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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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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사터에 있었던 삼국시대 조성한 9층 목탑의 탑터.목탑터. 키워드. 황룡사지; 선덕여왕; 자장; 목탑; 아비지. 영역닫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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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꿈을 품은 황룡사 9층 목탑!|다시만나는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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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역사적 변천],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 – 네이버 블로그
자장이 중국에 있는 절 근처 연못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령스런 사람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고 자장은 ‘고국인 신라에 주변 나라가 자주 침략해와서 백성들이 힘들고 걱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신령스런 존재가 본인은 원래 황룡사를 지키는 용의 아버지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9층의 목탑을 세워라. 그러면 한층의 하나씩 9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치고 정복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열심히 주춧돌을 닦고 기반을 만들면서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으면 정말 백제가 멸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아비지는 더 이상 목탑을 짓지 않기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변이 깜깜해지더니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노승이 다가오더니 그 가운데 기둥을 세울 큰 돌을 올려놓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울산항에서 이 배를 발견한 관리가 진흥왕에게 알렸고, 신라는 한 번에 이 불상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기원전 200년 전 왕이고, 진흥왕은 기원후 500년 대의 왕으로 두 왕 사이에는 700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15 thg 1, 2017 — 황룡사 구층 목탑은 그 이후에도 잘 보존되어 오다가 몽골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후로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 목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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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100% 황룡사지 9층 목탑 360도 VR (큰별쌤★ 최태성 특강) [히스토리AR] VR 특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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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
이 유물은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주춧돌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황룡사에 있었던 9층 목탑이라 하여 ‘황룡사 구층 목탑’이라 불린다.
복원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고 한다.
복원이 된다면 80m가 넘는 높이….
신라인들은 이 탑을 왜 만들었을까?
황룡사 구층 목탑이 건립된 시기는 643년으로 선덕여왕의 통치시기였다.
그 당시 신라의 주변정세는 당나라에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군주인 태종이,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막리지에 올라서 강경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백제도 의자왕이 즉위한 상황이었다.
의자왕의 통치 말기에는 여러가지 타락하고 안좋은 모습도 있었지만, 즉위 초기에는 신라의 대야성 등 여러 성을 빼앗는 등 영토를 확장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그런 존재였다. ‘의롭고 자비롭다’고 하여 의자왕이라 불릴 정도로 현명한 군주였던 것이다.
즉 643년 신라 선덕여왕은 의자왕에게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겨 왕권이 크게 실추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자장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여왕을 찾아간다.
이것과 관련된 일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중국에 있는 절 근처 연못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령스런 사람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고 자장은 ‘고국인 신라에 주변 나라가 자주 침략해와서 백성들이 힘들고 걱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신령스런 존재가 본인은 원래 황룡사를 지키는 용의 아버지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9층의 목탑을 세워라. 그러면 한층의 하나씩 9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치고 정복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목탑을 세우기로 결정했지만 신라에는 9층의 목탑을 지을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그래서 백제의 기술력을 빌리기 위해 의자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백제에서는 ‘아비지’라는 기술자를 신라에 보낸다.
열심히 주춧돌을 닦고 기반을 만들면서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으면 정말 백제가 멸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아비지는 더 이상 목탑을 짓지 않기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변이 깜깜해지더니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노승이 다가오더니 그 가운데 기둥을 세울 큰 돌을 올려놓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본 아비지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완성하는 것이 하늘이 뜻이라고 생각해 끝까지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짓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불탑을 왜 만들까?
불탑 안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어서 부처님의 무덤 역할을 한다.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면 9개의 나라를 정복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등 나라들이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정해진 나라가 실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가 생각했던 완전한 수가 9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보다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그 이후에도 잘 보존되어 오다가 몽골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후로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 목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1964년 12월, 도굴꾼들이 황룡사 구층 목탑에 있었던 자리의 주춧돌, 심초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들어올리자 그곳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의 사리라고 한다.
이 사리함들 중에는 ‘찰주본기’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을 중수할 때 왕들이 넣었던 것이라 한다.
이 찰주본기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만들게 된 경위와 어떤 방식으로 고쳤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조금 더 놀라운 것은 찰주본기에 쓰여져 있는 내용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 찰주본기 외에도 많은 사리함과 사리갖춤 도구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던 황룡사는 진흥왕때 지어졌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이 즉위하고 19살이 되던 해에 궁궐을 크게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궁궐을 지으려고 하는데, 막 지으려는 과정에서 황룡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궁궐이 아닌 절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여 17년동안 황룡사를 지었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구층 목탑 외에도 거대한 유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서 거대한 불상이 있었는데, 이 불상은 인도의 아소카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많은 재료를 들여서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소카왕은 재료를 모아 배로 떠나보내면서 ‘인연이 닿는 곳에서 완성하기를 기원한다’ 고 했다고 한다. 이 배가 닿은 곳이 신라의 울산항…
울산항에서 이 배를 발견한 관리가 진흥왕에게 알렸고, 신라는 한 번에 이 불상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기원전 200년 전 왕이고, 진흥왕은 기원후 500년 대의 왕으로 두 왕 사이에는 700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불상의 높이는 5m에 달하고 동으로 제작했지만 겉을 다 금박으로 칠해서 굉장히 크고 화려한 불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불상 또한 안타깝게도 몽골침입 시기에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에는 이외에도 거대한 종이 있었다. 성덕대왕 신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종의 4배에 달하는 종이 황룡사에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금당을 장식하는 건물의 치미의 길이와 넓이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에서 이렇게 큰 치미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서 황룡사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는 황룡사는 불에 타 주춧돌만 남아있지만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ebs
