 호안 석축과 접한 5개의 독립된 건물지와 그 서편으로 독립된 건물지 여섯 개를 비롯하여 문지 門址 와 장랑지 長廊址 등 많은 건물지와 배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다. 각 건물지는 회랑 廻廊 으로 둘러싸이거나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심 건물지 좌우로는 익랑으로 이어져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물 배치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그 속에 다시 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조선시대 궁궐 배치와 아주 유사하다. 서쪽의 호안 석축에 돌출되어 노출된 다섯 개의 건물지는 연못 내의 세 개 섬과 굴곡진 호안을 바라볼 수 있어서 연회나 휴식을 위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6][13][14]
연못의 남편에서는 크고 작은 13개의 건물지와 9개의 원장 垣墻 시설이 확인되었다. 연못 남쪽 호안 석축으로부터 약 30~60m 떨어진 범위에서 확인되었으며, 동서 범위는 120m에 걸쳐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건물지는 독립건물지이거나 상호 관련된 것으로, 대규모의 독립 건물과 장랑 長廊 형식의 건물지, 그 부속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외 중복 건물지와 소규모이거나 규모가 불분명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6]
이 때 동서 200 m, 남북 180 m의 대형 연못과 건물지군이 확인되었으며 ‘월지 月池 ‘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과 ‘동궁 東宮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 또한 679년인 의봉4년개토 儀鳳四年皆土 라 적힌 기와 역시 출토되어 그 조성 시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6]
서편 건물지 중 A건물지에 대한 보완조사가 2018년에 이루어졌는데, 정면 7칸에 측면 4칸짜리 건물로, 중심부에 적심이 발견되지 않아 정전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장경호가 발굴되어 그 연대가 7세기 중후엽으로 동궁의 축조시기와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유물 [ 편집 ]
동궁과 월지에서 유물은 주로 연못 서편에 있는 5개소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미터 거리 내의 바닥 토층인 갯벌층에서 출토되었다. 유물의 종류는 크게 와전류 瓦塼類 , 토기류 土器類 , 금속류 金屬類 , 목제 木製 ·칠기류 漆器類 , 철제류 鐵製類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수량은 총 3만여 점에 달한다.[6]
의봉사년개토가 적혀있다.
이 유물들 중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단연 와전류이다. 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으며 전돌 역시 20여종에 달한다. 그 외에 치미편鴟尾片을 비롯하여 귀면와, 이형와 등 5,7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와전류는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하였으며, 보상화문 전편 塼片 중에는 측면에 “조로2년 한지벌부군 약소사…..3월 3일 작강 調露二年漢只伐部君若小舍…..三月三日作康 ”이라 음각된 문양전도 있어서 불확실했던 보상화문전의 제작 연대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의봉4년개토 儀鳳四年皆土 ”라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기와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 모서리 암키와, 곱새기와, 회첨 막새 등의 특수기와도 출토되었다.[6]
목칠류도 1,100여 점 이상 확인되었다. 목재류에는 목선과 건축부재, 묵서명 목간 木簡 , 주령구 등이 있고 칠기로는 쟁반형 칠기류, 찬합 등이 있다. 목선은 연못 동안 중심부 북편 호안석축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뒤집힌 채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배의 크기는 길이 5.9m, 너비 1.2m, 높이 60cm 가량이다. 이 목선은 장목 3편을 길이로 연접시켰는데, 선수 船首 와 선미 船尾 부근에서 빗장을 끼우듯이 연결시켰다. 빗장목은 참나무이고 목선은 소나무이다. 완형의 목선 외에도 3점의 목선편이 더 확인되었고, 목제 노 櫓 가 다수 출토되었다.[6]
이 외에 주사위, 남근, 용도 미상의 목편들이 상당 수 출토되었다. 주사위는 크기 5×6.5cm의 14면체인데 각 면마다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또한 길이 17cm, 직경 3.8cm의 목조 남근이 완형으로 출토되었다.[6]
주령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주령구 입니다.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에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이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14로 균등하게 되어 있다. 재질은 참나무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출토된 진품은 서울연구소에서 유물 보존 처리도중 목질을 경화하는 장치에서 기기 오작동으로 화재가 발생해 불타 소실되었다.[15]
복원 및 논란 [ 편집 ]
1954년 동궁과 월지
복원 후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야경)
1976년까지의 복원을 통해 알게 된 건물지의 위치와, 획득한 자재들을 토대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시작한다. 이 때 3개의 전각을 복원했는데 이후 더 복원하지 않았다.[16]
이에 따라 현재는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이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630억원 정도를 들여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동궁과 월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유네스코 역시 상기한 바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고증이 없는 현 상태에서 무리한 복원을 추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출했다.[17]
사진 [ 편집 ]
각주 [ 편집 ]
주해 [ 편집 ]
↑ 좁고 길게 연달아 도랑 모양으로 축조한 벽·기둥 밑의 기초를 말한다. ↑ 암거시설이란 지하에 고랑을 파서 물을 빼는 시설을 말한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외 (2020년 7월 16일). 《통일신라의 궁원지, 동궁과 월지의 조사와 연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ISBN 978-89-299-1879-8 .
