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917 경주 불국사 석굴암 업데이트 88 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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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과 불국사 – 유네스코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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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문화재 종목별 검색

石窟庵は新羅景徳王10年(751)に当時宰相であった金大成が創建を始めてから恵恭王10年(774)に完成し、建立当時には石仏寺と呼んだ。景徳王は新羅中期の王で、彼の在位期間(742~765)中に新羅の仏教芸術が全盛期となり、石窟庵の外にも仏国寺、多宝塔、釈迦塔、黄龍寺の鍾などの多くの文化財がこの時期に作られた。石窟庵の石窟の構造は、入口である長方形の前室と円形の主室が廊下の役目をする通路でつながっており、360個程度の平たい石で円形主室の天井を巧みに構築した建築技法は、世界に類例がない優れた技術である。石窟庵の石窟は新羅仏教芸術の全盛期に作られた最高傑作で、建築・数理・幾何学・宗教・芸術などが有機的に結合されているため、更に際立っている。現在石窟庵の石窟は国宝第24号に指定されて管理されており、石窟庵は1995年12月仏国寺とともにユネスコ世界文化遺産に共同登録された。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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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초로 즐기는 한국의 유네스코 등재유산] 고대인들의 이상향, 석굴암과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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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The construction of Seokguram Grotto was begun in 751 under the leadership of Prime Minister Kim Dae-seong during the reign of King Gyeongdeok of the Silla Dynasty, and was completed in 774 (the 10th year of King Hyegong’s reign), whereupon it was given its original name of Seokbulsa Temple. Buddhist art reached its peak during King Gyeongdeok’s reign, which spanned the middle period of the Silla Period, Besides Seokguram Grotto, many other cultural treasures were built during this period, including Bulguksa Temple, Dabotap Pagoda, the Three-story Stone Pagoda of Bulguksa Temple, and the Bell of Hwangnyongsa Temple. The artificial stone grotto was built halfway down Tohamsan Mountain with pieces of white granite. The principal statue of Sakyamuni Buddha was placed at the center of the grotto, and forty statues of various bodhisattvas, Buddha’s disciples, and guardian kings were carved on the surrounding walls, though only thirty-eight of them remain. The rectangular front chamber of the grotto is connected to the round main chamber by a corridor. The exquisite ceiling of the main chamber was made with more than 360 flat stones. The architectural technique used to build this grotto is unprecedented in its excellence. There are statues of four guardian deities on both the left and right sides of the front chamber, which functions as the entrance to the main chamber. Carved on both sides of the entrance to the corridor is a statue of the Vajra Guardians, while the narrow corridor is decorated with the Four Guardian Kings carved in pairs. There is an octagonal stone column on both sides of the entrance to the round main chamber. The Principal Buddha is placed slightly off center toward the back of the main chamber. From the entrance, the walls of the chamber are filled with the images of two devas, two bodhisattvas, and ten arhats. Standing behind the Principal Buddha is a statue of the Eleven-fac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perhaps the most exquisitely carved statue found inside this grotto. Every single sculpture contained in the grotto may be considered a masterpiece of East Asian Buddhist art. The list of masterpieces includes the principal image of Buddha, which was created with mature carving skills; the Eleven-fac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with its magnificently carved face and body; statues of valiant warriors and the majestic Four Guardian Kings; and the supple graceful statues of various bodhisattvas and arhats, each of which displays a distinctive individuality. In particular, the serene appearance of the Principal Buddha enshrined in the main chamber deepens the mystical atmosphere. The extremely natural appearance of the Principal Buddha seems to present to all living people the ideal model of a man harboring a profound and sublime mind deep within him and easily pass to them his everlasting mercy. Seokguram Grotto is a masterpiece of the golden age of Buddhist art in Silla. What makes it stand out all the more is its perfect combination of architecture, mathematics, geometry, religion, and art. Seokguram Grotto has long been preserved as National Treasure No. 24, and was jointly register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in December 1995 along with Bulguksa Temple.