경주 황룡사지 553 – 우리역사넷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건립된 후 1238년(고려 고종 25년)에 몽골 군대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수 차례 중수가 거듭되었다. 그중에 주목되는 기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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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복원 신라최고의 사찰 황룡사 9층목탑 [역사실험] KBS 1996.05.2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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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황룡이 나타난 신라의 국찰(國刹)
경주 중심지에 위치한 사적 제6호 황룡사지(皇龍寺址)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 완공된 황룡사의 옛터이다. 황룡사는 진흥왕, 진지왕(眞智王), 진평왕(眞平王), 선덕여왕(善德女王) 등 4대 왕에 걸친 대규모 불사(佛事)를 통해 국찰(國刹)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 착공 때부터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 군대에 의해 소실될 때까지 오랜 기간 유지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 황룡사의 창건부터 소실까지 발생한 재해와 중수 내력, 목탑의 구조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황룡사 구층 목탑 찰주본기(皇龍寺 九層木塔 刹柱本記)」를 통해 872년의 황룡사 9층 목탑 중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사찰의 구조와 변천이 밝혀졌고, 현재까지 지속적인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에 완공된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진흥왕의 불교치국(佛敎治國) 정책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경주의 중심지에 위치한 황룡사는 본래 진흥왕이 궁전을 지으려고 한 건물의 용도를 사찰로 변경하여 완공된 것이다. 이후 574년(진흥왕 35)에 크기가 1장(丈) 6척(尺)인 장육불상(丈六佛像)이 조성되고 584년(진평왕 6)에 황룡사에 부처를 모시는 전각인 금당(金堂)이 새롭게 완공되었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총 높이가 약 80m인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조의 기록이 주목된다. 이는 533년 진흥왕이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는 도중에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건물을 절로 고쳐 짓고 황룡사라 하였다는 기록이다. 월성 동쪽은 신라의 신성한 7개의 절터 가운데 하나로,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에 자세한 내용이 전해진다. 여기에서 아도(阿道)는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오기 전에 그의 어머니인 고도녕(高道寧)에게 전불시대(前佛時代), 즉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출현한 부처들이 있었던 시대에 경주 안에 7개 절의 터가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 가운데 신라 월성의 동쪽에 용궁이 있고, 바로 이 용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세워졌다. 신성한 7개의 절터에 대한 기록은 신라인들의 불국토(佛國土) 사상과 연관되는데 이것은 신라가 본래 오래전부터 부처가 계신 땅이었다는 관념을 나타낸다. 신성한 땅에 황룡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사찰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창건 배경은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황룡사지 기반의 토양 상태, 사찰 주변의 토목공사 흔적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황룡사가 건립된 땅은 범람지(氾濫地)였기 때문에 황룡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범위한 영역의 땅을 다지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현재 황룡사 남쪽 남문 앞에는 대규모 광장 유적과 함께 서쪽으로는 동궁과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까지 동·서쪽으로 뻗은 대형 도로 유적이 확인된다. 황룡사 앞 도로 유적의 남쪽에는 도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담장이 있는 작은 건물들이 다수 건립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자갈과 흙을 여러 층으로 다져 쌓은 땅 위에 건설되었다. 황룡사 주변 도로와 건물 등을 건설한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사찰의 건립과 함께 황룡사 주변 일대의 새로운 시가지 건설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이러한 토목공사에는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서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당시 대규모의 사찰 창건 공사를 진행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되는 진흥왕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진흥왕은 법흥왕(法興王)이 지니고 있었던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을 계승하며 불교적 이상군주로서 신라에 정법(正法) 왕국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이름이 사미(沙彌) 또는 승가(僧伽)를 뜻하는 삼맥(彡麥)이고 태자들의 이름이 전륜성왕을 의미하는 동륜(銅輪), 금륜(金輪)이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그의 행적이 불교를 숭상하며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의 행적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선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며 건립한 순수비(巡狩碑)는 아쇼카왕이 정복 지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건립한 석주(石柱) 및 마애법칙(磨崖法勅)과 유사하다. 또한 진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승려로서 사원에 머문 모습도 경전에 전해지는 아쇼카왕의 행적과 유사하다. 신라의 3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진 황룡사의 장육불상도 아쇼카왕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에 의하면 이 불상은 진흥왕이 아쇼카왕에게 받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은 불상 조영에 실패한 아쇼카왕의 숙원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즉 장육불상의 연기설화(緣起說話)를 통해서도 진흥왕이 지니고 있었던 전륜성왕 의식이 확인되는 것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문헌 기록에 의해 탑의 높이는 약 80m로 추정된다. 탑의 건립을 위해 당시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신라로 초청되었고 김용춘(金龍春)이 신라 장인 200여 명을 인솔하였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에 기록된 목탑의 창건 배경을 살펴보면, 자장이 중국 당(唐)을 유학할 당시의 내용이 전해진다. 신인은 자장에게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본인의 큰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고 황룡사에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어서 신인은 신라에 돌아가 황룡사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자장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목탑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자장이 중국을 유학한 시기가 수(隋)·당(唐) 교체기인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 때라는 것이다. 이 시기 중국 장안(長安)에서는 여전히 수의 문제(文帝, 재위 581~604)가 실시한 불교 정책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어 자장이 그의 불교 정책을 견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전륜성왕을 모델로 하여 다수의 사리탑을 건립한 수 문제의 불교 정책이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배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된다. 중국 당의 도선(道宣, 596∼667)이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의하면 자장은 각 지방에 많은 사리탑을 건립한 문제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리탑만 건립하였다. 하지만 자장은 분명히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이는 신라의 국찰인 황룡사에서의 목탑 건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장이 수 문제의 사리탑을 모델로 하여 선덕여왕도 부처의 사리를 지킬 만한 전륜성왕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의도를 바탕으로 건립된 황룡사는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시기별로 창건가람, 중건가람, 최종가람으로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황룡사의 창건가람은 동시기에 건립된 백제의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늘어서고 회랑으로 감싼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형태였다. 중건가람 이후의 가람배치는 목탑 위쪽에 세 개의 금당이 일렬로 늘어선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 형태로 변화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일반적으로 일탑삼금당 형식은 세 개의 금당이 동과 서, 북쪽에서 목탑을 둘러싸는 배치이지만 이 시기 황룡사의 일탑삼금당 형식은 금당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금당-중금당-동금당의 순으로 일렬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계통의 3금당식 가람에서 발전·변화된 형태라고 이해된다.