사적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 문화재 검색
慶州臨海殿跡は雁鴨池の西側にある新羅王宮の離宮の跡である。他の付属建築物とともに王子が生活する東宮として使われ、国に慶事がある時や大事なお客さんを迎えた時にここで宴会を行ったという。また、新羅の敬順王が甄萱に侵略された時、931年に王建を招待して危険な状況を訴えながら宴会を行った所でもある。ここでは多くの遺物が出土されたが、そのうち宝相華の紋様が刻まれた煙瓦には「調露二年」(680)という字が刻まれているため、臨海殿が文武王の時に作られたことを裏付けている。平鉢や皿もたくさん出ているが、これは新羅の墓から出土されたものとは違い、実際の生活に使われたと考えられる。臨海殿は離宮に属していた建物であるが、その重要性は非常に大きかったと思われ、雁鴨池は新羅の苑池を代表する遺跡である。
是位于雁鸭池以西的新罗王宫的离宫遗址,与其他附属建筑物一起用作王子居住的东宫。据说每当国家有庆典时或迎接贵宾时都会在此举行宴会。新罗敬顺王受到甄萱入侵后,曾于931年邀请王建来此,向其诉说危机状况并设宴款待。庆州临海殿址内出土了大批遗物,其中宝相花纹的砖上刻有“调露二年(680)”字样,再次证明了临海殿为文武王时期所造。还出土了大量大碗和碟子,推测这些遗物与新罗坟墓里出土的遗物不同,是当时的实际生活用品。临海殿是附属于离宫的建筑物,其比重很大,雁鸭池是代表新罗苑池的遗址。
- Source: www.heritage.go.kr
- Views: 23421
- Publish date: 24 hours ago
- Downloads: 46859
- Likes: 5009
- Dislikes: 3
- Title Website: 사적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 문화재 검색
- Description Website:
경주 안압지(동궁과 월지) 발굴과 보수, 1976|PLAY ▶ 박물관 아카이브
- Source: Youtube
- Views: 98276
- Date: 9 hours ago
- Download: 99304
- Likes: 2513
- Dislikes: 6
사적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Located on the west part of Anapji Pond, this is the Imhaejeon Palace Site of the Silla Period. Anapji Pond was built in 674 during the 1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mu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t has three central islands, and to the north and east are 12 hills — a composition reflecting the Taoist philosophy. Beautiful trees and flowers as well as rare birds and animals were brought from all over to these islands and hills. A number of pavilions, including Imhaejeon, were constructed around the lake and used for state festivals and banquets and as a prince’s palace. Anapji is an excellent example of garden and lake construction of that period. The reconstruction of the present lake and archaeological construction sites was undertaken during the period 1975-76 and completed in 1980. The original water conduit, drainage channel, and stone embankments were excavated and restored accordingly. A total of 26 building foundations and many relics were excavated from this site, including bowls, plates, and flower-patterned bricks where “The Second Year of Joro (680)” was inscribed. This was also the place where King Gyeongsun, the last monarch of Silla, hosted for Wang Geon, founder of the Goryeo Dynasty, a banquet to ask for his aid.
