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386 후기 인상주의 화가 새로운 업데이트 130 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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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 발생 배경과 대표 화가들 – Golden C.

세잔은 사후 몇 년 후에 “형태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라고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대중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라고 매도되었으며 그의 작품도 그의 병에서 온 결과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에 대해 마약에 취해 그린 그림이라는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가 빛의 강조로 인해 잃어버린 형태를 복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원추 등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하고 시점을 다초점으로 분할하였습니다. 세잔은 모티브 사이의 공간 또한 빈 곳이 아니라 견고한 존재 혹은 대기로 인식했습니다. 도시 생활이 맞지 않았던 세잔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풍경화,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습니다. 세잔에게 있어서 풍경은 대자연을 숭배하여 사실적으로 그려내거나 아니면 산이 순간적으로 빛을 받아 변하는 모습을 그리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풍경이란 구성과 평면을 분석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앞으로 나올 큐비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근대 화가일 것입니다.

다른 미술사조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화가들은 인상주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상주의가 순간을 포착하고 빛의 변화에 따른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미술이 화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쇠라, 고갱, 세잔, 고흐 등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입니다. 그들은 인상주의에 반기들 들고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화풍의 근원은 인상주의자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한 인상주의의 화풍보다 견고한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이들 중 쇠라와 세잔은 매우 견고한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로트렉, 고갱, 고흐는 색과 빛을 이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보다 주관적인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쇠라는 점묘법을 사용했고, 세잔은 혁신적으로 색면을 개발했습니다.

쇠라는 점묘화법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그 또한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근대의 생활상을 그리고 색채와 빛을 이용해 대상을 표현했지만 점묘법을 이용하여 그들보다 대상을 보다 견고하게 그렸습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을 이용했습니다. 쇠라의 점묘는 점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채색하고, 멀리서 보면 색상이 혼합되어 보이도록 했던 기존 점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을 인접하여 찍는 것이었고, 이 점들을 멀리서 보아도 서로 섞여서 혼합된 색상이나 분위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보색의 점들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대상들에게 빛을 선사했습니다. 그의 점묘법과 기하학적 분할 기법은 이후 추상미술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4 thg 8, 2021 —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년) ·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년) ·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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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 발생 배경과 대표 화가들

후기 인상주의 발생 배경

다른 미술사조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화가들은 인상주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상주의가 순간을 포착하고 빛의 변화에 따른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미술이 화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쇠라, 고갱, 세잔, 고흐 등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입니다. 그들은 인상주의에 반기들 들고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화풍의 근원은 인상주의자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한 인상주의의 화풍보다 견고한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이들 중 쇠라와 세잔은 매우 견고한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로트렉, 고갱, 고흐는 색과 빛을 이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보다 주관적인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쇠라는 점묘법을 사용했고, 세잔은 혁신적으로 색면을 개발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90 년 )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 뉴욕 근대미술관

반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출생했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강렬한 색, 유화의 붓터치 자국, 율동감을 주로 나타냈습니다. 그의 색채 사용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그의 색채들은 강렬한 색채 대비를 보입니다. 색면 또한 주관적이라 왜곡된 형태로 보기도 합니다. 짧은 붓질로 채워진 면들은 그의 색채 사용이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일정 거리를 떨어져서 보면 색과 빛으로 가득 채워진 모티브들이 보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론 강의 별밤>처럼 별과 물이 이글거리는 표현은 고흐만의 고유의 화법입니다. 그의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 년 )

조르주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86년, ⓒ 시카고미술원

세잔은 사후 몇 년 후에 “형태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라고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대중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라고 매도되었으며 그의 작품도 그의 병에서 온 결과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에 대해 마약에 취해 그린 그림이라는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가 빛의 강조로 인해 잃어버린 형태를 복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원추 등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하고 시점을 다초점으로 분할하였습니다. 세잔은 모티브 사이의 공간 또한 빈 곳이 아니라 견고한 존재 혹은 대기로 인식했습니다. 도시 생활이 맞지 않았던 세잔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풍경화,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습니다. 세잔에게 있어서 풍경은 대자연을 숭배하여 사실적으로 그려내거나 아니면 산이 순간적으로 빛을 받아 변하는 모습을 그리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풍경이란 구성과 평면을 분석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앞으로 나올 큐비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근대 화가일 것입니다.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 1859-91 년 )

쇠라는 점묘화법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그 또한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근대의 생활상을 그리고 색채와 빛을 이용해 대상을 표현했지만 점묘법을 이용하여 그들보다 대상을 보다 견고하게 그렸습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을 이용했습니다. 쇠라의 점묘는 점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채색하고, 멀리서 보면 색상이 혼합되어 보이도록 했던 기존 점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을 인접하여 찍는 것이었고, 이 점들을 멀리서 보아도 서로 섞여서 혼합된 색상이나 분위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보색의 점들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대상들에게 빛을 선사했습니다. 그의 점묘법과 기하학적 분할 기법은 이후 추상미술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년 )

고갱은 화법 뿐만 아니라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 또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설명은 거의 근대식의 주제나 혁신적인 화법에 대한 얘기였지만 고갱은 이들과 조금 다릅니다. 고갱에 대한 설명에는 인간 내면의 심리와 상징이 추가됩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과 상상에 의거한 것들을 색채, 선, 평면성을 이용하여 그렸습니다. 증권거래업자였던 그는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었습니다. 어리지 않은 신인 화가인 고갱은 원시성을 따라 브르타뉴로, 더 나아가 타히티로 떠나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는 강한 명암대조, 강렬한 색상, 기하학적인 윤곽선을 사용하여 원시의 세상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나비파와 상징주의 화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기인상주의

19세기말에는 신인상주의의 체계적인 빛의 묘사에 반발하는 작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여러 경향들을 후기 인상주의라고 한다. 형태에 관심을 쏟은 세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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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미술 | 후기인상파, 이 3가지만 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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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후기인상주의Ⅰ, 빈센트 반 고흐 – 브런치