황룡사에서는 대규모 호국(護國) 법회가 거행되었다. 여기에서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거행되어 호국을 기원하는 국찰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법회에는 역대 왕들이 친히 행차하여 참석하기도 하였다. 백고좌회와 팔관회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순한 혜량(惠亮)이 황룡사에서 신라 최초로 개최하였다. 원광(圓光), 안홍(安弘), 자장, 원효(元曉) 등 많은 고승이 황룡사에 머무르면서 경전을 강독하는 강경(講經)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고승 중에는 황룡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신라 불교계의 최고 통솔자인 국통(國統)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황룡사가 신라 불교계와 승려를 관리하는 중추적인 기구로 기능하였다고 이해된다. 황룡사의 위상과 관련하여 754년(경덕왕 13)에 만들어진 황룡사 종의 시주자가 경덕왕의 전 부인인 삼모부인(三毛夫人)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이 종은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 4배가 컸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황룡사 종을 주조할 수 있었던 왕실 외척의 막대한 경제력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시기별로 중수를 거듭한 황룡사가 폐사(廢寺)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건립된 후 1238년(고려 고종 25년)에 몽골 군대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수 차례 중수가 거듭되었다. 그중에 주목되는 기록은 보물 제1870호에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로, 이 사료를 통해 871년(경문왕 11) 중수된 탑의 수리 경위와 탑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찰주본기가 새겨진 사리내함(舍利內函)은 사리외함(舍利外函)에 담겨져 목탑의 심초석(心礎石) 안에 보존되었다. 이후 사리함은 1964년에 도굴되었다가 1966년에 되찾아 경주국립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주목해야 할 내용은 찰주본기의 전반부에 기록된 탑의 창건 연기 설화에서 자장이 당에 유학을 떠난 연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찰주본기의 후반부에는 9층 목탑을 중수하기 위하여 설치한 성전(成典)의 관직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를 활용하여 왕실에 의해 건립된 사원이나 궁성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관청인 성전사원(成典寺院)의 구성과 운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 목탑은 벼락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중수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1238년에 몽골 군대의 침입으로 탑과 절, 장육존상, 전각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는 끝내 다시 중수되지 못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고려 말 문인 김극기(金克己, 1379~1463)의 시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층계를 올라가서 경주의 경치를 조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황룡사가 불에 타기 직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황룡사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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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경주 황룡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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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을 재연해 보았습니다_마에스트로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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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1]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1][2]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3]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1] 고려 고종 25년(1238년)[4]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5]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 [ 편집 ]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2]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2]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2]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2]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황룡사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이 친행예불한 장소로는 황룡사 이외의 곳에서 예불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2]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현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의 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2]
남겨진 절터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그 절터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2]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2]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2]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2]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2] 또 솔거(率居)의 노송도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2]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 · 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2]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2]
황룡사 9층 목탑 [ 편집 ]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6]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타워가 2007년에 완공되었고, 이 목탑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중도타워가 201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터 [ 편집 ]
황룡사 9층목탑을 위시한 황룡사 터 개략도 황룡사 복원 전경 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사진 [ 편집 ]
당간지주
경주국립박물관 소재 망새(치미)
망새에 새겨진 얼굴 무늬
황룡사 장륙삼존불상의 불대좌
관련 작품 [ 편집 ]
《비원의 탑》(2012, 학산문화사) – 전혜진 글, 최미애 그림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을 소재로 하는 만화이다. 전3권.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문화재 종목별 검색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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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않지만 가장 유명한 절, 황룡사 9층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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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The construction of Hwangnyongsa Temple, located east of Wolseong in Gyeongju, was begun in 553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 (540-576) of the Silla Dynasty to honor a yellow dragon that is said to have appeared at the building site. At the time of its completion in 574, Silla received models of Sakyamuni Buddha and his two acolytes, along with a vast amount of iron and gold, from India which, as the story goes, the great Indian king Asoka intended to use to make the statues of a Shakyamuni triad but failed. Silla was able to build a 5-meter-tall Shakyamuni triad with the precious metals, and in 584 erected a golden shrine hall in which to enshrine them. Later, a nine-story wooden pagoda was started in 643 on the advice of Jajang, a great priest of Silla, and was completed in 645 by a famous Baekje builder named Abiji. Silla’s rulers hoped that the pagoda would bring Buddha’s aid for the protection of their kingdom against the nine foreign enemies symbolized by the nine stories of the pagoda. Hwangnyongsa Temple, which took 93 years to complete and eventually its Nine-story Wooden Pagoda became one of the three national treasures of Silla along with a sixteen-feet-high statue, which also was in the temple, and a jade belt bestowed by heaven. This great temple was, however, burnt down during the Mongol invasion of Korea (then Goryeo) in 1238. The remaining features of the temple show that it originally consisted of a middle gate, a wooden pagoda, a main prayer hall and a lecture hall arranged in a straight line, to which two more prayer halls, a bell tower and a scripture hall were added at a later date to form a wonderful symmetry. The temple was then enclosed by the huge structures of the gallery. According to Samguk 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the temple also had a large temple bell, which is now missing. An excavation of the temple site started in 1976 produced a large collection of about 40,000 artifacts including gilt-bronze Buddhist statuettes, bells, ear ornaments, glass vessels and a huge 182-centimeter-long ornamental ridge-end tile. It is said that the temple also had a mural painted by Solgeo, who was admired as the greatest artist of his time, in its central prayer hall. The shards of a white porcelain jar from Tang China discovered at the wooden pagoda site constitute valuable tangible evidence of active exchanges between Silla and Tang.