是位于雁鸭池以西的新罗王宫的离宫遗址,与其他附属建筑物一起用作王子居住的东宫。据说每当国家有庆典时或迎接贵宾时都会在此举行宴会。新罗敬顺王受到甄萱入侵后,曾于931年邀请王建来此,向其诉说危机状况并设宴款待。庆州临海殿址内出土了大批遗物,其中宝相花纹的砖上刻有“调露二年(680)”字样,再次证明了临海殿为文武王时期所造。还出土了大量大碗和碟子,推测这些遗物与新罗坟墓里出土的遗物不同,是当时的实际生活用品。临海殿是附属于离宫的建筑物,其比重很大,雁鸭池是代表新罗苑池的遗址。
慶州臨海殿跡は雁鴨池の西側にある新羅王宮の離宮の跡である。他の付属建築物とともに王子が生活する東宮として使われ、国に慶事がある時や大事なお客さんを迎えた時にここで宴会を行ったという。また、新羅の敬順王が甄萱に侵略された時、931年に王建を招待して危険な状況を訴えながら宴会を行った所でもある。ここでは多くの遺物が出土されたが、そのうち宝相華の紋様が刻まれた煙瓦には「調露二年」(680)という字が刻まれているため、臨海殿が文武王の時に作られたことを裏付けている。平鉢や皿もたくさん出ているが、これは新羅の墓から出土されたものとは違い、実際の生活に使われたと考えられる。臨海殿は離宮に属していた建物であるが、その重要性は非常に大きかったと思われ、雁鴨池は新羅の苑池を代表する遺跡である。
경주 동궁과 월지> 여행지 | ‘열린 관광’ 모두의 여행
이 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 반려동물 동반 여행정보는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방문 전 문의 부탁드립니다. ※ 여행 펫티켓을 준수해주시고 안전 사고에 유의해주세요.
- Source: korean.visitkorea.or.kr
- Views: 12459
- Publish date: 19 minute ago
- Downloads: 103423
- Likes: 6379
- Dislikes: 1
- Title Website: 경주 동궁과 월지> 여행지 | ‘열린 관광’ 모두의 여행
- Description Website:
- Source: Youtube
- Views: 94318
- Date: 19 minute ago
- Download: 14157
- Likes: 7244
- Dislikes: 9
한국관광100선: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상세정보 관광정보 수정요청 내용 더보기
상세정보
지도 건너뛰기 여행지도보기 즐겨찾기 좋아요 코스담기 길안내 닫기 상세보기 주변 여행지
음식점
카페
숙소
주차장
더보기
반려동물 여행정보 보기
※ 반려동물 동반 여행정보는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방문 전 문의 부탁드립니다. ※ 여행 펫티켓을 준수해주시고 안전 사고에 유의해주세요.
모두의 여행 ‘무장애여행’
객실안내 닫기 열기
더보기
열기
여행톡
여행톡 로그인 후 소중한 댓글을 남겨주세요. 파일찾기 전체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추천여행
추천여행 연관정보
주변 숙소 비교
생생후기
동궁과 월지 – 우리역사넷
‘월지’를 ‘안압지’라고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기 때문이지요. ‘안압지’라는 용어는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해요.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것으로 각 도의 산과 하천 등 지리와 관련된 정보와 인물, 풍속 등을 적은 책이에요.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가 문무왕 때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월지를 만들 때 연못 안에 3개의 섬도 함께 만들었다고 해요. 이 3개의 섬은 불로초가 자란다는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전해져요. 월지의 동쪽과 북쪽에는 산봉우리도 12개나 만들었어요. 12개의 봉우리는 신선이 산다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무산의 12봉우리를 본떠 만들었다고 해요. 이때 만든 산봉우리 중 낮은 것은 3m 정도이고 높은 것은 무려 6m나 되었어요.
그런데 월지에서 배를 타려면 물이 충분히 있어야겠죠. 월지의 물은 어디에서 공급될까요? 월지의 동남쪽에는 물이 흘러 들어가는 입수구가 있어요. 이곳에서 흘러들어온 물은 월지 곳곳을 지나 동북쪽에 있는 곳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물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무로 된 마개로 나가는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하니 연못을 관리하는 신라인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어요.
- Source: contents.history.go.kr
- Views: 18838
- Publish date: 8 hours ago
- Downloads: 77159
- Likes: 3063
- Dislikes: 6
- Title Website: 동궁과 월지 – 우리역사넷
- Description Website:
#안압지 ? 아니죠! #경주의 보물, #동궁과월지 입니다_한국건축보물찾기
- Source: Youtube
- Views: 64125
- Date: 19 hours ago
- Download: 62776
- Likes: 1079
- Dislikes: 2
신라의 생활을 알려주는 동궁과 월지
“월지는 매우 아름다운 연못이군요.”
“고려에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신라는 후백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고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931년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어요. 잔치가 벌어진 곳은 월지가 보이는 한 건물이었어요. 월지는 어떤 곳일까요? 또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신라의 삼국 통일 무렵 만들어진 인공연못 월지
“폐하! 드디어 동궁 옆에 커다란 연못을 완성했습니다.”
“수고하였소. 앞으로 연못 주변에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동물을 키우는 것이 좋겠소.”