덧붙이자면, 후기인상주의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후기인상주의가 ‘인상주의의 후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기’라는 말이 붙어있으니 ‘후반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는 번역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는 영어의 Post-Impressionism을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Post-‘는 ‘~의 이후의 무엇’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원어의 의미에 맞게 다시 번역한다면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예를 들어, ‘Post-트럼프’라고 하면 트럼프 대통령 정치 활동의 후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퇴임 이후 뽑힌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부르는 말이다. 사실 이런 오해는 번역 과정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 ‘Post-‘는 아무래도 서양식 표현이기 때문에 정확히 일대일 대응시킬 만한 말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들은 그래도 많이 조화로워진 것 같습니다. 느끼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림에는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쯤 어디선가 읽었던 글에서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기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과거에는 항상 아이를 낳는 일이 훨씬 자연스럽고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 글이 말하는 것처럼 아이 낳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같은 일이라면 -아기 낳는 일에 대해서 내가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제 일에 목숨을 걸고 극단적으로 매달리는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아직은 그림에 대해 조금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요. 그래도 그림만이 저의 과거와 저의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것 같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에는 목사가 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고흐는 워낙 자기 고집도 강했고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그렇게 균형감각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목사가 되기 위해 일단 신학대학을 먼저 졸업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고흐는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 광부들에게 전도를 시작하는 식으로 성직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쾌적하게 살면서 힘든 삶을 사는 광부들에게 전도활동을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은 노숙자들에게 양보하고 짚더미에서 누추하게 생활하며 전도했다. 이 사건은 고흐가 어떤 성품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제도권 교단의 입장에서는 정식 목사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튀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성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19 thg 10, 2022 — 고흐는 미술사 전체로 봐도 손꼽히는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왠지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예술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예술활동을 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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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tle Website: 04화 후기인상주의Ⅰ, 빈센트 반 고흐 – 브런치
  • Description Website: 19 thg 10, 2022 — 고흐는 미술사 전체로 봐도 손꼽히는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왠지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예술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예술활동을 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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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inute art history] Easily Understand Post-Impressionist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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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후기인상주의Ⅰ,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후기인상주의

인상주의의 등장 이후, 파리의 미술들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고전 회화의 형식이 깨지면서 갑자기 한 번도 본 적 없던 여러 다양한 미술들이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인상주의 직후 짧은 기간 동안 등장한 다양한 미술들을 하나로 묶어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너무 다양해서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미술들’을 모아서 하나로 억지로 묶은 것이다.

후기인상주의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이 중에서 특히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그리고 폴 세잔 이렇게 세명의 예술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후기인상주의에서 특별히 이 세명을 꼽는 이유는 이후 미술사에 각자 또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흐름, 고갱은 원시주의Primitivism의 흐름, 그리고 세잔은 입체주의Cubism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덧붙이자면, 후기인상주의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후기인상주의가 ‘인상주의의 후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기’라는 말이 붙어있으니 ‘후반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는 번역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는 영어의 Post-Impressionism을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Post-‘는 ‘~의 이후의 무엇’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원어의 의미에 맞게 다시 번역한다면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예를 들어, ‘Post-트럼프’라고 하면 트럼프 대통령 정치 활동의 후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퇴임 이후 뽑힌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부르는 말이다. 사실 이런 오해는 번역 과정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 ‘Post-‘는 아무래도 서양식 표현이기 때문에 정확히 일대일 대응시킬 만한 말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표현주의의 흐름, 빈센트 반 고흐

후기인상주의에서 가장 먼저 설명할 예술가는 빈센트 반 고흐다. 예술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고흐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 그만큼 고흐는 미술사 전체로 봐도 가장 중요한 예술가다. 하지만 여전히 고흐의 그림이 왜 그토록 유명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위의 ‘붉은 포도밭’을 보면 고흐의 거친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는 미술교육을 별로 받지 않은 사람의 ‘투박한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고흐에 대해 ‘다들 유명하다고들 하니까 유명한 화가’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의 그림을 두고 대단하다고들 하는 것일까. 고흐의 그림에는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루벤스 ‘예수의 채찍질당하심’ 1618,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 성당’ 1890

서두에 고흐는 ‘표현주의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고흐의 미술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표현주의 미술의 시초라고 보기 때문이다.

표현주의 미술은 간단히 말하면 감정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감정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과거에는 한 번도 없던 그림 그리는 방식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과거의 그림들은 사과든 나무든 항상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나 고통 같은 ‘인간의 감정’은 사과처럼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까 당연히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런데 고흐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과거의 그림에서 인간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를 비교해 보면 된다. 왼쪽 루벤스의 ‘예수의 채찍질당하심’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여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연극이나 드라마와 비슷한데, 잘 설정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연기와 표정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고전회화에서는 주로 이렇게 연출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의 그림은 어떨까. 오른쪽 고흐의 그림을 보면 시골 성당과 그 앞 오솔길을 지나가는 여인을 그린 것이 전부다. 그래서 내용만 보면 인간의 ‘고통’이라는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꿈틀거리는 그림에는 이미지 자체로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가 있다.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있는 성당, 뒤틀린 하늘과 길, 전체적으로 왜곡된 원근법, 거친 붓질, 그리고 낮과 밤이 뒤섞인 듯한 비현실적인 색채에서 우리는 묘하게도 어떤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고흐가 말년에 느꼈던 외로움, 혼란스러움, 그리고 고통의 감정이 꿈틀거리는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흐의 그림이 가진 표현주의 미술의 특징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그려진 대상에서 흘러나와 우리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다.

위의 두 그림 중 어떤 그림이 더 인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우열을 가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고흐의 그림은 분명 다른 의미에서 설득력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1889

다른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두 번째 그림은 고흐의 가장 대표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의 내용 자체는 밤하늘에 뜬 달과 별,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마을을 그린 것이 전부다. 만약 이 그림의 테크닉에 관해 말한다면, 고전회화의 우아하고 섬세한 테크닉과 비교해 보면 거의 테크닉이 없다고 말해도 될 만큼 거칠게 그려진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흐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테크닉이 아닌 ‘감정의 이미지화’라는 현상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고흐가 생 레미의 병원에 치료를 받을 때였다. 아마도 늦은 밤 병실에서 혼자 창문 밖을 바라본 주변 마을의 풍경일 것이다. 그림에서는 하늘이 급류처럼 휘몰아치는 것으로 보이고, 사이프러스 나무는 구불거리고 있으며 이와는 대비되는 마을의 풍경 자체는 매우 차분해 보인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고흐가 병실에서 밤에 혼자 느꼈을 외로움과 정신병으로 인해 계속 혼란스러워했던 감정을 전달받게 된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대상의 모습이 아니라 고흐의 감정과 대상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고흐의 ‘감정’을 ‘눈으로 본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두 그림 외에도, 고흐의 수많은 그림들에서는 그려진 대상과 고흐의 감정이 서로 뒤섞여 그려져 있다. 이것이 고흐의 표현적 미술의 특징이다. 때문에 고흐의 표현적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반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고전 회화에서 느꼈던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거칠게 이미지화되어 있는 ‘표현적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에드바르드 뭉크 ‘절규’ 1893