黄龙寺的由来非常有趣,相传新罗真兴王14年(553)在庆州月城东侧修建宫殿的过程中听说此地出现过黄龙,随即改建寺院,历时17年终得竣工。其后574年,印度阿育王计划用57,000斤铁·3万分金子制作释迦三尊佛像,但未能如愿遂把金子、铁、三尊佛像的模型装船送至新罗,最后在新罗完成了三尊佛像。为了供奉5米多高的佛像,真平王6年(584)开始建金堂,善德女王12年(643)在从唐朝留学而归的慈藏建议下修建了旨在防止外敌入侵的9层木塔,各层象征敌国,由百济匠人阿非知于645年最终完工。黄龙寺修建工期长达93年,是由国家主持修建的大型寺院,新罗的三大宝物包括天赐玉带、黄龙寺九层木塔与丈六尊像,由此可知黄龙寺在当时占有举足轻重的地位。从黄龙寺还可以了解到“新罗乃释迦摩尼之地”等新罗人的佛教观。但黄龙寺在高丽高宗25年(1238)蒙古入侵时化作灰烬,如今只剩下昔日的痕迹。此后填埋沼泽重新修建了黄龙寺,从南至北依次为中门·木塔·金堂·讲堂,采用了长条排列的一塔式布局,后期建成丈六尊像与木塔等之后变为在金堂左右各设小金堂的一塔三金堂式,在塔的左右对称置有钟楼与经楼。四周环绕着走廊等回廊,其伽蓝布置极为独特,据《三国遗事》记载,钟楼内原有一座巨大的钟,但后来蒙古入侵时不见了踪影。在始于1976年的挖掘调查中共出土了鎏金铜佛立像·风铎·鎏金铜耳饰·各种琉璃等四万多件遗物,通过高达182cm的大型鸱尾可以估量出建筑物的雄壮。据传金堂内曾有率居绘制的壁画,通过从木塔遗址内出土的唐朝白瓷罐可以了解到当时的文物交流情况。
皇龍寺は新羅真興王14年(553)に慶州月城の東側に宮を建てていた途中、そこから黄龍が現わ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寺として改めて作り直し、17年ぶりに完成された。574年にはインドのアソカ王が鉄57,000斤、金3万分で釈迦三尊仏像を作ろうとしたが実現出来ず、金と鉄そして三尊仏像の模型を船に乗せて送ったのが新羅の地に至ると、それを材料にして三尊仏像を作り、5mを越えるこの仏像を安置するために真平王6年(584)に金堂を建てた。善徳女王12年(643)には唐での留学を終えて帰って来た慈蔵法師の勧めで、外賊の侵入を防ぐために九重木塔を建てることになるが、各重ごとに敵国を象徴するようにし、百済の職人阿非知によって645年に完成された。このように皇龍寺は93年間にわたる国家事業として建立された大きな寺で、新羅の3種の宝物のうち、天賜玉帯を除いた二種の宝物が皇龍寺九重木塔と丈六尊像であることからも、皇龍寺がどれだけ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かが窺える。また、「新羅の地はまさに仏が住む地」という新羅人の仏教観がよく現われている場所でもある。しかし、皇龍寺は高麗時代高宗25年(1238)に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全部焼失し、現在はその跡だけが残っている。沼地を埋めてその上に建てた皇龍寺は、中門・木塔・金堂・講堂が南北に長く配置された一塔式配置であった。しかし、丈六尊像と木塔などが建てられた後、金堂左右に小さな金堂が配置される一塔三金堂式に変わり、塔の左右に鐘楼と経楼が対称をなして配置された。また、四方は廊下のような回廊で囲まれ、独特な伽藍配置をなしている。『三国遺事』によると、鐘楼には大きな鐘があったが、モンゴルの侵略によってなくなったと考えられる。1976年から始まった発掘調査で、金銅仏立像・風鐸・金銅耳飾り・各種ガラスなどの4万余点の遺物が出土され、高さ182㎝に及ぶ大型鴟尾から建物の雄大な規模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金堂には率居が描いた壁画があったと伝えられ、木塔の跡で発見された唐の白磁の甕は当時の文物交流についてよく分かる資料である。
[고려]몽골의 침입-11 : 황룡사 9층 목탑의 소실 – Daum 카페
– 생각하건대 궁벽하고 누추한 작은 나라가 반드시 큰 나라에 의탁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시운에 응하여 일어난 우리의 성군(몽골의 대칸)께서 관대하게 번국(변방)으로 대해주시니 어찌 정성껏 복종하지 않으리요. (중략) 대개 지난날 기묘, 신묘 두 해의 강화를 맺은 이후 기대고 의지함이 더욱 굳어졌다고 생각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던 일은 오직 천지신명이 아실 것입니다. 일은 반드시 성취하기가 어렵고 믿다가도 간혹 의심을 사게 되어 도리어 군부(역시 몽골 대칸)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어 문책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략) 이에 메마른 땅의 토산물을 다 긁어 작은 나라의 정성을 바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만 군사의 위협만은 더하지 마시고 옛 풍속을 그대로 지니게 하여주시면, 비록 약소한 해산 방물이나마 해마다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약합니다.
그리고 황룡사의 9층 목탑은 645년(선덕왕 14년)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한 목탑이다. 호국의 상징인 이 탑은 철반 이상이 42척(약 15미터), 그 이하가 183척(약 65미터)으로 전체 높이가 무려 80미터나 되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의 건축기술로도 이런 거대 목조물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데 이것 역시 몽골군의 3차 침략 때 불에 타 없어졌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세번째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고려사> 고종 25년 (1238년) 윤 4월조에 “몽골군이 동경(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란 기록이 남아 있고, <삼국유사>에는 황룡사탑의 소실을 1238년 겨울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몽골군의 침갹이 보통 하절기인 6월에서 8월 사이에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25 thg 9, 2004 —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세번째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고려사> 고종 25년 (1238년) 윤 4월조에 “몽골군이 동경(경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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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그곳 – 21세기, 다시 만나는 황룡사 9층 목탑.20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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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의 침입-11 : 황룡사 9층 목탑의 소실
몽골군의 고려 침략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황룡사 9층 목탑의 소실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과연 이 참사는 언제 벌어졌을까?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세번째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고려사> 고종 25년 (1238년) 윤 4월조에 “몽골군이 동경(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란 기록이 남아 있고, <삼국유사>에는 황룡사탑의 소실을 1238년 겨울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몽골군의 침갹이 보통 하절기인 6월에서 8월 사이에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1238년 겨울 무렵, 몽골군이 경상도 경주 지역까지 남진해 왔고 그 와중에 황룡사와 목탑이 소실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상 외침을 통해 입은 가장 큰 문화적 손실이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에 착공하여 569년(진흥왕 30년)에 완성된 신라의 호국사찰이었다. 이 황룡사에는 신라의 호국삼보인 황룡사 장육삼존불상, 황룡사 9층 목탑, 진평왕의 옥대 중 두 가지인 불상과 목탑이 보존되어 있었으니 호국사찰로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황룡사의 장육불상은 황룡사를 완공한 직후인 573년(진흥왕 34년) 경에 조성한 것으로, 구리 35,007근과 황금 10,198분을 들여 만들었다. 좌우 두개의 협시보살을 조성하는 데만도 철 12,000근과 황금 10,136분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이 황룡사와 함께 붙에 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황룡사의 9층 목탑은 645년(선덕왕 14년)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한 목탑이다. 호국의 상징인 이 탑은 철반 이상이 42척(약 15미터), 그 이하가 183척(약 65미터)으로 전체 높이가 무려 80미터나 되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의 건축기술로도 이런 거대 목조물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데 이것 역시 몽골군의 3차 침략 때 불에 타 없어졌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거대한 목조물이 완전히 재가 되어 타 없어질려면 수십일 동안 계속 불이 꺼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경주는 그동안 대낮처럼 훤하게 밝았으리라.