石窟庵于新罗景德王10年(751)由当时担任宰相的金大城开始动工,于惠恭王10年(774)完工,建成当时叫做石佛寺。景德王作为新罗中期的君主,他在位期间(742∼765)新罗佛教艺术达到了高峰,除石窟庵外,佛国寺、多宝塔、释迦塔、黄龙寺钟等很多文化财产都在这个时期被建造。石窟庵石窟的构造是入口即长方形前室和圆形主室由走廊通道连接起来,用360多块宽石巧妙地构筑圆形主室房顶的建筑技法,是世界上史无前例的技法。石窟庵石窟是新罗佛教艺术全盛期的最高杰作,因为建筑、数理、几何学、宗教、艺术等有机地结合在一起而更加引人注目。现在石窟庵石窟被指定为国宝第24号来管理,石窟庵于1995年12月和佛国寺一起被共同列为世界文化遗产。

石窟庵は新羅景徳王10年(751)に当時宰相であった金大成が創建を始めてから恵恭王10年(774)に完成し、建立当時には石仏寺と呼んだ。景徳王は新羅中期の王で、彼の在位期間(742~765)中に新羅の仏教芸術が全盛期となり、石窟庵の外にも仏国寺、多宝塔、釈迦塔、黄龍寺の鍾などの多くの文化財がこの時期に作られた。石窟庵の石窟の構造は、入口である長方形の前室と円形の主室が廊下の役目をする通路でつながっており、360個程度の平たい石で円形主室の天井を巧みに構築した建築技法は、世界に類例がない優れた技術である。石窟庵の石窟は新羅仏教芸術の全盛期に作られた最高傑作で、建築・数理・幾何学・宗教・芸術などが有機的に結合されているため、更に際立っている。現在石窟庵の石窟は国宝第24号に指定されて管理されており、石窟庵は1995年12月仏国寺とともにユネスコ世界文化遺産に共同登録された。

석굴암.불국사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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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S] 현대에서도 깜짝 놀라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과학 /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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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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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계유산 시리즈 – 석굴암 (클레이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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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1]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사’라는 현판도 발견되었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뒤에 위치한 광배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광배는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한 원으로 보이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160cm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1미터 이상 덮어버린다. 다음은 비도의 윗부분에도 시멘트를 이용해 석축옹벽을 쌓고, 진입로 역시 이전에 있던 좌우 돌담을 기준으로 시멘트 석축옹벽으로 개조한다.[3]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 문교부장관 (1962년 12월 20일). “문교부고시제一六九호、”. (1962년 12월 20일 관보호외 1쪽(一三二九), 2쪽(一三三○) .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三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보로 재 지정된것을 다음과 같이 고시한다 ↑ 일연, 〈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 《삼국유사》 권5. ↑ 성, 낙주 (2014). 《석굴암, 법정에 서다》. 불광출판사. 126쪽. ↑ 이주형, 중앙아시아연구 11호 “인도·중앙아시아의 원형당과 석굴암” ↑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 ↑ 김리나, <석굴암 불상군의 명칭과 양식에 관하여>,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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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불국사, 그 이름에 담긴 비밀 / KBS 20070610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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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1]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사’라는 현판도 발견되었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뒤에 위치한 광배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광배는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한 원으로 보이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160cm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2]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설화 [ 편집 ]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원형 연화 광배는 세 부분으로 갈라져있다.

보수공사 [ 편집 ]

일제강점기 때의 보수공사 [ 편집 ]

우편배달부에 의해 발견된 1907년 당시의 석굴암

석불사는 한참동안 잊혔다가 1907년에 토함산을 지나던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의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이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그 틈새마다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1미터 이상 덮어버린다. 다음은 비도의 윗부분에도 시멘트를 이용해 석축옹벽을 쌓고, 진입로 역시 이전에 있던 좌우 돌담을 기준으로 시멘트 석축옹벽으로 개조한다.[3]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보수공사 [ 편집 ]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전각이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짐승과 조류, 벌레 등의 침입을 막게 되었고, 악천후가 차단되어 연중 예불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1970년부터 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된다.

