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439 경주 양동 마을 새로운 업데이트 54 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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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양동마을:환영합니다

경주 양동마을 · 입장료안내 · 마을안내도 · 오시는 길 · 마을해설안내 · 마을해설신청 · 유네스코등재 · 문화재현황 · 체험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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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자 성리학자요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신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가 6대 국반),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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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HD] 양동마을 – 유네스코세계유산 – 경주가볼만한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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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집성촌으로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 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 기념 세계 최고의 모범 유산(The Best Model Case)로 선정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자 성리학자요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신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가 6대 국반),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도합 2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는 7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 [ 편집 ]

양동마을은 한국인 지배계급 양반의 삶의 공간의 원형과 정신유산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받았다.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양동마을은 전형 중 하나인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양동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1]

지리 및 환경 [ 편집 ]

경주시 시내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씨족마을의 대표적 사례인데,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해 이뤄진 정주 형태다.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는데 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한 가지 전형, 즉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다.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형성사 [ 편집 ]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한편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 구릉지의 100여기가 정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 4세기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또 일본인 역사 학자인 善生助永氏의 자료와 1970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안계리 고분군(安溪里古墳群) 발굴 자료에 의하면 현재 마을의 주민생활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遠祖: 이직재(李直才, 고려 여주 호장) | 1세: 이세정(고려 향공진사, 개성 이주) | […] | 5세: 이윤방(여말선초기 개성->경상도 일대) |―――――――――――| 6세: 차남 이춘언 장남 이지언 여흥 민제 함양 박성양 | |――――――――| |――――――| (->의성, 이조참판, 대마도정벌) | | | | | | 7세: 이권 차남 이광호 장남 이성호 안동 권명리 원경왕후 민씨 민무질 박충무 (포항 연일) (경주 양동 입향, 현감) | (안동 -> 청송 안덕, 직장) (태종 대 숙청) (->청송 진보, 강계판관) | | | |――――| | |――――| 8세: 이숭례 이상도 女여주이씨 ―― 권자용 女안동권씨 ― 경주 손사성 민촉 박유부 박숭부 (진의부위) (武科, 용양위부사직) (文科, 병조참의, 상주 중동->청송 안덕) (태종 대 숙청) | | | |―――――――――――――| |―――| | | |―――――――――| 9세: 이수회 女여주이씨(풍덕 류복하) 이승평 손소 女경주손씨 ――――― 민흥 박경인 女함양박씨(이언적) 박운건 (->경주 내동, 참군) (용인->흥해->경주 양동, 만호) (文科, 훈도) | | (한양 -> 청송 안덕) | | | | | | | | | 박정 10세: 이번 女풍덕류씨(경주 손소)――――――――――――――| |―――――――――| | |―――――――――| (->경주 양동, 생원) (청송->경주 양동, 文科, 공조참의, 적개공신, 계천군, 양민공) 장남 민세경 차남 민세정―女함양박씨 이응인 女함양박씨 | |――――――――――――――――――――| | | |――――――― 女경주손씨(여주 이번) 손중돈(文科, 우참찬, 청백리, 경절공) 女여흥민씨―의성 김진 女여흥민씨 (내동->경주 양동, 생원) | | |―――――――――――――――――| |―――――|―――――| | 11세: 문원공 회재 이언적 농재 이언괄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학봉 김성일 광주 이호박 (文科, 문묘, 종묘, 좌찬성, 청백리, 증영의정) (송라도찰방, 증대사헌) | | | | 12세: 수암 이응인 매산 이응기 이산악 (사옹원 판관, 증좌승지) (선공감부정) (생원시 장원) |―――――――|――――――|――――――| | | 13세: 1남 이의윤 2남 이의징 3남 이의활 4남 이의잠 1남 이의주 女광주이씨(여주 이의잠) (요절) (요절) (文科, 군수) (進士, 현감) (進士, 선공감부정) 14세: 이언적 종가 양졸당파 설천정파 수졸당파 이언괄 종가 (무첨당파) (향단파)

학문과 인물 [ 편집 ]

양동의 전통문화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

양동마을의 입향 초기 선조들은 국가와 유림에서 인정하는 불천위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씨족적 결속이 강화, 현대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을 순찰하거나 여행하는 선비들에게 이 마을은 주요 방문지 중 하나였다. 흥선대원군도 이 마을을 방문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5년(1459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서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어 이황에게 영향을 주는 등 해동부자라 불리고 동방5현의 한분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어 공자와 역대 임금의 위패와 함께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다. 전국의 향교와 20여 개소의 서원에 배향이되기도 했다.