고흐의 유산

미술사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감정이 미술을 통해 직접 ‘시각화’ 하는 현상은 고대, 중세, 근세, 그 어떤 미술사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방식이다. 때문에 시각예술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표현방식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고흐의 방식은 이후 후배 예술가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며 계속 퍼져나가게 된다.

고흐의 표현 방법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미술이 바로 뭉크의 ‘절규’로 유명한 표현주의Expressionism다. 뭉크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뭉크의 ‘절규’에서 나타나는 구불거리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고흐 말년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후 그 뭉크를 이어받은 독일 표현주의의 다리파와 청기사파, 그리고 이들 다음에는 소위 ‘뜨거운 추상’으로 알려져 있는 칸딘스키, 그리고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까지 계속 그 영향력이 퍼져 나가게 된다.

아마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매력적인 표현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결국 예술가의 내적 세계의 확장이기 마련인데 예술가들은 고흐를 통해 자신을 직접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주의의 방식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표현적 미술의 등장 이유

그렇다면 고흐는 왜 갑자기 ‘표현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일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흐는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자신의 그림에 자신의 감정이 표현되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이후 이를 아예 의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사연 많은 인생을 살펴보면 표현적 미술이 나타난 것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 한 이후 평범한 삶은 거의 누리지 못했다.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사랑도 계속 실패했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했다. 고흐는 언젠가 한번 먼 친척이었던 케이라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졌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말하길 ‘만약 내가 그녀와 결혼을 했다면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는 평범한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 본인 스스로는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듯하다. 하지만 예술을 시작한 이후에는 예술에만 너무 몰두된 삶을 살았고 인간관계도 점점 단절되면서 결국 극도의 외로움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고흐는 이렇게 고립된 삶을 살 지내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오히려 더 붓에 의존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감정이 그대로 그림에 표현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학대를 받은 아이의 그림이 섬뜩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그림에 자신의 감정이 표현되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을지도 모르지만 고흐는 스스로 그 현상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표현적 미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흐의 표현적 미술은 결국 고흐 마음의 표현이므로 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대중 매체에서도 고흐의 예술에 관해 다룰 때 이론적 해석보다는 주로 그의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고흐의 삶의 이야기들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고 있다)’ 1889,

몇 가지 오해

그런데 고흐의 삶에 관해서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고흐가 ‘미치광이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이는 고흐의 예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잘못 생각하면 고흐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광적이고 표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흐는 전혀 미치광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교양인에 가까웠다. 아마도 고흐에 대한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고흐가 고갱과 다툰 이후 갑자기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는 스토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흐가 미치광이여서 그랬다기보다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고흐는 정신병 때문에 가끔 정신이 엇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병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병을 고치고 싶어 했다. 동생 태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종종 병에 대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흐는 정신이 엇나갔을 때는 물감을 쭉쭉 빨아먹었을 만큼 이상한 행동을 보였지만, 멀쩡히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또 고흐는 평소에도 독서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테오와의 편지를 보면 삶과 문학, 인간에 대해 매우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생전에는 무명이었던 고흐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들 때문인데, 그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정리된 문체 자체로 그가 교양인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동생 테오는 형의 삶에 대한 태도와 식견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라 빈센트로 지어주었다. 만약 고흐가 정말 미친 사람이었으면 태오가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물려주면서까지 존경을 표현했을 리는 없다.

생각보다 짧은 활동기간

또 한 가지는 생각보다 짧은 기간 동안 예술활동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미술사 전체로 봐도 손꼽히는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왠지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예술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예술활동을 했던 기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했다. 물론 화가가 되기 전에도 그림은 꾸준히 그렸지만, 정식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27세가 되던 해였고 이는 여느 예술가들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에는 목사가 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고흐는 워낙 자기 고집도 강했고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그렇게 균형감각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목사가 되기 위해 일단 신학대학을 먼저 졸업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고흐는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 광부들에게 전도를 시작하는 식으로 성직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쾌적하게 살면서 힘든 삶을 사는 광부들에게 전도활동을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은 노숙자들에게 양보하고 짚더미에서 누추하게 생활하며 전도했다. 이 사건은 고흐가 어떤 성품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제도권 교단의 입장에서는 정식 목사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튀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성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성직자가 되는 것 마저 좌절된 고흐는, 27세가 되는 1880년에야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고흐는 한평생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로 모든 생계를 동생으로부터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고흐는 이렇게 37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1890년까지 약 10년 동안 그림에 몰두하여 살아갔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고흐는 자살했을까

또 한 가지는 고흐가 정말 자살로 생을 마감했느냐이다. 고흐의 자살은 가뜩이나 비극적이었던 그의 삶에 마침표를 찍어준 느낌이지만, 이후에는 이 비극적인 스토리는 그의 예술가적 명성을 더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준 측면이 있다. 현대에도 젊은 음악가나 예술가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일종의 ‘위대한 결말’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그 기원은 고흐일 것이다. 고흐 이전의 유명한 예술가들을 찾아봐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술가는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고흐의 자살은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그가 사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된 것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흐의 자살 이야기는 그가 외로움과 정신병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들판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위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고흐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인데 아마도 고흐는 저 밀밭 주변 어디에선가 총에 맞았을 것이다. 1890년 7월의 뜨거운 여름날, 고흐는 총상을 입은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급히 달려온 의사가 배에 박힌 총알은 빼내었지만, 결국 침대 위에서 이틀 반 정도 살아있다가 숨을 거두게 된다. 동생 테오가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소식을 듣고 바로 파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르게 고흐가 타살된 것이라는 주장은 고흐가 어느 동네 청년에 의해 사고로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다. 고흐가 살던 마을에는 말없이 그림만 그리는 고흐를 계속 괴롭히던 ‘르네 세크레탕’이라는 청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청년은 고흐의 물감에 고춧가루를 타거나 뱀 장난감을 던지는 등 자주 고흐를 괴롭혔는데 어느 날 르네가 고흐에게 장난을 치다가 우발적으로 쏜 총에 고흐가 맞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고흐가 들판에서 총상을 입었지만 거기서 죽지 않고 굳이 피를 흘리며 2Km 이상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점, 그리고 총상이 가슴 쪽에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는 관자놀이나 턱을 쏘니까 자살을 의도한 총상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살하기 전날에도 대량의 물감을 주문한 영수증이 발견되었는데 자살을 계획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물감을 주문했을 리가 없다는 점 등이다.