674년 문무왕 때 신라 왕궁에 연못이 만들어졌어요. 이 연못을 월지라고 해요. 월지를 만든 2년 후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냈지요.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뜻을 이어받아 삼국 통일을 완성했어요.
월지는 아주 커다란 인공연못이에요.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북쪽과 동쪽은 바닷가의 해안선처럼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월지를 만들 때 연못 안에 3개의 섬도 함께 만들었다고 해요. 이 3개의 섬은 불로초가 자란다는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전해져요. 월지의 동쪽과 북쪽에는 산봉우리도 12개나 만들었어요. 12개의 봉우리는 신선이 산다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무산의 12봉우리를 본떠 만들었다고 해요. 이때 만든 산봉우리 중 낮은 것은 3m 정도이고 높은 것은 무려 6m나 되었어요.
동궁은 신라의 태자가 머물던 곳이에요. 현재 경주에는 동궁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동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1974년 월지를 발굴할 때 여러 개의 건물터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중에 3개의 건물을 복원도 했어요. 그중 하나가 임해전인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임해전이 동궁의 건물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월지 임해전 앞의 건물터>
1974년 11월 월지 준설공사에서 기와와 와당 조각이 발견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1976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어요. 이때 진흙 바닥에서 여러 가지 유물을 찾아냈어요. 그 유물의 수는 무려 3만 점이나 되었다고 해요.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월지는 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커요
1975년 월지의 유물을 발굴할 때 연못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나무배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어요. 이를 통해 신라 사람들이 월지에서 뱃놀이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월지에서 배를 타려면 물이 충분히 있어야겠죠. 월지의 물은 어디에서 공급될까요? 월지의 동남쪽에는 물이 흘러 들어가는 입수구가 있어요. 이곳에서 흘러들어온 물은 월지 곳곳을 지나 동북쪽에 있는 곳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물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무로 된 마개로 나가는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하니 연못을 관리하는 신라인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어요.
월지에서 동물을 키웠다구요?
문무왕 때 월지가 만들어진 후 연못 가운데에 있는 섬과 주변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고 해요. 또 그곳에 진귀한 새와 기이한 동물도 길렀어요. 궁의 정원에서 신기한 동물을 키우는 것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행했던 것이래요.
그렇다면 월지에서 어떤 동물을 키웠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월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와 신라가 일본에 동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에서 어떤 동물을 키웠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월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기러기, 꿩, 오리, 산양, 노루, 말, 사슴, 호랑이 등이에요. 그리고 일본에 보낸 많은 동물 중에는 앵무새와 공작, 낙타 등이 있었다고 해요. 일본에 보낸 동물은 신라에서도 키웠겠죠.
<월지의 숲에 사는 동물들>
주령구가 뭐예요?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소리 없이 춤추기
얼굴을 간지럽혀도 참기
이게 무엇일까요? 월지에서 발견된 주령구에 쓰여 있는 글이에요. 주령구는 14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에요. 그중 사각형은 6개 면, 육각형은 8개 면으로 되어 있어요. 또 각각의 면에는 다른 내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지요.
<주령구>
국립민속박물관
주령구는 신라의 왕과 귀족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일 때 굴리며 놀던 놀이도구이지요. 나머지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는지 살펴볼까요? 몇 가지는 여러분도 할 수 있는 놀이랍니다.
신라인은 사용한 생활용품은 무엇이 있을까?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다른 유물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신라인들이 직접 사용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 대부분은 신라의 여러 고분에서 발굴된 것들이에요. 이 유물들은 실제로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을 위해 무덤에 함께 넣어주었던 부장품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월지에서 발굴된 생활용품은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청동으로 만든 가위에요. 청동 가위는 생긴 모습도 무척 아름다워요. 신라인들은 이 가위로 초의 심지를 잘랐을 것으로 생각되어요.
그런데 월지에서 발견된 금동초심지 가위와 거의 비슷한 모양의 가위가 발견되었어요. 바로 일본의 정창원에서지요. 정창원은 일본 고대 왕실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를 통해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겠죠.
<월지 출토 금동 초심지 가위>
문화재청
신라 사람들은 어떤 건물을 지었을까?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기와 조각이랍니다. 발굴된 유물 약 3만 점 중 80% 정도의 비율이에요. 기와 중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연꽃무늬 수막새와 암막새 이외에도 도깨비 얼굴의 기와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신라 사람들이 건물을 지을 때 지붕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알 수 있어요.