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건축유산 [ 편집 ]

마을 전체 구성은 ‘농경지-거주지-유보지’로 나타난다. 농경지는 생산공간, 거주지는 생활공간, 유보지는 의식공간이 된다. 경작지와 생활지를 나누는 마을 입구에는 대개 외부세계로부터의 시각적 차폐를 위한 인공의 조림과 지형적 장치가 마련된다. 양동마을은 격식이 높은 살림집, 사당, 정자, 정사, 서원, 서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마을 내의 노거수는 6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준다. 입향기인 15~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17세기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지나 지도에 두 마을의 이름과 옥산서원 등이 기재된 사실에서 당대에도 이미 이 두 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종가인 서백당은 15세기에 건립됐다. 이 종가는 한국 주거건축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에 속한다. 마을 내의 다른 건축물들도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로 수백 년에 걸친 마을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동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4건(향단, 관가정, 무첨당, 독락당)이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은 12건이다. 유교건축 중에서 옥산서원은 각각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양동

마을

동산유산 [ 편집 ]

양동마을에는 조선시대의 족보 및 마을의 재산과 관련된 문서나 서신들도 남아있다. 양동마을의 통감속편(通鑑續編)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매우 이른 시기의 증거로써 인쇄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월성 손씨 가문이 보관하고 있는 손소 영정(보물 제1216호)은 15세기 말에 그려진 초상화로써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다. 이밖에도 개인 사이에 주고받은 간찰과 매매 계약 문서, 관혼상제 관련 문서 등도 잘 보관돼 있다.

무형유산 [ 편집 ]

양동마을에는 줄불놀이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가 전해지지만 하회마을만큼 활발하지 않다.

교육 [ 편집 ]

양동초등학교

심수정(心水亭)

안락정(安樂亭)

강학당(講學堂)

사진 [ 편집 ]

마을 전경

전통 바구니를 만드는 모습

전통 가옥

주요 문화재 [ 편집 ]

양동마을 내에는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경상북도 기념물 1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점, 경상북도향토문화재 2점 등 총 24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양동마을 자체가 대한민국의 중요민속자료 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양동마을은 마을 주변 문화재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독락당(보물 제413호), 동강서원(경상북도기념물 제114호)를 포함한다. 옥산서원 내에 보관된 주요 문화재만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양동마을 | 관광지 | 경주 여행 | 경주문화관광 – 경주시청

주요 고택으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 선생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등이 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草家)가 모여 있다.

그를 증명하듯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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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045_어서와 조선은 처음이지? 경주 양동마을| 큰★별쌤의 史(사)적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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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난 2010년 8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草家)가 모여 있다.

양동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의 산세와 지세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 예로부터 재물과 인재가 모여들었다 한다.

그를 증명하듯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으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 선생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등이 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양동마을 전통문화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양동마을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양동마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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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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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가볼만한곳 : 양동마을 국내 최고의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은 완전 현대화된 한옥마을이라 논외로 하고 안동 하회마을 보다

지금부터 경주 가볼만한곳 양동마을에 어떤 매력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북촌 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이 가장 유명할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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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양동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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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가볼만한곳 : 양동마을 국내 최고의 한옥마을

국내에 유명한 한옥마을로는

전주 한옥마을, 북촌 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이 가장 유명할듯 싶은데

유명한듯 안 유명한 경주 양동마을 도 있습니다

전주, 안동, 경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했기에 모두 가 봤는데요

전주 한옥마을은 완전 현대화된 한옥마을이라 논외로 하고 안동 하회마을 보다

경주 양동마을이 약간 더 보기 좋더라구요

지금부터 경주 가볼만한곳 양동마을에 어떤 매력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경주 양동마을

방문날짜 : 2020년 6월 8일

관람 소요시간 : 1시간 ~ 2시간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양동마을 (慶州 良洞마을)