그렇다면 만약 타살이라고 가정했을 때, 고흐는 왜 이틀 반동안이나 살아있었으면서 르네 세크레탕이 쏜 총에 맞은 것이라고 경찰에게 말하지 않은 것일까. 추측하는 바로는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 살인죄로 감옥에 가느니 당시만 해도 예술가로 전혀 성공하지 못한 자신이 그냥 자살한 것으로 덮고 끝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끝까지 입을 다물고 죽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고흐의 ‘신화’와는 상관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자살설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고흐가 자살하지 않았고 르네 세크레탕이라는 청년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것이 고흐의 품성을 더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흐는 평소에도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인물화를 많이 그렸고,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고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광부를 전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어 했을 만큼 인간에 대한 고뇌가 많았던 고흐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그런 결정을 했다 해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고흐는 1890년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들판에서 총에 맞은 후 피를 흘리며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틀 동안 침대에 누운 채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고흐의 소식을 듣고 파리에서 급한 마음에 달려온 동생 테오의 품에서 고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슬픔은 영원하다”였다고 한다. 고흐가 평소에도 편지를 통해 테오에게 말해왔던 것처럼 예술에 모든 인생을 바치고 얻은 것이라고는 피폐한 삶뿐이었고 결국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고흐가 자신이 후대에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게 될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지를 알았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테라스’ 1888

고흐의 편지

아래는 고흐의 수많은 편지 중 어머니께 보냈던 편지다. 고흐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고흐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저런 설명보다는 그의 편지 한 장이 그를 더 정확히 보여준다. 이 편지는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1890년에 쓰였다.

어머니께

어머니께서 지난 편지에서 누에덴에서 어머니가 한때 가지고 있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 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남겨주신다고요.

유리벽 너머로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렇게 흐릿하게 남아있습니다. 지나온 삶 속에서 왜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사는 내내 계속 지속되었던 삶에 대한 혼란스러움 조차… 저는 이렇게 유리벽 너머로 보는 것처럼 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마 계속 이렇게 외롭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저는 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조차도 이렇게 유리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대할 수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들은 그래도 많이 조화로워진 것 같습니다. 느끼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림에는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쯤 어디선가 읽었던 글에서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기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과거에는 항상 아이를 낳는 일이 훨씬 자연스럽고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 글이 말하는 것처럼 아이 낳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같은 일이라면 -아기 낳는 일에 대해서 내가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제 일에 목숨을 걸고 극단적으로 매달리는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아직은 그림에 대해 조금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요. 그래도 그림만이 저의 과거와 저의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마을에는 많은 화가들이 살고 있습니다. 옆집에 사는 가족은 미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밖에서든 안에서든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그들의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은 좀 약하다고 느껴지곤 했던 것 같습니다.

테오와 제수씨와 조카는 지난 일요일 날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의사 가셰 씨의 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조카는 여기서 ‘동물의 왕국’을 처음 본 모양입니다. 여기는 고양이 여덟 마리, 개 세 마리, 그리고 닭, 토끼들, 오리들, 비둘기들이 꽤 많이 있거든요. 조카가 이 모든 걸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조카는 꽤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테오와 제수씨 조Joe도요. 이렇게 동생네 가족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안심이 되는 기분입니다. 어머니도 테오네 가족을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보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어머니와 동생 윌 모두 잘 지내길 바랍니다.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당신이 사랑하는,

빈센트.

1890년 6월 12일

모더니즘 페인팅에서의 상징성

고흐는 후기인상주의의 대표 예술가이자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든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표현주의의 경향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모더니즘 페인팅의 마지막이었던 추상표현주의에까지 이어지니까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흐는 중요한 예술가다.

한편 덧붙이고 싶은 것은 고흐라는 예술가가 모더니즘 페인팅에서 가지는 상징성이다. 고흐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마치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인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예술 창작에만 몰두했다. 가난도, 세간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오로지 예술을 창조하는 것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태도를 Art for Art’s sake,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한다. 세상과 분리된 채 가장 순수한 목적의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게 된다.

결국 이 태도는 이후 모더니즘 페인팅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더니즘 페인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가장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 태도를 가장 먼저 보여준 예술가가 바로 고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향은 모더니즘 페인팅의 후반기로 갈수록 계속 강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고흐는 모더니즘 페인팅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탈인상주의 – 나무위키

17 thg 12, 2022 — 탈인상주의 4인방(쇠라, 세잔, 고흐, 고갱)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일 것이다. 고흐의 작업은 그 일렁이는 듯한 강렬한 붓터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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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신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모네,쇠라,고흐,고갱,세잔/인상주의의 역사와 흐름을 간략하게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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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인상주의 – 월간미술

일반적으로 모네Claude Monet(1840~1926),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누아르Auguste Renoire(1841~1919), 루소Henri Rousseau(1577~1640)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주의*로의 길을 열었고, 반 고흐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써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주의*로의 길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의의가 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프라이Roger Fry(1866~1934)가 1910~19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 개최한 전시회인 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그러나 특정한 예술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Post-Impressionism(영)

후기인상주의 後期印象主義

9 thg 4, 2014 — …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 명만을 가리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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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 미술 | 🎨디테일이 살아있는 후기인상파 총정리! 이것만 알아도 자신감 뿜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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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인상주의 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영)

영국의 미술평론가 프라이Roger Fry(1866~1934)가 1910~19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 개최한 전시회인 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그러나 특정한 예술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Claude Monet(1840~1926),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누아르Auguste Renoire(1841~1919), 루소Henri Rousseau(1577~1640)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주의*로의 길을 열었고, 반 고흐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써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주의*로의 길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의의가 있다.