없어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라 754년(경덕왕 13년)에 주조한 황룡사의 종도 소실되었다. 이 종은 길이가 1장 3촌, 두께는 9촌, 무게는 497,581근으로 봉덕사 종보다 네 배나 큰 것이었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의 소실은 신라 천년의 왕도인 경주와 그곳 백성들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경주는 이후 폐허와 같이 변해버렸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황룡사와 목탑의 소실 사건이 강화도의 고려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사신에게 고종의 표문을 주어 급히 몽골로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황룡사의 소실이 고려 조정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골에 올린 표문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생각하건대 궁벽하고 누추한 작은 나라가 반드시 큰 나라에 의탁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시운에 응하여 일어난 우리의 성군(몽골의 대칸)께서 관대하게 번국(변방)으로 대해주시니 어찌 정성껏 복종하지 않으리요. (중략) 대개 지난날 기묘, 신묘 두 해의 강화를 맺은 이후 기대고 의지함이 더욱 굳어졌다고 생각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던 일은 오직 천지신명이 아실 것입니다. 일은 반드시 성취하기가 어렵고 믿다가도 간혹 의심을 사게 되어 도리어 군부(역시 몽골 대칸)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어 문책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략) 이에 메마른 땅의 토산물을 다 긁어 작은 나라의 정성을 바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만 군사의 위협만은 더하지 마시고 옛 풍속을 그대로 지니게 하여주시면, 비록 약소한 해산 방물이나마 해마다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약합니다.
<고려사>23, 고종 25년 12월.
이 표문을 받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1239년 4월의 일이었다. 이것으로 4년간에 걸친 몽골군의 제 3차 침략은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8년후인 1247년 4차 침략이 있기까지 고려는 휴전 기간을 맞는다.
“광화문 황룡사탑 휘감은 龍…태평성대 꿈꾸다” – 불교신문
서울 광화문 앞 봉축 점등식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한 경기도 양주 한국전통등연구원을 찾은 것은 4월15일. 공모를 통해서 선정된 황룡사9층목탑이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었다. 대형 장엄등 높이만 18m에 이른다. 밑받침까지 포함하면 20m에 달한다. 효율적 작업을 위해 블록형태로 나눠 만들었다. 조립하듯 대형등을 합쳤을 때 전체 비례의 오차를 없애기 위해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캐드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설계에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이후 10여 명의 작가들이 밤낮없이 꼬박 3개월을 붙어 만들었다.
불에 타 사라진 황룡사 구층목탑이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며 상상력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전통등연구원(원장 백창호)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새로 대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세울 때, 황룡이 나타나서 절로 고쳐 황룡사라 하였다”는 유래를 토대로 새롭게 황룡사 목탑을 탄생시켰다. 두 마리의 용이 구층목탑을 휘감는 모습으로 상상력을 더하여 장엄등을 만든 것이다.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광화문 북쪽 광장에는 코로나19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황룡사 구층목탑’ 장엄등이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다.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국가적 위기극복의 희망을 담아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은 고려시대 몽골침입으로 소실될 때가지 오랜 세월동안 호국을 상징해 왔다.
25 thg 5, 2020 — 공모를 통해서 선정된 황룡사9층목탑이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었다. … 어찌 보면 신기루처럼 여겨지는 고려시대 소실된 구층목탑과 사찰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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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황룡사탑 휘감은 龍…태평성대 꿈꾸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장엄등 세워지기까지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광화문 북쪽 광장에는 코로나19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황룡사 구층목탑’ 장엄등이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다.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국가적 위기극복의 희망을 담아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은 고려시대 몽골침입으로 소실될 때가지 오랜 세월동안 호국을 상징해 왔다.
불에 타 사라진 황룡사 구층목탑이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며 상상력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전통등연구원(원장 백창호)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새로 대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세울 때, 황룡이 나타나서 절로 고쳐 황룡사라 하였다”는 유래를 토대로 새롭게 황룡사 목탑을 탄생시켰다. 두 마리의 용이 구층목탑을 휘감는 모습으로 상상력을 더하여 장엄등을 만든 것이다.
서울 광화문 앞 봉축 점등식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한 경기도 양주 한국전통등연구원을 찾은 것은 4월15일. 공모를 통해서 선정된 황룡사9층목탑이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었다. 대형 장엄등 높이만 18m에 이른다. 밑받침까지 포함하면 20m에 달한다. 효율적 작업을 위해 블록형태로 나눠 만들었다. 조립하듯 대형등을 합쳤을 때 전체 비례의 오차를 없애기 위해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캐드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설계에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이후 10여 명의 작가들이 밤낮없이 꼬박 3개월을 붙어 만들었다.
백창호 원장은 “신라는 국가위기 속에서 자립과 태평성대를 일궈 내려는 원력으로 9층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탑을 조성했다”면서 “당시의 바람이 현재의 상황과도 닿아있어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20조각이 넘어, 어느 조각에 등을 밝혀 촬영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어찌 보면 신기루처럼 여겨지는 고려시대 소실된 구층목탑과 사찰의 유래에서 용의 얼굴을 선택했다.
4월30일 불을 밝힌 이 장엄등은 윤사월 부처님오신날인 5월30일까지 서울을 상징하는 광화문광장에서 대광명의 자비의 등으로 시민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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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사찰 황룡사에 우뚝 선 ’80m 랜드마크’와 ‘서라벌판 광화문 …
1976년부터 8년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황룡사의 전모가 드러났다. 장육상과 두 보살상을 모신 중앙 금당(366평)과 동서 금당(각 194평)이 확인됐다. 불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강당(270평)의 모습도 드러났다. 9층 목탑터에도 건물(149평)이 보였다. 종과 불경을 보관한 ‘종루지·경루지’(각 54평)도 확인됐다. 사찰의 문인 중문(59평)과 남문(27평)도 드러났다. 최근들어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동회랑지와 생활공간인 강당 북서편의 발굴 결과를 정리한 조사보고서가 40여년만에 발간되고 있다.|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제공
경주 도심에 조성된 황룡사. <삼국사기>는 “553년(진흥왕 14)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고 전했다. 황룡사는 13년 만인 566년 1차 가람이 마무리됐다. 진흥왕은 6년 뒤(574년) 구리 3만5007근(약 7.6t 추정)과, 도금 1만98푼(약 100냥)을 사용하여 5m에 달하는 불상(장육상)을 조성했다. 이와함께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을 들여 두 보살상을 주조했다.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도 새롭게 건립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1979년 황룡사 강당 뒷편에서 산산조각 난 채로 확인된 치미. 조각들을 접합해보니 전체높이 182cm, 옆너비 105cm에 이르는 초대형 치미였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아래위를 끈으로 꿰어 묶었던 구멍이 있다. 또한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려 배치한 것은 그 유례를 살펴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치미의 크기로 보아 황룡사의 건물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7 thg 5, 2022 —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80m에 이를만큼 신라 천년사직의 상징이자 랜드 … 군의 병화로 황룡사의 모든 전당과 9층 목탑, 장육존상까지 모두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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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상징 \”황룡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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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거대사찰 황룡사에 우뚝 선 ’80m 랜드마크’와 ‘서라벌판 광화문 광장’
신라 천년 사직의 상징인 황룡사는 1238년(고려 고종 25) 고려를 침입한 몽골군의 방화로 전소되어 이후 700여년간 초석만 남은채 방치되어 있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서라벌에 절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삼국유사>가 전한 전성기 서라벌 시내 모습이다.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된 불교가 어느덧 ‘절과 절이 별처럼, 탑과 탑이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서 있을 정도’로 성행했던 것이다.