月城孙氏和骊江李氏两大门阀组成的同族村,位于从庆州沿着兄山江河流伸向东北浦项距离40里左右的地方。在广阔的安江平原上,根据其地形结构,可以说是招财聚宝的风水宝地,还聚集着规模较大的两班住宅。大宗宅一般盖在较高的山脊上,并按两班阶层的规矩进行了房屋排列,都具有悠久的历史,而且保存的也比较完整。房屋的基本结构大体上呈ㅁ字形或开口的ㅁ字形,偶尔在大门前设有行廊。有的房屋呈混合布局样式,呈ㄱ字形或一字形,但是大体上房屋布局结构具有岭南地区民宅特有的特色。这里有无忝堂(宝物第411号)、香坛(宝物第412号)、观稼亭(宝物第442号)等很多古老的建筑物被指定为重要文物。沿着山谷形成了一道美丽了风景线,有不少传统住宅和大自然融为一体,是代表两班阶层的象征性资料,还保存着儒教思想和传统的风俗习惯,因而具有很高的价值。指定当时名称为‘月城良洞村’,但是因为庆州”是从高丽时代开始沿用至今的名称,相反“月城”只是根据行政划分而暂时使用的名称,所以根据这种历史事实将名称改为了‘庆州良洞村’(2009.2.16)。”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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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dong Village in Gyeongju, Korea (🇰🇷10. Gyeongju Travel ep1. Yangdong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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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양동마을 (慶州 良洞마을)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향단(보물), 관가정(보물)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에는 ‘월성양동마을(月城良洞마을)’이었으나, “경주(慶州)”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명칭임에 반해 “월성(月城)”은 한 때의 행정편의에 따라 한시적으로 쓰였던 행정구역 명칭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명칭을 변경(2009. 2.16)하였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This clan village mainly consists of people of Wolseong Son’s Clan and Yeogang Yi’s Clan. Located approximately 16 kilometers away from Gyeongju toward the northeastern side of Pohang along Hyeongsangang River, it has a group of relatively big high-class houses on the vast Angang plain with a geographical feature that offers great wealth and prosperity according to geomancy. According to the rule of yangban (nobility), head family houses are built on the high, spacious ridge of a mountain. Many large houses with long history have been well-preserved. Most of the houses are built in the basic “□”-shaped layout with four open corners, but very few houses have haengnangchae (servants’ quarters) in front of the main gate. Although some houses are built in a mixed layout such as “ㄱ” shape or “ㅡ” shape, the layout and spatial composition of most of the houses show the features of the Yeongnam region. Several buildings in this village have been designated as important cultural properties such as Mucheomdang House (Treasure No. 411), Hyangdan House (Treasure No. 412), and Gwangajeong House (Treasure No. 442). This village is assessed to have great value since it has beautiful scenery along the mountain valley, well-preserved, old traditional houses built in harmony with nature, and cultural materials showing the lifestyle of the nobility as well as customs related to Confucianism. This village used to be called “Wolseong Yangdong Village” at the time of its designation as important folk cultural heritage but was renamed “Yangdong Village, Gyeongju” by reflecting the historical fact that the name Gyeongju had long been used since the Goryeo Dynasty, whereas the name Wolseong was temporarily used for the convenience of administration once (Feb. 16, 2009). ※ Viewing of the cultural property above is usually available anytime but may be limited depending on the owner’s personal circumstances.

月城孙氏和骊江李氏两大门阀组成的同族村,位于从庆州沿着兄山江河流伸向东北浦项距离40里左右的地方。在广阔的安江平原上,根据其地形结构,可以说是招财聚宝的风水宝地,还聚集着规模较大的两班住宅。大宗宅一般盖在较高的山脊上,并按两班阶层的规矩进行了房屋排列,都具有悠久的历史,而且保存的也比较完整。房屋的基本结构大体上呈ㅁ字形或开口的ㅁ字形,偶尔在大门前设有行廊。有的房屋呈混合布局样式,呈ㄱ字形或一字形,但是大体上房屋布局结构具有岭南地区民宅特有的特色。这里有无忝堂(宝物第411号)、香坛(宝物第412号)、观稼亭(宝物第442号)等很多古老的建筑物被指定为重要文物。沿着山谷形成了一道美丽了风景线,有不少传统住宅和大自然融为一体,是代表两班阶层的象征性资料,还保存着儒教思想和传统的风俗习惯,因而具有很高的价值。指定当时名称为‘月城良洞村’,但是因为庆州”是从高丽时代开始沿用至今的名称,相反“月城”只是根据行政划分而暂时使用的名称,所以根据这种历史事实将名称改为了‘庆州良洞村’(2009.2.16)。”