후기 인상주의 ( Post Impressionism ) – 미술용어 – 화가 진상용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Nevermore》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켜나간다. 그가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삶은 원시의 세계에서 시작되었으며, 타히티 섬은 그에게 원초적 감성을 제공해 주는 예술의 근원지였다. 산업문명의 발달이 점차 인간의 순수성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던 고갱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순수성을 타히티 섬의 원시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색적인 색채와 강렬한 이미지, 그것이 곧 고갱의 작품 세계를 이끄는 중심이었다. 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 순수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떨림에 귀 기울였다.

흔히 고갱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들 수가 있다. 고갱 스스로가 ‘나의 혈관 속에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첫째는 그의 혈통, 둘째는 그의 결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화가로서의 천직에 대한 눈뜸이 그것이다. 1865년 (17세)에 그는 견습 항해사로서 상선에 승선, 리오데 자네이로까지 가기도 했으며, 좀 뒤늦게이기는 하나(1887년) 파나마로 떠나기도 했다. 1855년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3년동안(1868~1871)의 병역도 무난히 마친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1871년 4월에는 증권 주식회사인 베르텡 상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 2년 후 1873년에 그는 덴마크인 인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한다. 예술의 마(魔)가 그를 사로잡았던 그때 고갱의 나이는 35세(1883年)였으며,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기엔 또한 이미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은 결코 객기에 의한 젊음의 충동 때문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유년기의 경험이 예술의 이념으로 발전한 심사숙고의 결과요, 그것이 가져올 갖가지 희생을 충분히 의식하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의 결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흐가 살다간 세기말은 우울한 시대였다.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가 시대적인 방황을 틈타 등장했으나, 이들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했던 고흐에게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절망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그들의 빛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태양은 그의 내적 세계를 신과 연결시켜 주는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태양의 그림이 등장한다. 회오리치는 듯한 그의 태양들은 정신적인 혼돈의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 갈등의 폭만큼이나 거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이 있다.

28 thg 10, 2005 — 세잔(Paul Ce`zanne, 1839~1906),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추구해 온 회화에 있어서의 전위는 후기 인상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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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_4편(후기 인상주의 ~ 표현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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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 ( Post Impressionism )

후기 인상주의 ( Post Impressionism )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어떤 특정한 예술 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세잔(Paul Ce`zanne, 1839~1906),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추구해 온 회화에 있어서의 전위는 후기 인상파(post-Impressionism)이전의 미술에 대한 일종의 규칙성을 깨뜨림과 동시에, 화면에서의 표현을 보다 자유롭게 제시해 놓았다. 이들이 이룩한 화면에서의 자유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탈피로써 시작된다. 그것은 색채의 해방과 형태의 데포로마시옹(Deformation)으로 부터 화면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내면의 정신세계로부터 출발한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이념이 오늘날의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해 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인상주의 전시 이후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세잔은, 자연을 대상으로 그의 예술의 문제점들을 탐구하게 된다. 그는 빛에 따른 자연의 표정보다는 더욱 깊은 곳을 통하고 있는 견고한 실제 감을 파악하는데 창작의 열을 쏟는다. 그것은 물체의 세계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형의 짜임새를 화면에 균일하게 질서화 시켜 구도를 단순화하여 갔다. 일반적으로 모네, 피사로, 시슬리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노아르, 루소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 반 고호, 고갱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세잔느는 인상주의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파에의 길을 열었다.

고호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파에의 길을 열었다.

고갱은 남방의 색채와 미개한 생활을 대상으로 판화, 목조, 유화 등 수많은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2년간 머물면서 ‘타히티의 여인’등의 작품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 왔으나, 작품도 팔리지 않고, 평판도 좋지 않아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는 것 이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었고, 1901년에는 도미니크(Dominiqui)섬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갱이 남긴 작품은 이국적인 인간 환경을 그린 최초의 근대 화가임은 물론, 그의 작품에 빛나는 색채와 단순화된 인물의 평면성은 고겡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들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이 후기 인상주의란 말의 의의가 있다.

폴 세잔느 ( Paul Cezanne : 1839.1.19~1906.10.22 )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 (Aix-en Provence)에서 태어 났다. 모자제품업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을 아버지로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엑스의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집념 하고 1861년 파리로 나와서 아카데미`스위스 (Academi Suisse)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여기에서 기요맹, 피사로와 만난다.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861년과 1862년의 에콜`데`보자르(Ecole des Beaux-Arts)입학에 실패하며 그 사이 고향과 파리 사이를 오가면 서도 그림의 길을 걷는다. 이어 보불전쟁을 거친 다음 1872년 부터 1874년에 걸쳐 파리에 가까운 폰트아스에 가서 피사로 를 방문하고 그 감화를 받아 갑갑한 작풍을 일변하여 색채는 밝게 하고 구성도 강한 질서를 잡고 있다. 제1회 인상파전 에는 ‘목매다는 집’, ‘오란피아’, ‘오베르 풍경’등을 출품했다. 세잔의 작풍은 이 무렵을 고비로 전기와 후기 로 나눌 수가 있다. 드디어 파리생활로부터 떠나 후기는 주로 액스`앙`프로방스로 돌아가 그 부근의 자연을 묘사하게 된다.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품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18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후기는 인상파풍의 밝은 빛과 색으로부터 떠나 무거운 겨울하늘과 같은 색감을 즐겨 그리게 된다. 변하기 쉬운 빛에 따른 자연의 표정은 세잔에게 관심밖의 것이었으며 그 보다는 더욱 깊은 곳을 통하고 있는 부동의 실재감을 파악하는데 그의 창작의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즉 빛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체의 형체의 세계에 깊이 파고들어 그러한 형체의 짜임새로 화면위에 고르고 비밀스럽게 질서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불필요한 잡물을 제거하고 주요한 요소로 압축하여 가게 된다. 즉 구도를 단순화하여 가게 된다.