553년(진흥왕 14)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본래 사찰(寺)로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신라본기’)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황룡사 조영공사는 13년 만인 566년 1차 가람이 마무리됐다. 진흥왕은 8년 뒤(574년) 구리 3만5007근(약 7.6t 추정)과, 도금 1만98푼(약 100냥)을 사용하여 5m에 달하는 불상(장육상)을 조성했다. 이와함께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을 들여 두 보살상을 주조했다.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도 새롭게 건립했다.
경주 도심에 조성된 황룡사. <삼국사기>는 “553년(진흥왕 14)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고 전했다. 황룡사는 13년 만인 566년 1차 가람이 마무리됐다. 진흥왕은 6년 뒤(574년) 구리 3만5007근(약 7.6t 추정)과, 도금 1만98푼(약 100냥)을 사용하여 5m에 달하는 불상(장육상)을 조성했다. 이와함께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을 들여 두 보살상을 주조했다.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도 새롭게 건립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통일을 염원하며 세운 서라벌의 랜드마크
그러나 이것은 리허설에 불과했다. 643년(선덕여왕 12) 황룡사 경내에서 역사적인 불사가 이어진다.
그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이다. 탑의 높이만 약 80m에 달했다니 천년고도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탑에는 백제의 계속된 침략에 고전했던 신라인의 노심초사와 함께 반드시 통일을 이루겠다는 염원이 녹아있다.
탑이 조성되기 직전인 643년 무렵 신라는 누란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백제 의자왕(641~660)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렸고, 급기야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 40여개성이 함락되고 만다.(642년)
645년 백제의 집요한 공세에 40여개성을 잃는 등 누란의 위기에 빠진 선덕여왕은 불심으로 국난을 타개한다는 염원을 안고 9층 목탑을 세운다.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80m에 이를만큼 신라 천년사직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1238년(고려 고종 25) 몽골 침략군의 방화로 황룡사와 9층 목탑은 끝장나고 만다. <삼국유사>는 “1238년 몽골군의 병화로 황룡사의 모든 전당과 9층 목탑, 장육존상까지 모두 소실됐다”고 기록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선덕여왕은 당나라 유학파 승려인 자장(595~658)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완성한다.(645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 침범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한다.”(<삼국유사> ‘구층탑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던 선덕여왕은 불법의 힘을 빌려 위기를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는 높이 80m가 넘는 목탑을 세울 기술자가 없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보내 백제의 탑건축가인 아비지를 ‘스카웃’했다. 아비지는 이간 김용춘(생몰년 미상)이 이끄는 200여명의 신라인과 함께 탑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황룡사의 가람형식은 고구려 양식(1탑3금당)을 따랐다. 황룡사의 조성 기획은 신라, 가람형식은 고구려, 기술은 백제 등의 문화
황룡사의 전체개념도. 황룡사는 회랑까지 포함된 중심사역의 규모만 동서 최대 270m(북쪽은 154m), 남북 186m에 달했다. 면적으로는 8665평이었다. 외곽을 포함하면 황룡사의 전체 규모는 더 엄청났다. 동서 약 281m, 남북 288m이고, 면적은 2만4480평에 이르렀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가 응측된 삼국 공동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목탑은 바닥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22.2m 정도이며 아파트 30층 높이(탑신부 65m, 상륜부 15m 가량)로 추정된다. 당대 서라벌의 모든 건축물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부터 진지왕(576~579)-진평왕(579~632)을 거쳐 645년(선덕여왕 14)까지 93년에 걸친 대역사를 끝내고 신라 천년 사직을 지키는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최근 황룡사 남쪽에서 확인된 광장. 민가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확인된 광장 규모는 길이 280m, 폭 50m 정도인데 ,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광장의 규모는 길이 500m×폭 50m(면적 7600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아닌게 아니라 신라는 9층탑을 조성한지 불과 23년 만에(668년) 삼국통일을 이룬다. 황룡사와, 그 가운데 눈만 들면 보이는 우뚝 솟은 거대한 목탑은 신라인들의 불안했던 마음을 다잡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삼국유사> 등은 “신라에는 황룡사 장육상과, 9층목탑, 천사옥대(진평왕이 신선에게서 받았다는 옥허리띠) 등 나라를 수호하는 3가지 보물이 있다”면서 “이 신라의 3보(寶) 덕분에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신라의 3보’에 황룡사 보물이 두 건이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룡사에는 두 보물 외에도 신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예컨대 <삼국사기>는 “황룡사 금당 벽에는 (그림의 천재인) 솔거가 그린 ‘늙은 소나무 그림(노송도)’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1976년부터 8년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황룡사의 전모가 드러났다. 장육상과 두 보살상을 모신 중앙 금당(366평)과 동서 금당(각 194평)이 확인됐다. 불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강당(270평)의 모습도 드러났다. 9층 목탑터에도 건물(149평)이 보였다. 종과 불경을 보관한 ‘종루지·경루지’(각 54평)도 확인됐다. 사찰의 문인 중문(59평)과 남문(27평)도 드러났다. 최근들어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동회랑지와 생활공간인 강당 북서편의 발굴 결과를 정리한 조사보고서가 40여년만에 발간되고 있다.|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제공
“솔거의 소나무는 뿌리와 줄기가 비늘처럼 주름 잡히고 가지와 잎은 서리어 구불구불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그림을 보고 벽에 날아들었다가 부딪쳐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다른 보물 중에 ‘범종’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754년(경덕왕 13) 왕비인 삼모부인이 49만7581근(약 108t)의 구리를 시주하여 제작(높이 1장3촌·약 3m)했다”고 전했다. 이 범종은 현존하는 성덕대왕 신종(약 26t)의 4배 정도 된다.