경주 양동마을 – 표제어 – 한국의식주생활사전

송첨 종택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체적인 배치 형식은 전면에 一자형의 행랑채를 두고 그 뒤에 ㅁ자형 본채가 앉아 있다. 그러나 가운데 ㅁ자 마당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공간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형식이 남아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며 모든 생활 덕목에 성리학적 질서를 적용하기를 주장했다. 집의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고 생활의 영역이 겹쳐지지 않도록 채의 분리를 유도했다. 그러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새롭게 탄생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사랑채와 안채의 완전한 구분이 가능한 가옥의 완성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보인다. 송첨 종택은 이를 개념적인 공간 나눔으로 해결하고자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는 곳에 짧은 내외담을 두기도 하고 출입은 하지 않지만 형식적인 문을 내기도 하였다. 집의 입지가 마을의 가장 안쪽 경사지이기 때문에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힘든 것도 집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배경으로 지목할 수 있다. 대문에 들어서도 집의 전체가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랑 기단과 누마루가 전부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안채로 향하고 우측은 사랑과 사랑마당이다. 이 집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곳은 사랑마당이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사랑누마루를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꺾어져 접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사랑마당은 북쪽으로 보이는 사당과 그 앞에 심어진 500년 넘은 향나무까지 사랑채 공간과 같은 성격으로 이어진다. 실제 이 댁에 큰 제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당이 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마루의 아자난간이나 사랑방의 불발기창 등은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런 격식을 갖추며 집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가정은 손중돈이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건축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가옥이다. 집은 안강평야와 형산강의 조망 위치가 가장 좋은 물봉산 끝자락에 자리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집의 택호가 아주 적절하게 조화된다. 작은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사랑채과 행랑채가 대칭으로 길게 이어진다. 중문을 들어서면 ㅁ자 마당을 두고 본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네 칸의 누마루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랑은 세 개의 방과 정지로 구성하였다. 사랑의 윗방과 아랫방은 2분합 맹장지 들어열개분합문으로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때는 이 문을 들어올려 두 개의 방과 마루까지를 하나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은 계자로 꾸미고 마루 대공에도 작은 규모의 화반대공을 조각하는 등 대종가인 송첨 종택에 비해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다. 안채는 전면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방에 정지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안방 아래로는 바닥을 마루로 한 고방이, 상방 아래로는 전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을 뿐이다. 정지를 행랑채에 속하게 한 것으로 보아 안방 아래 마루 공간이 특별한 활용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에 종가를 송첨 종택으로 다시 옮기면서 관가정은 손씨 문중의 정자 및 영당다례를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그 배경이 된다. 종가에서 사당은 사랑채에서 보이는 사랑마당의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관가정의 사당은 반대편 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여강이씨 문중의 무첨당과 향단은 두 가옥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집의 배치 및 평면 구조에 있어서도 손씨 문중의 집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먼저 대종가인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1463~1500)이 터를 정하고 살던 집이다. 사랑채이자 별채의 기능을 하는 무첨당은 ㄱ자 형식의 집으로, 화려한 기법의 부재들로 안채와는 완전히 별도의 독립된 공간을 영위하고 있다. 큰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서편방, 동편방이라 불리는 사랑방을 두고 서편방 앞으로는 지형의 높낮이를 활용한 누마루를 두어 집의 격을 높였으며, 동편방 옆으로는 따로 달아낸 눈썹지붕 아래 책을 보관하는 판벽으로 마무리된 서고를 연결한 것이 특이하다. 무첨당 마당을 지나면 우측에 ㅁ자형 평면의 본채로 이어진다. 중문의 좌측으로는 무첨당 방향으로 툇마루를 붙인 사랑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행랑 역할을 하는 아랫방과 고방이 연결된다. 대청과 이어진 안방 옆으로는 정지가 붙고 그 아래에 집의 규모에 어울리는 방, 곳간, 헛간 등이 ㅁ자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사당은 집이 앉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이 배치하였다. 무첨당에서 본채로 가는 중간에 높은 계단을 오르면 단청을 한 사당의 삼문 앞에 이른다. 사당 영역은 따로 담장을 둘러 구획을 하였으며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건물 앞에 서면 마을 입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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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나이, 500살이 기본! 조선시대 부자들이 살았던 곳 ‘양동마을’ 한옥에 사는 사람들 [건축탐구 집 – 한옥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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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내용

양동마을은 보통 한 가문이 모여서 사는 다른 집성촌들과는 다르게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문중이 500여 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물’자 지형 안골마다 두 문중의 종가와 주요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우선 가장 왼쪽의 첫 번째 획이 마무리되는 부분에 월성손씨 파종가인 관가정觀稼亭과 여강이씨 파종가인 향단香壇이 위치하고 있다. 여강이씨 대종가인 무첨당無添堂은 세 번째 획의 능선에, 월성손씨 대종가인 송첨 종택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획이 감싸면서 마을 내에서 가장 길지로 알려진 곳에 터를 잡았다.