1954년의 석굴암 본존불

1964년 보수공사 준공식

구조 [ 편집 ]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 [ 편집 ]

석굴암 본존불을 정면에서 본 모습. 문화재청 촬영.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이라고 한다. 실제로 본존불의 눈과 눈 사이에 무언가 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유실되어 현재는 수정을 박아 놓았다고 한다.

본존불은 정확히 동짓날 태양이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십일면관음보살상 [ 편집 ]

십일면관음보살상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팔부신장 [ 편집 ]

제1상 아수라

제2상

제3상 간달바

제4상 용

제5상

제6상 야차

제7상

제8상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인왕상 [ 편집 ]

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사천왕상 [ 편집 ]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되어있다.

천부상 [ 편집 ]

통로 입구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보살상 [ 편집 ]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다.

10대제자상 [ 편집 ]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있다.

감실상 [ 편집 ]

제2감실보살상

제3감실관세음보살상

제4감실지장보살상

제5감실유마거사상

제6감실문수보살상

제7감실보살상

제8감실보살상

제9감실보살상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 개는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반출해서 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 및 기타 [ 편집 ]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글고 깨진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에도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서울의 석굴암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간 만들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간 작다. 경주의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의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장(八部神將)은 생략되었다고 한다.

평가 [ 편집 ]

석굴암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만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 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이주형 교수는 석굴암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바미얀 석굴과 석굴암은 공통적으로 원형평면 위에 배치가 되어있고 돔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겨진 상, 그리고 위쪽으로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

그리고 이 교수는 바미얀 석불의 원류가 돔 형태의 로마 판테온이라고 주장했다.[4]

논란 [ 편집 ]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5]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본존불의 존명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6]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연등불

미륵불

갤러리 [ 편집 ]

토함산 석굴암 산문

석굴암 수광전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 문교부장관 (1962년 12월 20일). “문교부고시제一六九호、”. (1962년 12월 20일 관보호외 1쪽(一三二九), 2쪽(一三三○) .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三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보로 재 지정된것을 다음과 같이 고시한다 ↑ 일연, 〈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 《삼국유사》 권5. ↑ 성, 낙주 (2014). 《석굴암, 법정에 서다》. 불광출판사. 126쪽. ↑ 이주형, 중앙아시아연구 11호 “인도·중앙아시아의 원형당과 석굴암” ↑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 ↑ 김리나, <석굴암 불상군의 명칭과 양식에 관하여>,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참고 문헌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보물고적도록》, 조선총독부, 1938년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년

[경북/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 나다운 진짜 여행 – 마이리얼트립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해 천년신라의 문화와 역사를 만나보자: 경주의 신라 유적 코스중 통일신라때의 건축과 종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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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scription Website: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해 천년신라의 문화와 역사를 만나보자: 경주의 신라 유적 코스중 통일신라때의 건축과 종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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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발견! 100년 전의 사진 석굴암 원형 찾았다 / KBS 2002020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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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와 석굴암 – 우리역사넷

전실 벽면 좌우로 불교를 수호하는 신들인 팔부중상,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통로 좌우 입구에는 두 금강역사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어요.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중앙에 본존불이 놓여 있지요.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들이 채워져 있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과 십대제자상이 조각되어 있어요.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어요. 모량리라는 곳에 대성이란 소년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해서 얻은 밭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대성은 어느 날 법회에 시주를 하면 복을 만 배로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대성은 내세에라도 복을 받아 잘 살자며 어머니를 설득해 가지고 있던 밭을 절에 바쳤어요.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죽고 말았지요.