1895년 세잔은 화상 보라르(Vollard, Ambroise)의 점방에서 그 생애에 단 한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은 일반에게 냉담한 것이었으나 일부의 유식층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1904년 살롱`도톤느에 작품의 특별진열실이 설치 되게 되고 명성도 높아지자 인상파에 만족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세잔의 새로운 예술에 눈뜨기 시작했다. 다음해에는 살롱`도톤느와 앙데팡당의 두 전시장에 작품을 출품하는 한편 7년동안 감각의 주체성을 추구한 ‘욕녀’를 완 성하는등 그 정진을 계속하던중 1906년 10월 풍경을 그리다가 소나기를 만나 넘어진 후 수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자연을 아낌없이 통찰한 세잔은 ‘모든 자연은 그 깊이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단순히 밝게 빛나는 광선을 멀리했다. 이점은 한 때 인상파화가였던 세잔과 그 밖에 다른 인상파화가들과 다른 점이다. 때문에 만년의 그는 겨울철의 구름낀 날을 도리어 사랑했고 서있는 나무도 말라죽은 나무의 모습이 형체로서 확연하게 파악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과 집을 그린다 해도 화면의 구조로서 가장 중요한 형체의 부분만을 집약하고 필요없는 형상은 버렸다. 이와 같은 단순화의 방향은 추상화에 기울게 된다.

‘욕녀’에서 그러하거니와 ‘생트`빅트와르산(Mt. Sainte Victoire)’ 에서도 그러했다. 본래 이 산은 3각형으로 되어 있는 데서 구도는 화면의 중앙에 두고 그려가고 있는데 근경의 수목과 집들은 대담하게 처리하여 이 산을 노출시킬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전체를 통일있는 구도로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간은 집약적인 구도를 반복하여 그려나가는 사이에 단순화의 빈도는 더욱 거듭하여 결국 3각형, 4각형등의 기하학적 원형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느낀 세잔은 ‘자연은 구, 원뿔, 원기둥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이 말은 후대에 크게 영향을 주어 입체파라는 새로운 회화운동이 일어날 계기를 마련한다. 그처럼 세잔이 파악한 순수한 자연의 형체는 단순히 눈에 비치는 형이 아니라 그 형을 중심으로 회화적인 구도가 만들어지는 세잔 자신의 감각적인 형이었다.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세잔이 느끼고 세잔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산이 거기에 포함되게 된다.

인상파의 회화, 가령 모네의 작품에 보였듯이 빛에 의한 색감속에 주관성이 강조되었듯이 세잔에 의한 자연의 형체는 화가의 주관성이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즉 회화가 객관적이 사생으로부터 주관적인 감각의 표현으로 나가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세잔이 세상을 떠난 1906년은 근대회화가 최고의 정상에 도달하고 19세기와 결별함과 동시에 20세기의 막을 연 것을 뜻하게 된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자화상》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 《생트빅트와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폴 고갱 ( Paul Gauguin : 1848.6.7~1903.5.8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폴 고갱은 다른 예술가와 달리 고호(Vincent Van Gogh)가 화가가 되기전 목사를 지망했던 것처럼, 35세의 나이로 예술 외적인 우회적(迂廻的)삶을 보낸 작가이다. 폴 고갱이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하자, 얼마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였던 그의 부친은 피신하게 된다. 부친의 피난길에 일가족이 따라나선 것이 남미(南美)의 페루에 있는 리마(Lima)행이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여행 도중 부친은 사망하지만, 그곳에서 눌러 살게 된 4년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폴 고갱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7세의 나이로 남미에서 남불 오르레앙(Orleans)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 신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자기 이성과 감성에 맞지 않는 위선적인 덕행에 강렬한 반발을 보인다.

흔히 고갱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들 수가 있다. 고갱 스스로가 ‘나의 혈관 속에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첫째는 그의 혈통, 둘째는 그의 결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화가로서의 천직에 대한 눈뜸이 그것이다. 1865년 (17세)에 그는 견습 항해사로서 상선에 승선, 리오데 자네이로까지 가기도 했으며, 좀 뒤늦게이기는 하나(1887년) 파나마로 떠나기도 했다. 1855년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3년동안(1868~1871)의 병역도 무난히 마친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1871년 4월에는 증권 주식회사인 베르텡 상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 2년 후 1873년에 그는 덴마크인 인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한다. 예술의 마(魔)가 그를 사로잡았던 그때 고갱의 나이는 35세(1883年)였으며,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기엔 또한 이미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은 결코 객기에 의한 젊음의 충동 때문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유년기의 경험이 예술의 이념으로 발전한 심사숙고의 결과요, 그것이 가져올 갖가지 희생을 충분히 의식하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의 결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Nevermore》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켜나간다. 그가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삶은 원시의 세계에서 시작되었으며, 타히티 섬은 그에게 원초적 감성을 제공해 주는 예술의 근원지였다. 산업문명의 발달이 점차 인간의 순수성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던 고갱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순수성을 타히티 섬의 원시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색적인 색채와 강렬한 이미지, 그것이 곧 고갱의 작품 세계를 이끄는 중심이었다. 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 순수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떨림에 귀 기울였다.

세잔이 자연을 기본적인 조형 질서로 재창조하면서 자연에 충실했던 화가였다면, 고갱은 그 자연을 철저하게 외면하고자 했던 화가였을지 모른다. 고갱 역시 인상주의 양식의 영향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그는 타히티 섬의 원시림에 묻혀 강렬한 색채와 인간을 통한 근원적인 상징성을 부여하며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다. 그래서 고갱을 ‘고귀한 야만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고갱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많이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곳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였다. 고갱은 타히티 섬에 머물며 원주민들과 직접 생활하고, 서서히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갔다.