동족마을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옥 이외에 재실, 재각, 비각, 장지, 서원 등이 함께 마을을 이루는 요소들이 된다. 먼저 손씨 문중의 경우에는 대종가인 송첨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등이 이웃하고 있다. 그 외에 낙선당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3호), 수운정水雲亭(국가민속문화재 제80호), 안락정安樂亭(국가민속문화재 제82호) 등이 있다. 여강이씨의 경우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양동 사호당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4호), 상춘헌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5호), 근암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6호), 두곡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7호), 수졸당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8호), 이향정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79호), 심수정(국가민속문화재 제81호), 강학당(국가민속문화재 제83호) 등이 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들이다. 또한 『통감속편通鑑續編』(국보 제283호), <손소영정孫昭影幀>(보물 제1216호) 등의 유물도 마을이 소장하고 있다.

손씨 문중의 대표적인 가옥으로는 송첨 종택과 관가정을 들 수 있다. 먼저 송첨 종택은 입향조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손소는 월성손씨 5세손으로 4세 학성공鶴城公 손사성孫士晟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 우재禺齋 손중돈孫仲墩(1463~1529)이 이조판서와 좌우참판을 지낸 불천지위이다. 또한 그의 누이동생이 출가하여 낳은 이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으로 여강이씨는 월성손씨의 외손이 된다. 이렇게 두 불천위가 이 집에서 출생하면서 이곳은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의 명당으로 불리며 앞으로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이 더 태어날 장소로 여겨져 왔다. 손소는 청송부의 속현인 안덕현에서 태어나 25세에 풍덕류씨豐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양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결혼 후 처가에 거처하다 4년 뒤에 송첨 종택을 짓고 분가하게 된다. 그 후 큰아들 손위가 대를 잇지 못하자 둘째 손중돈이 장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손중돈이 관가정을 지어 살림을 나가면서 손소의 신위와 영정을 관가정에 모시게 되고 그 후 송첨 종택은 종가의 기능을 20세기 초까지 관가정에 내주었다. 그러나 1924년 사당을 신축하고 신위를 옮겨 오면서 대종가의 역할을 다시 해 오고 있다.