황룡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삼국유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자장법사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사리를 세 곳(황룡사 목탑·양산 통도사·울산 태화사)으로 나누어 봉안했다”고 기록했다.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황룡사 북동편 구역 발굴조사(1981~83)’ 내용을 수록한 발굴조사보고서를 40년만에 발간했다. 북동편 지역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어서 흥미를 끈 구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동문, 창고, 승방, 식당 등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39곳과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 황룡사를 드나드는 동문터도 찾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불에 탄 신라의 국보
황룡사와 9층 목탑 등은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의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에는 왕이 친히 황룡사에 나와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법회에 참석하기도 했다.(613·876·887년 등) ‘백고좌’는 사자좌 100개를 만들고 원광법사(541~630?) 같은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는 대규모 법회이다. 또 임금들이 때때로 황룡사가 주최하는 연등회에 참석하기도 했다.(866·890년)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북동편의 한 건물터에서는 50여기에 달하는 대형 항아리가 줄지어 매납되어 있었다. 항아리는 남북방향으로 4열 배치되어 있었다. 승려들을 위한 식자재 창고였을 가능성이 크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우여곡절도 겪었다. <삼국사기>는 “황룡사 창건 후 9년이 지난 575년(진흥왕 36) 장륙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해 가뭄 때문에 고초를 겪었던 백성들의 눈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삼국유사>는 이것을 진흥왕의 서거(576년)와 연관지어 “장육상의 눈물은 진흥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고 해석했다.
목탑은 그 압도적인 높이 때문에 벼락을 맞기도(718·868·953·1035·1095년), 화재가 일어나기도(935년) 했다. 지진 때문에 북쪽으로 탑이 기울기도 했다.(927년) 그 때마다 수리공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1238년(고려 고종 25) 윤 4월 몽골 침략군의 방화로 황룡사와 9층 목탑은 끝장나고 만다.
<삼국유사>는 “1238년 몽골군의 병화로 황룡사의 모든 전당과 9층 목탑, 장육존상까지 모두 소실됐다”고 기록했다.
1981~83년 황룡사 동회랑 조사에서 확인한 폐쇄공간. 각 방의 면적이 평균 12평 가량되는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추정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9층 목탑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했다면?
이후 황룡사와 9층목탑은 700년 이상 전소된 흔적만 남게 됐다. 그 터에는 민가와 전답 등이 들어섰다.
그러던 황룡사와 9층 목탑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된 기상천외한 사건이 일어난다.
1964년 12월17일 도굴범들이 황룡사 목탑터에 놓여있던 10t 가량의 심초석 덮개돌을 지렛대로 살짝 들어올렸다. 이들은 그 아래 사리공 속에서 각종 장엄구를 들어내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덮개돌을 내려놓았다.
도굴사건은 그렇게 2년 가까이 감쪽같이 묻히고 만다. 1년9개월 뒤(1966년 9월5일) 엉뚱한 사건이 터진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범인들이 검거된다.
그런데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실은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엄구도 도굴했다”는 뜻밖의 자백을 받는다. 그때 회수된 도굴품 중에는 훗날 보물로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찰주본기에는 황룡사 목탑 창건 및 중·보수, 수리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사리병과 사리는 끝내 회수되지 못했다.
1978년 7월 28일 황룡사 9층 목탑터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벤트가 열렸다. 14년전 도굴범들이 지렛대로 살짝 들어올린 10t짜리 방형대석(사각형 모양의 돌) 밑에 묻힌 30t 가량의 대형 심초석을 들어올려 옮기는 행사였다. 발굴조사를 위해 포항제철(포스코)이 사용중이던 100t 크레인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이동작전이었다.
1964년 12월 도굴범들이 10t에 달하는 황룡사 목탑터의 심초석 덮개돌을 지렛대(재크)로 들어올린 뒤 그 아래 사리공 속에서 각종 장엄구를 들어냈다. 1966년 9월 범인들은 같은 방법으로 불국사 석가탑 안의 사리장엄구를 빼내려다가 검거된다. 그런데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실은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엄구도 도굴했다”는 뜻밖의 자백을 받음으로써 범행사실이 드러났다. 그때 도굴품 중에는 훗날 보물로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노출된 심초석 자리의 하부에서 상상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제 백자 항아리와 금동귀고리, 거울, 각종 구슬과 수정장식, 청동그릇 등 3,0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이것은 645년 선덕여왕이 목탑을 완성하면서 뿌려둔 공양물이 분명하다.
황룡사와 관련해서 또 한 편의 기막힌 일화가 전해진다.
1979년 1월 4일, 황룡사 발굴현장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불시에 방문한 것이다. 대통령이 고고학 발굴에 관심을 보인다는 측면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이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황당한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9층 탑을 콘크리트로 복원해보세요.”
아니 신라시대 목탑을 복원하는데 콘크리트라니 이게 무슨 망발이었을까.
1978년 7월 28일 황룡사 9층 목탑터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벤트가 열렸다. 14년전 도굴범들이 지렛대로 살짝 들어올린 10t짜리 방형대석(사각형 모양의 돌) 밑에 묻힌 30t 가량의 대형 심초석을 들어올려 옮기는 행사였다. 발굴조사를 위해 포항제철(포스코)이 사용중이던 100t 크레인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이동작전이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러나 1960~70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는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광화문도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됐다.
당시는 ‘콘크리트 공법을 쓰면 1000년을 버틴다’느니, ‘목조일 경우 3년 걸릴 공기가 9개월로 앞당겨진다’느니 하는 논리가 통했던 시절이었다. ‘빨리빨리’ 문화가 ‘콘크리트 맹신’을 낳은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현장은 일순 ‘갑분싸’로 변했다.
콘크리트라니…. 그나마 남은 목탑의 기초마저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9층탑이 선다?
발굴단에서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의 뜻을 거역할 이가 없었다. 일사천리로 예산이 반영되고 설계가 검토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이 ‘콘크리트 9층탑’은 10개월 뒤에 벌어진 10·26 사태로 유야무야 됐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심초석 하부에서 상상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제 백자 항아리와 금동귀고리, 거울, 각종 구슬과 수정장식, 청동그릇 등 3,0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이것은 645년 선덕여왕이 목탑을 완성하면서 뿌려둔 공양물이 분명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2만5000평에 이른 황룡사의 위용
이런 여담을 남긴 황룡사와 목탑터 발굴은 1976년부터 시작되었다. 절터에 자리잡고 있던 민가 100여호를 매입해서 철거한 뒤 본격 조사를 벌였다.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연인원 7만8000명이 동원된 끝에 일단 마무리됐다.