대웅전 앞 서쪽에 있는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이 소박하고 단정한 멋을 지녔다면, 동쪽에 있는 다보탑은 화려하고 세련된 멋을 지녔지요. 그런데 대개 절에는 탑이 하나만 있거나, 두 개일 때는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동쪽과 서쪽으로 세워서 각각 동탑과 서탑이라 부르는데, 석가탑과 다보탑은 탑 이름도 다르고 생긴 모습도 달라요. 왜 그럴까요?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산기슭에 돌로 만든 석굴 사원이에요. 처음에 석굴암은 석불사라 불렀어요. 그러다 불국사에 속한 암자가 되면서 석굴암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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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신라삼보 = 불국사, 석굴암..?🤦‍♂️ 하릴없이 같이 뛰는 무도 중대☔ 그리고 명수가 가장 좋아할 보물의 정체는? ‘경주 보물찾기 특집’ 6편 MBC080503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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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가 만든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와 석굴암

<불국사 청운교·백운교(경북 경주시)>

문화재청

“드디어 불국사가 완성되었다네. 자네도 가 보았는가?”

“그런가? 불국사를 본 소감이 어떤가? 나도 얼른 가고 싶네만.”

아름답고 웅장한 불국사를 보니 신라가 무척 자랑스럽다네.

신라는 왜 불국사를 지었을까요? 불국사는 신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다

우리가 수학여행이나 현장체험학습으로 자주 가는 경주에서 꼭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곳은 아마도 불국사와 석굴암일 거예요. 불국사는 경주 동쪽의 토함산 자락에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름다운 절이에요.

불국사는 이름 그대도 부처님이 사는 나라를 현실 세계에 옮겨 놓은 절이란 뜻이에요. 통일신라 사람들은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극락정토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신라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라가 ‘불국’ 즉 부처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불국사를 지었어요.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산기슭에 돌로 만든 석굴 사원이에요. 처음에 석굴암은 석불사라 불렀어요. 그러다 불국사에 속한 암자가 되면서 석굴암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지요.

석굴암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함께 지었다고 해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가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자 혜공왕 10년에 나라가 주관하여 완성하였다.’라고 전해져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효심에서 짓기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되어 완성하였어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과 불교문화가 잘 표현된 아름다운 문화유산이에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러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요.

부처님 나라로 건너가는 청운교·백운교

부처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청운교·백운교라는 계단을 올라야 해요. 계단이지만 원래 그 밑으로 물이 흘렀기 때문에 다리라는 뜻의 ‘교’자를 붙였지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현세를 지나 불국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것이지요. 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서게 되는 거예요. ‘자하’란 붉은 안개라는 뜻으로,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붉은 금색의 빛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는 뜻이에요.

<자하문과 청운교·백운교>

문화재청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자하문을 들어서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나란히 보이고, 그 뒤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어요. 불상을 모신 법당과 탑은 불국사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로 지었어요.

대웅전 안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양 옆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을 모셨어요. 부처님은 법당에 단독으로 모시기도 하고, 이렇게 보살상들을 양쪽에 함께 모시기도 해요.

<대웅전>

문화재청

대웅전 앞 서쪽에 있는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이 소박하고 단정한 멋을 지녔다면, 동쪽에 있는 다보탑은 화려하고 세련된 멋을 지녔지요. 그런데 대개 절에는 탑이 하나만 있거나, 두 개일 때는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동쪽과 서쪽으로 세워서 각각 동탑과 서탑이라 부르는데, 석가탑과 다보탑은 탑 이름도 다르고 생긴 모습도 달라요. 왜 그럴까요?

이것은 탑을 세울 때 법화경이라는 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에요. 법화경에서는 현세의 부처를 ‘석가여래’라 하고 전생의 부처를 ‘다보여래’라고 해요. 그러니까 석가탑은 현세의 부처를, 다보탑은 전생의 부처를 각기 다른 느낌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삼층 석탑과 다보탑>

문화재청

진리의 세계를 나타낸 비로전

대웅전과 무설전 뒤에 위치한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에요.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예요. 진리를 우리 눈에 보이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거지요. 비로자나불은 이 빛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주는 역할을 해요.