송첨 종택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체적인 배치 형식은 전면에 一자형의 행랑채를 두고 그 뒤에 ㅁ자형 본채가 앉아 있다. 그러나 가운데 ㅁ자 마당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공간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형식이 남아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며 모든 생활 덕목에 성리학적 질서를 적용하기를 주장했다. 집의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고 생활의 영역이 겹쳐지지 않도록 채의 분리를 유도했다. 그러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새롭게 탄생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사랑채와 안채의 완전한 구분이 가능한 가옥의 완성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보인다. 송첨 종택은 이를 개념적인 공간 나눔으로 해결하고자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는 곳에 짧은 내외담을 두기도 하고 출입은 하지 않지만 형식적인 문을 내기도 하였다. 집의 입지가 마을의 가장 안쪽 경사지이기 때문에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힘든 것도 집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배경으로 지목할 수 있다. 대문에 들어서도 집의 전체가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랑 기단과 누마루가 전부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안채로 향하고 우측은 사랑과 사랑마당이다. 이 집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곳은 사랑마당이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사랑누마루를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꺾어져 접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사랑마당은 북쪽으로 보이는 사당과 그 앞에 심어진 500년 넘은 향나무까지 사랑채 공간과 같은 성격으로 이어진다. 실제 이 댁에 큰 제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당이 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마루의 아자난간이나 사랑방의 불발기창 등은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런 격식을 갖추며 집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안채는 ㅁ자로 반듯하게 꾸며진 마당을 감싸면서 실들이 이어진다. 중문을 들어서면 높은 기단 위에 정면으로 대청이 보이고 좌우에 방이 마주하고 있는데, 왼쪽이 안방이다. 안방 아래로는 정지가 이어지고 건넌방 아래는 책방이 연결되어 있다. 정지는 본채의 좌측에 있는 장독대로 출입이 가능하여 여자들의 활동공간인 동시에 집안의 식생활을 책임지는 곳이기도 하다. 높은 기단을 올라 다시 댓돌을 밟고 서야 대청마루에 오를 수 있다. 지면에서의 높이만큼이나 서까래까지의 높이도 보기 드물게 높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마루에 올라서도 외부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행랑채 지붕 처마골로 막힌 중문이다. 여성들의 바깥세상 구경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송첨 종택은 양동마을과 그 역사를 같이 해 온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관가정은 손중돈이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건축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가옥이다. 집은 안강평야와 형산강의 조망 위치가 가장 좋은 물봉산 끝자락에 자리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집의 택호가 아주 적절하게 조화된다. 작은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사랑채과 행랑채가 대칭으로 길게 이어진다. 중문을 들어서면 ㅁ자 마당을 두고 본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네 칸의 누마루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랑은 세 개의 방과 정지로 구성하였다. 사랑의 윗방과 아랫방은 2분합 맹장지 들어열개분합문으로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때는 이 문을 들어올려 두 개의 방과 마루까지를 하나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은 계자로 꾸미고 마루 대공에도 작은 규모의 화반대공을 조각하는 등 대종가인 송첨 종택에 비해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다. 안채는 전면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방에 정지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안방 아래로는 바닥을 마루로 한 고방이, 상방 아래로는 전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을 뿐이다. 정지를 행랑채에 속하게 한 것으로 보아 안방 아래 마루 공간이 특별한 활용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에 종가를 송첨 종택으로 다시 옮기면서 관가정은 손씨 문중의 정자 및 영당다례를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그 배경이 된다. 종가에서 사당은 사랑채에서 보이는 사랑마당의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관가정의 사당은 반대편 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여강이씨 문중의 무첨당과 향단은 두 가옥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집의 배치 및 평면 구조에 있어서도 손씨 문중의 집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먼저 대종가인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1463~1500)이 터를 정하고 살던 집이다. 사랑채이자 별채의 기능을 하는 무첨당은 ㄱ자 형식의 집으로, 화려한 기법의 부재들로 안채와는 완전히 별도의 독립된 공간을 영위하고 있다. 큰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서편방, 동편방이라 불리는 사랑방을 두고 서편방 앞으로는 지형의 높낮이를 활용한 누마루를 두어 집의 격을 높였으며, 동편방 옆으로는 따로 달아낸 눈썹지붕 아래 책을 보관하는 판벽으로 마무리된 서고를 연결한 것이 특이하다. 무첨당 마당을 지나면 우측에 ㅁ자형 평면의 본채로 이어진다. 중문의 좌측으로는 무첨당 방향으로 툇마루를 붙인 사랑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행랑 역할을 하는 아랫방과 고방이 연결된다. 대청과 이어진 안방 옆으로는 정지가 붙고 그 아래에 집의 규모에 어울리는 방, 곳간, 헛간 등이 ㅁ자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사당은 집이 앉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이 배치하였다. 무첨당에서 본채로 가는 중간에 높은 계단을 오르면 단청을 한 사당의 삼문 앞에 이른다. 사당 영역은 따로 담장을 둘러 구획을 하였으며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건물 앞에 서면 마을 입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향단은 마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집이다. 이는 지붕이 유난히 여러 방향으로 중첩되어 있으며 집이 주변의 건조물들에 비해 높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집은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 재직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동생 이언괄李彦适(1494~1553)에게 지어 준 살림집이다. 집의 택호는 이언괄의 손자 향단香壇 이의주李宜澍(1567~1637)의 호를 따라 건축 이후에 붙여졌다. 경북 지역에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들이 많이 있지만 향단처럼 독특한 외관과 평면을 가진 예는 찾기 힘들다. 향단의 평면은 일반적으로 日자형이라고 한다. 이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두 개의 ㅁ자형 마당을 중심으로 매우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지면서 두 개의 ㅁ자가 합쳐져서 日자형으로 보기 때문이다. 높은 기단 위에 앉은 행랑채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은 안채 공간, 우측은 사랑채 공간이 나온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사랑채 대청은 전면이 개방되어 건너편 심수정과 성주산을 마주 볼 수 있다. 또한 사랑 대청의 상부는 화려한 화반대공으로 꾸미고 방문도 띠살과 넉살무늬를 섞어 사용하는 등 다양한 장식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이렇게 개방적인 사랑채에 비하여 안채는 작은 마당에 매우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안방과 정지, 정지에서 이어지는 2층 구조의 수장공간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안방에서 이어지는 대청은 마당과 이어져 뚫린 지붕의 개방감을 내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집은 마을에서 외부에 개방적일 수 밖에 없는 입지에 위치해 있어 평면의 구성에 있어서는 반대로 내부지향적인 방향을 택한 것이다.