내면적인 감정에 충실한 화가 고갱의 일탈은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캔버스 위에서 시작한다. 인상주의 화풍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 세계는 점차 풍부한 색채와 단순한 선으로 원시의 세계를 탐닉하게 된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는 있었지만 고갱은 그 원초적인 욕구에 순응했다.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은 오직 남태평양에 유유히 떠 있는 타히티 섬이었다. 고갱은 그 깊은 원시림에서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고 새롭게 눈을 떴다. 타히티에서 고갱에게 주어진 삶은 오로지 미술을 통한 예술세계 뿐이었다. 문명의 이기가 낳은 얼룩진 유럽을 벗어나 고갱의 심장에는 열대지방의 정적이 안겨 주는 아름다운 맥박의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갱은 이 체험을 신비감으로 자연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소재는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도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문명과 단절된 고립의 생활, 하지만 그곳엔 자연이 제공하는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 정립되었던 시기는 1886년에서 1890년 사이이다. 정처없이 떠돌았던 끝없는 여행, 여행 끝에 남겨진 갖가지 시련을 극복해 낸 고갱의 회화 양식은 ‘종합주의’로 불리운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장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할되거나 점묘에 의한 필촉 대신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의 색면과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굵직하게 둘러쳐진 윤곽선을 통해 그는 양감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회화의 평면화와 장식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 세계가 갖는 독창성은 단지 평면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면화와 동시에 그 안에서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주의로 귀착된다.

그리고 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고갱은 일본판화에서 엿볼 수 있는 단순한 선과 색채를 자신의 화폭에 차용했다. 이로써 연출되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공간은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갱은 타히티 이전에 페루나 마나마, 마르티니크, 브르타뉴 등의 체재 경험을 통해서 원초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질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다. 고갱은 당시의 세계 전람회 경험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나아가고자 했던 결정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연출해 낼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경험의 산물은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어 때로는 낭만주의적이거나 원시주의적인,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다양한 체험의 흔적들이 남게 된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이기까지 한 고갱의 작품에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진실이 숨어 있는 듯하다. 고갱은 강렬한 원색의 색채와 선의 표현으로 관찰되어진 현실의 세계를 과장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종합주의를 지향했다. 이 때문에 고갱의 작품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명과 원시의 대립이라는 주제 속에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훗날 다른 동료 화가들, 특히 고호와의 공동 생활의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면이라 하겠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후기인상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20세기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입지를 확고히 했다.

빈센트 반 고흐 ( Vincent van Gogh : 1853.3.30~1890.7.29 )

1853년, 네덜란드 남쪽의 작은 마을 프로트 준데르트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점원이라는 직업은 그의 격정적인 성격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목사가 되기를 결심한 그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전도사의 길을 걸으며 미래의 자신을 준비하지만 그 역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프랑스의 아를르에 정착하면서부터 고흐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미 그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선 시기였다. 북프랑스의 오베르에 있는 가셰박사의 병원 생활과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4~5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진정으로 찾아 헤맸던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1879~1880년경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고흐는 데생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수많은 습작으로 데생에서 가능한 모든 테크닉을 익히고 실험했다.

188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색조는 은은한 서정성과 함께 어둡고 두터운 색조를 보이며 변화를 꾀한다.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된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 파리에 정착하면서 활짝 피기 시작했다. 색조를 분할하고,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어지럽게 진동하는 붓의 터치는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인물 중심의 풍속화]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쌩 레미를 떠나 오베르 쉬르 와즈로 간 고흐는 의사 가셰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준비한다. 그는 일시적인 진정의 상태를 맞이했지만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이성을 잃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포비슴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고흐가 살다간 세기말은 우울한 시대였다.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가 시대적인 방황을 틈타 등장했으나, 이들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했던 고흐에게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절망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그들의 빛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태양은 그의 내적 세계를 신과 연결시켜 주는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태양의 그림이 등장한다. 회오리치는 듯한 그의 태양들은 정신적인 혼돈의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 갈등의 폭만큼이나 거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이 있다.

후기 인상주의 – 서정욱의 미술토크로 간단정리! – 햄스토리

폴 세잔 Paul Cezanne (1839 – 1906) 조르주 쇠라 Georges Pierre Seurat (1859 – 1891)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폴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 앙리 드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 1901)

자신의 본 풍경을 그대로 보고 그려서 마음, 느낌 감정이 많이 실려있지 않은 모네의 작품과는 다르게 고흐의 작품은 그 때의 화가의 감정, 마음이 표현 되어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은 비슷비슷한 그림으로 구별하기 힘든 반면,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서로 닮은점이 없이 각자의 개성이 뚜렷합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라고 할 만큼 고향 엑상프로방스를 사랑한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30번 넘게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며 더욱 더 산의 본질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어 입체주의가 탄생되는 계기가 됩니다.

9 thg 7, 2020 —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1903)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의 작품도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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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후기 인상주의 간단하게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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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 – 서정욱의 미술토크로 간단정리!

제가 너무 좋아하는 유튜브 서정욱의 미술토크 에서 후기 인상주의 편에서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 와, 그 특징을 정리 한 것입니다.

미술사 후기 인상주의 – Post Impressionism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5M5OudRyG8Y

19세기 아카데미즘 미술을 잠재우며 새로운 미술역사를 만든 인상주의 작가들이 있. 19세기 후반, 그 인상주의에도 만족하지 못한 화가들의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폴 세잔 Paul Cezanne (1839 – 1906) 조르주 쇠라 Georges Pierre Seurat (1859 – 1891)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폴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 앙리 드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 1901)

인상주의에 대한 불만 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술 탄생된 것인데요. 이들의 개성있는 새로운 시도는 큐비즘, 포비즘 같은 현대미술의 기반이됩니다. 이를 후기 인상주의, 탈 인상주의 라고 부릅니다.

인상주의 모네 의 작품과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의 작품을 비교해봅니다.

모네의 양귀비 들판 1873 /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자신의 본 풍경을 그대로 보고 그려서 마음, 느낌 감정이 많이 실려있지 않은 모네의 작품과는 다르게 고흐의 작품은 그 때의 화가의 감정, 마음이 표현 되어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은 비슷비슷한 그림으로 구별하기 힘든 반면,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서로 닮은점이 없이 각자의 개성이 뚜렷합니다.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1903)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의 작품도 비교해 보겠습니다.

피사로의 하이드 파크 런던 1890 /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1891

피사로는 모네의 작품과 비슷하게 느껴지고, 고갱의 그림은 개성이 넘칩니다. 어떤 고갱의 그림을 보아도 고갱의 그림임을 알아차릴정도로 그의 개성이 뚜렷합니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당대에는 인정을 못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생전 고흐도 단 1점 그림 판매했으며 늘 가난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무리 합니다. 고 갱 가난과 외로움으로 말년을 보냅니다. 살아서 큰 부를 누린 모네와 비교가 됩니다.