필자가 확인된 황룡사의 전체규모를 문의했더니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이 깔끔하게 정리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그에 따르면 황룡사는 회랑까지 포함된 중심사역의 규모만 동서는 최대 270m(북쪽은 154m), 남북 186m에 달했다. 면적으로는 8665평이었다. 외곽을 포함하면 황룡사의 전체 규모는 더 엄청났다. 동서 약 281m, 남북 288m이고, 면적은 2만4480평에 이르렀다. 한변이 300m에 가까운 정사각 형태의 사찰규모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절 내부에 조성된 주요 건물은 어떤가.
장육상이 들어서있던 중앙 금당(507평)과, 양 옆에 두 보살상을 모신 동서 금당(각 228평)이 확인됐다. 불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강당(337평)의 모습도 드러났다. 9층 목탑터에도 건물(260평)이 보였다. 종과 불경을 보관한 ‘종루지·경루지’(96평)도 확인됐다. 사찰의 문인 중문터(102평)도 드러났다.
1979년 1월4일 박정희대통령은 예고없이 황룡사 발굴현장을 찾아왔다. 박대통령은 이때 황룡사 9층 목탑의 복원문제를 거론하면서 “9층탑을 콘크리트로 복원해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로 일사천리로 예산이 반영되고 설계가 검토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이 ‘콘크리트 9층탑 복원계획’은 10개월 뒤에 벌어진 10·26 사태로 유야무야 됐다.
■황룡사 스님들의 삶은 어땠을까
이와 같은 사찰 중심부 조사와 관련된 발굴조사보고서는 1984년 출간된 바 있다.
그렇다면 회랑과, 승려들의 생활공간까지 포함한 규모가 어떨까.
최근들어 1970~80년대 조사 구역 중 ‘회랑 및 그 외곽(생활공간)’과 관련된 발굴조사 보고서가 잇달아 발간되고 있다.
2019년 발간된 <황룡사 동회랑 동편지구 보고서>는 황룡사 승려들의 개인 수행공간을 확인했다.
즉 동회랑 동편에서 사면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폐쇄공간(각방의 면적은 평균12평 정도)이 보였다는 것이다.
이 독거공간에서는 승려들이 수행하며 불을 밝히는데 쓰인 90여점에 이르는 등잔과 벼루, 중국제 청자 그릇이 나왔다.
1979년 황룡사 강당 뒷편에서 산산조각 난 채로 확인된 치미. 조각들을 접합해보니 전체높이 182cm, 옆너비 105cm에 이르는 초대형 치미였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아래위를 끈으로 꿰어 묶었던 구멍이 있다. 또한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려 배치한 것은 그 유례를 살펴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치미의 크기로 보아 황룡사의 건물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며칠전에는 ‘황룡사 강당 북동편 구역 발굴조사(1981~83)’ 내용을 수록한 발굴조사보고서도 발간됐다.
북동편 지역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어서 흥미를 끈 구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동문, 창고, 승방, 식당 등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39곳과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 사찰 북쪽과 동쪽 경계도 드러났다.
그중 특정 건물터(29호·68.6평)에서는 음식 재료를 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큰 항아리 조각 50여 개가 출토됐다. 식자재를 저장하는 창고로 판단된다. 또 다른 건물터(25호·71평)는 전돌(벽돌)로 축조한 화로 시설이 나와 승려들의 거주 공간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규모가 116평(386㎡)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48호)는 식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태선 중앙승가대교수는 “초기 불교경전에 따르면 식당은 대중이 모이는 공식장소이고, 세간사를 논의하고 가사를 짓는 등의 수공업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황룡사터에서 확인된 다양한 기와들. 귀면와도 눈에 띄지만 황룡사의 이름에 걸맞은 다양한 용문양 유물들이 보인다. 특히 ‘황룡’이라고 새긴 기와가 이채롭다.
■황룡사 광장의 실체
최근 황룡사와 관련된 발굴조사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 있다. 황룡사 남쪽 바깥에서 확인된 광장이다.
이른바 ‘황룡사 광장’은 확인된 구간만 길이 280m×폭 50m 정도인데,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광장의 규모는 길이 500m×폭 50m(면적 7600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의봉 4년명(679년) 당 고종의 연호)’ 기와 등이 확인됐다. ‘의봉’은 당 고종(재위 649~683)의 9번째 연호(676~679년)이다. 따라서 ‘의봉4년’은 679년을 가리킨다. 따라서 광장의 최초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황룡사에서 확인된 다양한 사리장엄구. 황룡사에서는 모두 4만5656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과 자갈 등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280m 정도 확인된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다. 담장은 기와를 얹은 구조였고, 출입문도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을 담당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이민형 연구원은 “너비 1.5m의 담장은 동궁(월지)까지 500m 정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룡사 광장’의 규모는 도로를 제외한 광화문 광장(약 600m×60m) 보다는 약간 작다. 그러나 1300~1400년 전의 서라벌에 조성된 광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황룡사 광장’는 어떻게 활용됐을까. 발굴자와 연구자들은 광화문 광장처럼 서라벌 주민들의 집회 공간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외부 주택단지(가옥군)와 광장을 구별하는 장벽(담장)을 두었기 때문에 100% 열린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신라의 왕과 귀족들이 주관하고 참여하는 각종 이벤트가 열렸을 것이다. <삼국사기> 등에 국가대사가 있을 때 임금들이 친히 황룡사에 나와 대규모 법회(백고좌회)를 열고, 연등회에도 참석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 행사장이 ‘황룡사 광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왕과 왕·귀족이 동궁과 월지와 연결된 문을 통해 황룡사 광장으로 입장했을 것이다.
황룡사터에서 확인된 다양한 금동불상들. 출토된 유물 중에서 불상류기가 40여건 확인됐다. 574년주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장육상의 나발편을 비롯하여,수 십 점의 소형급동물상과 불상편들이 출토됐다.
필자는 윤석렬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 가운데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의 복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증하기 어려운 두 문화유산을 어떻게 복원하겠다는 건지….
그러나 문화재청의 의견에 따라 공약의 비현실성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3D 복원’으로 대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필자는 경주에 갈 때면 광활한 분지에 터만 남은 황룡사의 흔적을 밟고 그냥 거닐어본다.
그렇게 걸으면서 1300~1400년 전 삼국통일의 상징이었던, 혹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와 9층 목탑을 상상해본다.
만약 거기에 콘크리트 흉물이 섰다면 어쩔 뻔 했나.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이 기사를 위해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이민형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원,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 박윤정 문화재청 발굴제도과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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