<비로전>

문화재청

인공적으로 만든 석굴 사찰, 석굴암

석굴암은 건축 방식 자체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건축물이에요. 당시 절은 대개 나무로 지었어요. 그런데 석굴암만은 돌을 쌓아서 지었지요. 인도에서 불교가 전파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석굴 문화가 함께 전해졌어요. 인도와 중국에선 자연 그대로의 바위산을 파고 들어가 방을 만들고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석굴암은 다른 곳에서 수많은 돌을 가져다 차곡차곡 쌓아 돌집을 만들고 그 안쪽 면에 조각을 했지요.

석굴암은 신라 사람들의 뛰어난 과학 지식을 보여 주는 건축물이에요. 석굴암을 인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계산이 필요했어요. 둥근 돔 형태로 지붕을 만들되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만들었어요.

또 굴 내부에는 습기가 차지 않도록 차고 더운 공기의 흐름을 이용해 설계하였지요. 본존불이 앉아 있는 방향에도 뜻이 있어요. 본존불은 해가 뜨는 약간 남쪽을 향한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 방향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짓날에 해가 뜨는 각도와 맞아떨어진다고 해요.

<석굴암의 여러 조각상

①석굴암 석굴 ②석굴암 본존불 ③문수보살과 제석천상

④십일면관음보살상 ⑤십대제자상>

문화재청

돌로 굴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시다

석굴암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있어요. 예배의 중심이 되는 부처를 본존불이라고 해요. 석굴암 입구인 네모난 모양의 전실을 지나면 절의 가운데에 본존불이 자리한 둥근 모양의 주실을 만나요. 전실과 주실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전실은 주실에 있는 본존불에게 예배를 보는 공간이에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표현한 석가모니 불상은 풍만한 몸체에 엄숙한 표정으로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석굴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손꼽히고 있지요. 석굴암에는 석굴 입구의 전실과 좁은 통로 양쪽 벽, 그리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주실의 원형 벽면에 다양한 모습을 한 수많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요.

전실 벽면 좌우로 불교를 수호하는 신들인 팔부중상,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통로 좌우 입구에는 두 금강역사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어요.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중앙에 본존불이 놓여 있지요.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들이 채워져 있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과 십대제자상이 조각되어 있어요.

본존불을 비롯한 이 불상들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최고의 걸작품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어요. 모량리라는 곳에 대성이란 소년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해서 얻은 밭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대성은 어느 날 법회에 시주를 하면 복을 만 배로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대성은 내세에라도 복을 받아 잘 살자며 어머니를 설득해 가지고 있던 밭을 절에 바쳤어요.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죽고 말았지요.

대성이 죽던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로부터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어요.

“모량리의 대성이를 너에게 주노라.”

김문량의 부인은 그로부터 열 달 후 아들을 낳았어요. 아기가 왼쪽 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 만에 펴서 보니 ‘대성’이라고 적힌 금패가 있었어요. 김문량은 아이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모량리의 어머니도 모셔다 같이 살았어요.

어른이 된 김대성은 사냥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자기가 사냥했던 곰이 꿈에 나타나 몹시 원망을 하는 것이었어요. 김대성은 곰에게 절을 지어 위로해 줄 것을 약속하고 용서를 빌었어요. 이후 김대성은 불심이 깊어졌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전해져요.

통일신라 사람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해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공부하며 어떤 생각이 드나요? 삼국을 통일하고 자신들이 꿈꾸던 부처님의 이상 세계가 바로 여기라는 신라 사람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지요. 여러분도 신라 사람들처럼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길 바라요.