<월지에서 발견된 곱새기와(한국학중앙연구원)와 짐승 얼굴 무늬 기와(국립중앙박물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월지는 한때 안압지라 불렸어요
여러분의 부모님께 월지에 대해 질문을 하면 ‘월지’가 어디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실지도 몰라요. 그럴 때 옛날에 ‘안압지’라고 부르던 연못이라고 하면 “아!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연못 말이구나.” 하실 거예요. ‘월지’가 얼마 전까지도 ‘안압지’라고 불렸거든요.
‘월지’를 ‘안압지’라고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기 때문이지요. ‘안압지’라는 용어는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해요.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것으로 각 도의 산과 하천 등 지리와 관련된 정보와 인물, 풍속 등을 적은 책이에요.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가 문무왕 때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월지’는 신라가 멸망한 후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폐허가 되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월지를 ‘안압지’라고 불렀어요. ‘안압지’가 무슨 뜻이냐구요?
한자로 ‘안(雁)’은 ‘기러기’, ‘압(鴨)’은 ‘오리’, ‘지(池)’는 ‘연못’을 뜻해요. 즉, 이곳이 기러기나 오리들이 살던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죠.
‘동궁과 월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나요? 경주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동궁과 월지’를 꼭 가보세요. ‘동궁과 월지’는 낮에 가서 보는 것도 좋지만 밤에 보는 풍경도 무척 아름다워요. ‘동궁과 월지’를 거닐면서 신라 귀족들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집필자] 김현숙
경주동궁과월지(慶州東宮 月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뒤 1974년 11월에 안압지 준설 및 주변정화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때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1975년 3월∼1976년 12월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신라시대에 축조한 연못이 거의 완전하게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 주변에 쌓았던 호안석축(護岸石築)도 매우 양호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연못에 물을 대는 입수구와 수로, 물이 빠져 나가는 배수구 등의 시설도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편 안압지 서쪽에서는 건물터와 행랑터가 확인되었으며, 그보다 더 서쪽에는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터도 드러났다. 행랑은 안압지 남쪽으로도 연결된 듯 보이지만, 그 북쪽과 남쪽은 철로와 차도에 의하여 많이 손상되었기에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에는 679년인 ‘의봉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2년(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 847년(문성왕 9), 867년(경문왕 7)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 9월과 769년(혜공왕 5) 3월, 860년(헌안왕 4) 9월,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 Source: encykorea.aks.ac.kr
- Views: 82133
- Publish date: 5 hours ago
- Downloads: 91636
- Likes: 7338
- Dislikes: 7
- Title Website: 경주동궁과월지(慶州東宮 月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원 ‘안압지’ 발굴과정 (1976년)
- Source: Youtube
- Views: 23083
- Date: 49 minute ago
- Download: 99443
- Likes: 1444
- Dislikes: 5
경주동궁과월지(慶州東宮─月池)
신라의 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4년(문무왕 14)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가 건립된 시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 847년(문성왕 9), 867년(경문왕 7)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 9월과 769년(혜공왕 5) 3월, 860년(헌안왕 4) 9월,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 안에는 현재 중국 사천성 동쪽에 있는 명산인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본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고, 연못을 파고서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서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중심 건물을 임해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 뒤 1974년 11월에 안압지 준설 및 주변정화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때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1975년 3월∼1976년 12월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신라시대에 축조한 연못이 거의 완전하게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 주변에 쌓았던 호안석축(護岸石築)도 매우 양호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연못에 물을 대는 입수구와 수로, 물이 빠져 나가는 배수구 등의 시설도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편 안압지 서쪽에서는 건물터와 행랑터가 확인되었으며, 그보다 더 서쪽에는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터도 드러났다. 행랑은 안압지 남쪽으로도 연결된 듯 보이지만, 그 북쪽과 남쪽은 철로와 차도에 의하여 많이 손상되었기에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에는 679년인 ‘의봉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2년(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에 정화공사를 거쳐 신라 궁궐의 원지(苑池)로 복원되었고, 3채의 누각도 발굴조사 때 출토된 목조 건물 부재와 신라시대의 다른 유적들을 참조하여 복원되었다. 그밖의 건물터는 주춧돌만 정연하게 확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 동궁 과 월지
Bing에서 동궁 과 월지 주제에 대한 최신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보기를 마쳤습니다 동궁 과 월지. 이 기사가 유용했다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동궁 과 월지 동궁과 월지 야경 시간, 동궁과 월지 소개, 동궁과 월지 가는 법, 동궁과 월지 야간개장, 동궁과 월지 역사, 동궁과 월지 나무위키, 동궁과 월지 만든 사람, 동궁과 월지 입장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