경주 양동마을 이향정 고택(慶州良洞 二香亭古宅)

주 01)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놓아 납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안채도 또한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중앙 전면기둥만은 두리기둥이다. 사랑채의 구조는 낮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 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놓아 납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안채도 또한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중앙 전면기둥만은 두리기둥이다.

그리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아래칸, 안방 위칸을 각 1칸씩 두고, 다음 2칸의 대청, 1칸의 건넌방을 두었는데, 방과 대청 전후로는 반칸폭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부엌 뒤쪽에 있는 방앗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서쪽에서부터 축사 2칸, 방앗간 1칸, 광 1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근에는 아래채의 디딜방아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각 방과 대청 전면에는 반칸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특히 서쪽 끝퇴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一자형 아래채는 사랑채와 직각을 이루는데 남쪽 끝에서부터 2칸의 광, 2칸의 헛간, 2칸의 광을 두고 있다. ㄱ자형 안채는 서쪽 끝에서부터 아랫방 1칸, 광 2칸, 부엌 3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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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문화유산] 건축가 김봉렬 편(경주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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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이향정 고택(慶州良洞─二香亭古宅)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勿자형마을의 동구 초입, 동쪽 언덕 아래 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주택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었다.

一자형 사랑채, 一자형 아래채, ㄱ자형 안채, 一자형 방앗간채가 전체적으로 트인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서쪽 끝에서부터 건넌방 1칸, 대청 2칸, 사랑방 2칸, 1칸 크기의 방과 반 칸의 서실을 두었다. 또 안마당과의 출입은 건넌방 뒷문으로 하고 있다.

각 방과 대청 전면에는 반칸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특히 서쪽 끝퇴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一자형 아래채는 사랑채와 직각을 이루는데 남쪽 끝에서부터 2칸의 광, 2칸의 헛간, 2칸의 광을 두고 있다. ㄱ자형 안채는 서쪽 끝에서부터 아랫방 1칸, 광 2칸, 부엌 3칸을 두었다.

그리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아래칸, 안방 위칸을 각 1칸씩 두고, 다음 2칸의 대청, 1칸의 건넌방을 두었는데, 방과 대청 전후로는 반칸폭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부엌 뒤쪽에 있는 방앗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서쪽에서부터 축사 2칸, 방앗간 1칸, 광 1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근에는 아래채의 디딜방아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주 01)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놓아 납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안채도 또한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중앙 전면기둥만은 두리기둥이다. 사랑채의 구조는 낮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 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놓아 납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안채도 또한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중앙 전면기둥만은 두리기둥이다.

가구(架構)는 납도리 삼량(三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각형(角形) 마루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나 부엌간 상부에서는 용마루를 높여 합각을 형성하였다.

경주 양동마을 – 문화유산여행 – 이야기

서백당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리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인(忍)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양동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문벌이 서로 협조하며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조선 시대의 유교적 전통 사상을 잘 반영한 전통 건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과 여강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양반 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들, 그리고 정자와 서당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옛 건물들이 민속과 함께 잘 보존되고 있어 그 어느 민속마을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에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관가정은 조선 중종 때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1463-1529)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손소공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보물 제44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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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촌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오래된 미래’ 양동마을 500년 고택 ‘무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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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경주 양동마을

경주에서 형상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16km에 있는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더불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동족(씨족)마을이다. 양동마을은 물(勿)자형의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따라 높은 곳에는 반가(班家)들이, 그 아래에는 여염집들이 있어 조선 시대 신분제도의 일면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서백당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리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인(忍)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3호)

무첨당 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의 부친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다. 이 건물은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볼 수 있으며 손님 접대, 휴식, 책읽기 등의 용도로 쓰이던 곳으로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라 할 수 있다.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보물 제411호)

관가정은 조선 중종 때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1463-1529)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손소공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보물 제442 호)

양동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문벌이 서로 협조하며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조선 시대의 유교적 전통 사상을 잘 반영한 전통 건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과 여강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양반 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들, 그리고 정자와 서당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옛 건물들이 민속과 함께 잘 보존되고 있어 그 어느 민속마을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에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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