[집필자] 조윤호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石窟庵石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차중수는 최초의 중수과정에서 미술품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옛 주위의 경관을 파괴했다는 점 때문에 시행되었다. 굴 입구의 석축 및 홍예(虹蜺) 위에 놓은 석축은 마치 터널과 같이 보인 점이 미술부문의 전문가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2차중수에도 불구하고 누수 및 침수의 현상이 계속되었으며, 굴 내에는 많은 습기가 차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적인 결점들로 인해 다시 수리를 행해야만 했다. 따라서 3차중수는 석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조건도 전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의 조사와 연구에 이어서 석굴암의 전면적인 중수가 시작되었다. 침수·결로 등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굴 내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고, 그에 따라 굴을 외기와 차단시키고, 인위적으로 석굴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목조와즙(木造瓦葺)의 전실을 설치하여 외부의 변화 및 영향을 배제시켰고, 지하수를 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배수구를 설치하였으며, 콘크리트로 덮은 돔을 따라 흐르는 물도 역시 이 배수구를 통하여 처리하였다.

1688년 5월 15일에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石像)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입구의 홍예(虹蜺), 본존상(本尊像)과 좌대석(座臺石), 주벽(周壁)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天蓋石)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佛像如生).”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석굴의 보존상황이 온전했음을 여실히 입증하는 중요한 문구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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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tle Website: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石窟庵石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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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유병재 키에 최적화 되어있다?…김상욱x심용환 마스터가 알려주는 석굴암미스터리 | 선을 넘는 녀석들 | TVPP | MBC 21060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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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굴암 석굴(慶州石窟庵石窟)

석굴암 변천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속하는 자료들 뿐이다.『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와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가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에 속한다.

『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종열(從悅)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또 굴 앞의 돌계단〔石階〕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 대겸(大謙)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수한 규모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한,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중수한 사실과는 직접 관계가 없으나, 기록할 당시의 석굴암의 현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어 석굴암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88년 5월 15일에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石像)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입구의 홍예(虹蜺), 본존상(本尊像)과 좌대석(座臺石), 주벽(周壁)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天蓋石)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佛像如生).”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석굴의 보존상황이 온전했음을 여실히 입증하는 중요한 문구이다.

또한, 「산중일기」를 통해서 볼 때 석굴암이 불국사와 골굴암(骨窟庵)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일종의 순례관광(巡禮觀光)코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산중일기」의 작자 이외에도 많은 승려·시인·신도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겨주고 있다.

영조 때 남경희(南景羲)는 「우중숙석굴(雨中宿石窟)」과 「석굴(石窟)」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시기의 이관오(李觀吾)는 「석굴암」을, 최천익(崔天翼)은 「유석굴증등여상인(遊石窟贈登如上人)」이라는 한시를 읊어 당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나타낸 바 있었다.

석굴암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근세의 민속화가인 정선(鄭敾)은 1733년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2권 가운데에 경주의 골굴과 석굴을 그려 넣었다. 이 화첩은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실 입구에 목조전실을 첨가하는 데 귀중한 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200∼300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 유지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와서 석굴암은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대수리 때에 석굴암 부근의 노인들은 이 석굴을 가리켜 ‘조가절(趙家寺)’이라 지칭하였고, 그들의 어린 시절에는 향화(香火)와 공양(供養)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 바도 있다. 일본인들이 우편배달부에 의하여 굴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무관한 것이다.