또 다른 후기 인상주의의 화가 쇠라의 그림은 독특하게 점으로 그렸습니다.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과학 이론을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의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에는 과학적 이론이 숨어있습니다. 지금의 인쇄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림 그림으로 묘한 느낌을 줍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 / 그랑드 자트 섬의 센 강, 봄 1888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의 작품을 보면 견고하고 빈틈없는 그림을 그리려고 그가 한 노력이 보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라고 할 만큼 고향 엑상프로방스를 사랑한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30번 넘게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며 더욱 더 산의 본질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어 입체주의가 탄생되는 계기가 됩니다.

생트 빅투르산과 소나무 1887 / 사과가 있는 정물 1890

생트 빅투르산과 소나무 1887 사과가 있는 정물 1890 “세계역사상 유명한 사과 세개가 있다. 첫째는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는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세잔과 동시대에 살았던 모리스 드니 가 한 유명한 말도 있습니다.

앙리 드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 1901)

몽마르트 언덕의 한 캬바레 물랑루즈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데요. 포스터의 시작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다른 후기인상주의 그림들과 어떠하다 할 공통점이 없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개성이 넘쳤다는게 공통점입니다. 그의 작품은 지금보아도 세련되었습니다.

Ambassadeurs 1892 / Moulin Rouse 1891

이렇게 인상주의를 반하며 탈 인상주의로 나아가던 이들의 도전과 노력때문일지 후세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의 스토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서정욱의 미술토크를 정리해보았는데요. 7분짜리 짧은 동영상이라 정리랄꺼 없이 거의 옮겨적은것이 많은데요.

이렇게 적다보니 왜 제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화가들이 후기 인상주의인지 알것 같습니다. 평범하고, 대세를 따르기를 좋아하는 저는… 도전하며, 조금씩 다른 생각으로 대세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편하게 당시대의 흐름에 맞는 그림으로 부를 누릴 수도 있던 예술가들이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하며 비평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의 길을 갔던것에 대한 숭고한 예술인의 정신이 감동으로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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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 – 알고가자 프랑스

La belle Angèle – Paul Gauguin 일본식으로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 배경에 원시적인 조각과 대칭으로 위치한 원 속에 그려진 여인은 갇혀 있는 듯….. “나는 원초적 자연 그대로인 브르타뉴 지방을 좋아한다. 화강암투성이의 이 땅에 내 발자국이 울릴 때, 그림에서 찾고자 하는 희미하고도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소리를 듣는다. J’aime la Bretagne, j’y trouve le sauvage, le primitive. Quand mes sabots résonnent sur ce sol de granit, j’entends le son sourd, mat et puissant que je cherche en peinture” – 뽈 고갱 Paul Gauguin 1886년 ‘브르타뉴 Bretagne’ 지방의 작고 아름답고 조용한 항구도시 ‘퐁타방 Pont-Aven’에 도착하여 남긴 초창기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1888년 ‘퐁 타방 Pont-Aven’에 다시 돌아온 후, 근방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뭇 남성들을 애태웠던 ‘퐁 타방’ 시의 시장 부인 ‘사트르 Satre’를 사모하며 그린 이 작품에서는, 이미 독자적인 화풍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찾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알고가자, 아름다운 앙젤!!! 젊은 부인 ‘사트르 Satre’의 마음을 구하기 위하여 초상화를 그려서 당사자에게 선물을 하지만, 시대의 걸작(?)을 몰라본 ‘사트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이 그림은 ‘고갱’에게 되돌아왔단다. 퇴짜!!!! 아름다운 얼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고갱’이 화면을 분할하여 특이한 초상화를 그렸으니 모델이 좋아할 리가 없지……. 아름다운 앙젤???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사트르’의 얼굴은, 화면의 좌측에 보이는 원시 조각처럼 굳어져있고, 그녀의 이름은 마치 성인을 그린 것처럼 화면 하단에 쓰여 있다. ‘에밀 베흐나흐 […]

La Maison du Docteur Gachet – Paul Cézanne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베흐 쉬흐 와즈’는 지금도 세잔느, 반 고흐, 피사로를 비롯하여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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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미술 2월 전시 강력추천1편 ] 모네에서 세잔까지 인상파의 시작과 형성과정에 대한 10분 총정리. #예술의전당,#모네#드가#르느와르,#고흐,#고갱,#로트렉 쉽게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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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가자 프랑스

La belle Angèle – Paul Gauguin 일본식으로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 배경에 원시적인 조각과 대칭으로 위치한 원 속에 그려진 여인은 갇혀 있는 듯….. “나는 원초적 자연 그대로인 브르타뉴 지방을 좋아한다. 화강암투성이의 이 땅에 내 발자국이 울릴 때, 그림에서 찾고자 하는 희미하고도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소리를 듣는다. J’aime la Bretagne, j’y trouve le sauvage, le primitive. Quand mes sabots résonnent sur ce sol de granit, j’entends le son sourd, mat et puissant que je cherche en peinture” – 뽈 고갱 Paul Gauguin 1886년 ‘브르타뉴 Bretagne’ 지방의 작고 아름답고 조용한 항구도시 ‘퐁타방 Pont-Aven’에 도착하여 남긴 초창기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1888년 ‘퐁 타방 Pont-Aven’에 다시 돌아온 후, 근방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뭇 남성들을 애태웠던 ‘퐁 타방’ 시의 시장 부인 ‘사트르 Satre’를 사모하며 그린 이 작품에서는, 이미 독자적인 화풍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찾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알고가자, 아름다운 앙젤!!! 젊은 부인 ‘사트르 Satre’의 마음을 구하기 위하여 초상화를 그려서 당사자에게 선물을 하지만, 시대의 걸작(?)을 몰라본 ‘사트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이 그림은 ‘고갱’에게 되돌아왔단다. 퇴짜!!!! 아름다운 얼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고갱’이 화면을 분할하여 특이한 초상화를 그렸으니 모델이 좋아할 리가 없지……. 아름다운 앙젤???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사트르’의 얼굴은, 화면의 좌측에 보이는 원시 조각처럼 굳어져있고, 그녀의 이름은 마치 성인을 그린 것처럼 화면 하단에 쓰여 있다. ‘에밀 베흐나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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