1907년경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일본인에게 석실이 있음을 알렸고, 그 말에 따라 발견했다고 전하여, 마치 석굴을 지하동굴에서 처음 발굴한 듯 과장하여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오히려 토함산에서 석불이 발견되었다는 극적인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 뒤 일본인 무뢰한들이 수많은 탑상(塔像)들을 반출해 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적지 않은 파손행위까지 따르게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소규모적인 반출 및 탈취는 일제에 의하여 석굴 전체의 해체, 운반이라는 계획까지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이미 그들의 소유가 되자, 그들은 굳이 석굴을 해체하여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또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1912년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이곳을 방문한 뒤, 총독부는 석굴암 중수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시기의 중수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제1차는 1913∼1915년, 제2차는 1917년, 제3차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차중수는 거의 완전 해체하는 복원공사였다. 이 때 직접적인 공사에 앞서 기초조사가 있었는데, 이 조사는 당시 석굴암의 퇴락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12년 6월 25일자의 현장조사복명서에 의하면, 석굴암은 황폐화되어 절박한 상황에 있다고 보고되었다. 즉,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구멍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본존불상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1913년 10월에 착공된 1차중수는 그 1차연도에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架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 본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3차연도인 1915년 5월에 최종공정인 석굴재조립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당시 그들은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등장한 시멘트의 효능을 믿고 이 석조물 조립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의 커다란 문제거리를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석조물에 시멘트를 부가함으로써 석조물을 약화시켰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콘크리트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완벽한 정리를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의 교정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간 소요된 공사비는 1만 2,724원 54전이었다고 한다.

1차중수의 결점은 준공 후 2년이 못되어 굴 내의 누수현상으로 나타났다. 누수의 양이 점차로 많아져 1917년 7월에 그 방지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2차중수이다.

6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진행된 이 공사는 콘크리트로 된 돔(dome) 표면에 석회 모르타르와 점토층(粘土層)을 마련하고, 이 원형돔의 외부에 방사선상의 암하수(暗下水)를 설치한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까는 것이었다. 1917년 6월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는 굴 상부 봉토면(封土面)에 대한 응급조처에 그쳐 누수·오탁(汚濁)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없었으므로, 그 뒤 3년 만에 다시 대규모의 중수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차중수는 최초의 중수과정에서 미술품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옛 주위의 경관을 파괴했다는 점 때문에 시행되었다. 굴 입구의 석축 및 홍예(虹蜺) 위에 놓은 석축은 마치 터널과 같이 보인 점이 미술부문의 전문가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2차중수에도 불구하고 누수 및 침수의 현상이 계속되었으며, 굴 내에는 많은 습기가 차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적인 결점들로 인해 다시 수리를 행해야만 했다. 따라서 3차중수는 석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조건도 전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3일 기공하여 1923년까지 4년간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공사비 1만 6,985원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중수 이후에도 결로(結露)·침수의 현상은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보수가 항시 뒤따랐다. 또한 1차공사에서 잘못 배치된 상(像)들과 굴의 구조도 그대로 묵과된 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못하였다.

8·15광복 후 석굴암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일본인들의 중수에서 빚어진 모순과 그로 인하여 발생된 가속적인 퇴락은 더욱 심해져 갔다.

1961년에 들어서 각계각층의 깊은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석굴암에 대한 조사, 예비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사의 목적은 주로 석굴을 계속 퇴락시키고 있는 기상·누수 등의 자연현상과 불상면의 심한 풍화작용에 대한 조사와 일제시대에 잘못된 판단에서 재조직된 굴 자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배정에 대한 검토에 있었다.

여러 가지 측면의 조사와 연구에 이어서 석굴암의 전면적인 중수가 시작되었다. 침수·결로 등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굴 내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고, 그에 따라 굴을 외기와 차단시키고, 인위적으로 석굴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목조와즙(木造瓦葺)의 전실을 설치하여 외부의 변화 및 영향을 배제시켰고, 지하수를 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배수구를 설치하였으며, 콘크리트로 덮은 돔을 따라 흐르는 물도 역시 이 배수구를 통하여 처리하였다.

이 밖에도 석굴에 영향을 주는 자연조건을 일일이 제거하고, 일본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수정하였다. 굴 내 조각의 위치에 관하여는 팔부신중(八部神衆) 가운데 가장 앞면에 있던 좌우 각 일상(一像)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마주서게 굴곡지어 배치되었던 것을 다른 신중상과 일직선으로 병렬시켰다.

또한, 이때에 수광전(壽光殿)·3층석탑·요사 등의 부속건물과 유적 등도 보수하였다. 이 복원작업은 1962∼1964년까지 3년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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